조도가 높은 빛이 어떻게든 꾹 감은 눈꺼풀 틈새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와 붉은 잔상을 남기며 송곳처럼 동공을 마구 찔러댔다. 아무리 미간을 찌푸리고 눈동자를 눈꺼풀에 숨기며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아도 날카롭게 파고드는 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그 고통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었다. 한참 빛과 씨름하던 일리야는 언제부턴가 침착하게 똑바로 서 있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앞서 한 무리의 남자들로부터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다음에 강제로 옷을 다 벗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는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화려하게 달고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가끔씩 바닥에 연결되어 쩔그렁대는 무거운 족쇄가 발목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신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입 안의 터진 상처 위를 혀로 핥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계획한 것을 제대로 실행해 보기도 전에 KGB에 잡혀온 일리야는 얌전히 그들을 따라왔지만 꼿꼿하게 굴었다. 거울처럼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설치된 취조실에서 퍼부어진 모든 질문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고, 그 때문에 그곳에 갇혀 있던 약 사흘 동안 그에게는 물 한 모금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취조가 계속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올렉이 나타났을 때, 일리야는 아이러니하게도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물과 음식 없이 사흘을 버티느라 기력이 빠진 몸으로 올렉의 손짓 한 번에 고문실로 끌려가는 것이 차라리 알전구만 환하게 밝힌 취조실에서 말없이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 나았다. 일리야에게는 정신적 압박감을 견디는 것이 신체적 고통을 참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끌려온 KGB 체코슬로바키아 지부의 고문실은 여러 끔찍한 장비가 널려 있던 가비의 삼촌 루디의 고문실보다는 현대적이지만 한층 더 어둡고 불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고문실에 발을 들일 때부터 기가 눌렸을 터였다. 그러나 일리야는 손목에 덜컥이는 수갑을 찬 채로 반항도 못하고 기절하기 직전까지 집단 린치를 당하면서도 아픈 소리 한 번 허투루 내지 않았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줄담배를 피우던 올렉은 눈빛만 형형하게 빛내는 일리야를 지켜보다가 발치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였을 때에야 꼭 고고한 척하는 창녀처럼 군다고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일리야가 신음 한 번 안 낼지언정 정말로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버티고 버텨도 일리야의 마지막은 동토로 뒤덮인 시베리아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올렉이 굳이 고문까지 하면서 심문을 질질 끄는 것은 다만 수고로운 짓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가 굳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리야가 몇 달 동안이나 자신을 골탕 먹인 것에 대해 괘씸죄를 묻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리야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연방을 등지고 도망친 대가란, 특히나 일리야의 경우에는 사형이나 겨우 면하고 언 땅에 평생 갇혀서 지내야 하는 형벌로 돌아올 것이 자명했다. 그것은 그의 도주 사실이 전해졌을 때 이미 KGB 내부에서 일사천리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을 테다. 그러니 그는 올렉이 약간의 재미를 보기 위해서 적국의 스파이들에게나 하던 고문을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괴로울 정도로 고통을 느낄 때마다 정신은 맑아지기 마련이었으므로.


다만 일리야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제 손가락 한 마디밖에 안 될 손을 꼬물대고 있을 아기의 미래가 불확실해진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이만 생각하고 행동해왔고 앞으로도 그러려고 했었다. 그러던 그가 올렉의 굳은 표정을 마지막으로 까만 두건을 덮어쓴 채 이곳으로 잡혀온 지 오늘로 적어도 나흘은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일리냐는 한시도 아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그가 아이를 돌봐주던 부부에게 미리 지시사항을 읊어놓기는 했지만 KGB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꼬리가 붙은 이후로 그는 일부러 아이를 보러 가지 않았고 취조실에서 그를 심문하던 KGB 요원도 아이 이야기는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아직 그들도 아이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리야는 절대로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가 아는 스파이 세계에서는 정말로 많은 정보들이 오갔으며 그 중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없었다. 적절한 때가 되면 그에 맞는 적절한 정보가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일리야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기의 안전이었고, 또한 그는 흔쾌히 아이를 맡아준 부부가 피해를 입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걱정 마라, 일류샤. 괜찮을 거야. 적어도 너만은, 너만은 괜찮을 거란다.’

어머니.”


일순 까마득한 환청과 함께 몸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려는 것 같은 느낌에 일리야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곧장 환한 전구의 빛이 벌침으로 쏘는 것처럼 그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파란 홍채가 늘어나면서 까만 점처럼 동공이 쪼그라들었으나, 일리야의 시야는 하얗게 점멸했다. 강렬한 빛에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다가 발목에 있는 족쇄 때문에 채 두 걸음도 못 가서 멈춰 서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실내에 쇳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는 다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제야 그는 어머니가 억지로 남자들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그들이 아버지의 친구들이라 소개하며 웃는 얼굴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 정말로 괜찮을까요?’

 

 

❄❄❄

 

 

천하태평이네.”


가비가 상당히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퉁명스럽게 단어들을 던졌다. 하지만 공을 튀기듯이 던져진 말에도 나폴레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따뜻한 햇볕 아래에 놓인 긴 의자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고급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테라스에서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즐기는 햇살은 비싼 숙박비보다도 더 큰 값어치를 했다.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한숨을 내쉰 가비가 덧붙인 소리를 듣고도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태연하게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잔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더니 자신을 내버려두라는 뜻으로 가비를 향해 빈 잔을 든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몸짓에 가비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나폴레옹은 이미 볕기를 즐기는 모양새로 눈까지 감고 있었다. 또다시 작은 한숨이 가비의 예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몇 달 전에 일리야가 증발한 것처럼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뒤로 기분을 조절하는 장치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한 나폴레옹은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는 꼭 심술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아끼던 장난감을 잃어버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가비의 눈에는 그런 그가 볼썽사납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안타깝게 보였다. 일리야와 나폴레옹의 관계가 어떤지는 그들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녀는 나폴레옹의 심정을 그저 짐작이나 할 따름이었다.


아직도 그녀는 일리야가 사라졌던 날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엉클의 임무 하나가 막 성공적으로 끝나고, 네 사람은 다음 임무 전까지 각자의 생활로 돌아갈 일만 남은 때였다. 호텔의 체크아웃 시간이 되었을 무렵 가비의 방에 찾아온 이는 짐을 옮겨주러 온 벨보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얼빠진 표정을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일리야는 단 한 순간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고 떠났다. 하루아침에 한 사람이 그리도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깨달은 셈이었다. 그런데 일리야가 단 하나 남겨 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가 그리도 소중히 하던 손목시계였다. 흡사 그가 분명 이 세상에 있었음을 알리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시계는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이제 그 시계가 자리한 곳은 나폴레옹의 손목이었다. 그는 단 한시도 그것을 손목에서 풀지 않았다. 일리야가 그랬듯이.


벌써 2주째야. 알아?”


가비가 나폴레옹이 손에 들고 흔들던 빈 유리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손이 허전해지자 그녀를 슬쩍 돌아본 나폴레옹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면서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그것밖에 안 됐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했는데?”


대답이 아닌 질문이 나폴레옹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가비는 짜증을 내는 것처럼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맞서서 질문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깨만 한 번 들썩이고 말았다.


이제 포기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네. 그럼 그 손목시계도 이제 풀지 그래?”


그녀가 손목을 가리키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제야 나폴레옹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똑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시계의 가죽끈을 매만지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럽 사람들은 겨울에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로 온다고 하지. 해를 볼 수 있거든.”

솔로.”

그동안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알아?”


나폴레옹은 넋두리를 하듯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언뜻 덤덤해 보였지만, 동시에 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비는 나폴레옹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그의 한쪽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가 일리야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는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CIA의 데이터베이스를 몰래 들여다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온 유럽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의 정보통까지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처음 석 달 동안 그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혹시나 엉클 외부로 일리야에 대한 소식이 새어 나갈까 염려하여 가비와 웨이벌리가지 속이며 그들 뒤에서 혼자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비는 정말이지 혀를 내둘렀다. 그녀도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 일리야에게 제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게 해달라고 빌며 걱정하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정말로 제 목숨을 바칠 작정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작은 실마리 하나 주지 않는 일리야가 오히려 야속할 정도로.


겨울에 로마에 온 건 처음인데 말이야.”


나폴레옹이 제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는 손길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잔뜩 지친 사람 같이 보였다. 가비는 조금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솔로가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나가떨어진 것이라면?’


그녀는 자신이 왜 나폴레옹을 찾아왔는지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조금 전에 그녀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의 발신자는 최근 들어 갑자기 바빠진 것처럼 보이던 웨이벌리였다. 그는 가비가 전화를 받자마자 엉클의 임무를 전달할 때처럼 여상스러운 투로 어떤 정보를 그녀에게 전달했는데 그의 음성이 아주 평온해서 하마터면 가비는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웨이벌리의 정보는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솔로, 나는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


가비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나폴레옹은 대꾸하지 않았다.


좀 전에 정보가 하나 들어왔어.”

그래.”


나폴레옹은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가비가 눈썹 사이를 조금 찌푸렸다.


잘 들어. 올렉이.”


일리야의 상관인 올렉의 이름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이 고개를 홱 돌려서 가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화가 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나폴레옹은 크게 소리쳤다. 깜짝 놀란 가비가 몸을 크게 움찔했지만, 그는 표정을 단단히 굳힌 채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또 동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마구 일렁거렸다. 그가 조금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까지 내자, 가비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원래 나폴레옹은 절대 이런 식으로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감정 표현이 한정적이고 생각을 곧잘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성마른 사람처럼 행동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일리야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만큼 나폴레옹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었고, 또 그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가비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예전의 나폴레옹이 그러했듯이 고개를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이고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올렉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어.”


차분하게 흘러나온 가비의 목소리에도 나폴레옹은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녀의 아몬드 색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 그런데 프라하에 있는 한 여관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했어. 투숙객 중 한 명이 외출한 뒤로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 실종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는데?”


나폴레옹은 이제 눈썹을 한쪽만 치켜세우고 짜증스러운듯이 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정해. 내가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고. 마침 그걸 말하려고 했어.”


가비의 진정하란 말에도 나폴레옹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 대신 가비가 한숨을 쉬듯이 호흡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여관 주인이 실종된 투숙객의 외양을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경찰에 진술한 것을 보면,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대.”

그게 누구지?”


드디어 나폴레옹은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며 질문했다.


일리야 쿠리야킨.”






+ 쩜오온에 나올 신간 On the ice  퇴고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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