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1

 

스팍은 앞에 놓인 패드를 뚫어져라 보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깨알같은 글자들이 얼른 나를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했지만, 그는 글자들이 뭉개질 정도로 멍하니 화면 위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것은 넓은 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는 이들 틈에 앉아서 할 만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현재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시간을 때우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었고, 벌칸인이라면 지양해야 마땅한 행동이었다. 일반적인 벌칸인의 논리에 따르면 차라리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언쟁을 하거나 혹은 회의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스팍이 덜 논리적인 종족처럼 행동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연구의 핵심 인물에게 물어보죠.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연구 책임자의 의견 아닌가요?"

 

때마침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높게 묶어 올린 여자의 말에 자기 주장만을 펼치던 목소리들이 일시에 뚝 그치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일시정지한 비디오처럼 회의장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서 아까와 똑같이 앉아 있는 이는 스팍뿐이었다. 그는 여러 쌍의 눈동자에서 나온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대로 굳어버린 밀랍인형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았다. 1초가 영원 같았으나, 스팍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라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팍을 제외한 그들은 오히려 기이한 긴장감에 싸인 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래서 스팍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마 몽상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몽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온통 까만 배경에 노랗고 파란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자유롭게 마구 공간을 떠다니는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빛을 내는 그것이 어떤 형체를 띄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노랗고 파란 빛의 형체를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 형체가 희미해지곤 하는 게 꼭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대체 저게 뭐지?’

 

스팍은 이제 직접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빛이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저만치 멀리 날아가 사라졌다. 분명 그것은 스팍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그의 몽상에 속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본디 꿈도 꿈을 꾸는 자의 것이지만 그가 제어할 수 없었다. 몽상도 결국 꿈과 생각의 경계에 걸쳐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스팍은 눈이 말라서 따가움을 호소하는 것을 느끼며 그의 반을 구성하는 지구인의 피가 저도 모르게 그를 지배했었음을 그제야 알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가는 동안에 다른 이들은 여전히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드디어 입을 연 스팍의 목소리는 끝이 갈라졌다. 그는 금방 다시 입을 다물고 침을 모아 삼킨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부분이 바로 기기를 가동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적법한 절차를 밟아 승인을 받았음에도 이곳에서 계속 논쟁을 벌이시는 것 아닙니까?”

 

스팍은 반문하면서 좌중을 훑어보았다. 아직 그들 중에 그의 결론이 무엇일지 읽어낸 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때로 실험자는 피실험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피실험자를 자처하려는 분은 없는 것 같군요. 애초에 그 점은 논점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역시 외부에서.”

안됩니다. 이 실험은 처음부터 기밀에 부치기로 했던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을 스팍은 단칼에 잘랐다. 지금 상황을 고려해보면, 피실험자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게 물론 가장 나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실험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연구실 밖에 알려진다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실험의 유일무이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니 피실험자도 내부인이어야만 했다.

 

문제는 내부인이 생각보다 아주 많이 한정되어 있으며 그들 중 피실험자에 자원하려고 하는 자가 없는 점이었다. 피실험자가 할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저 기기 안에서 기기를 작동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실험자에게 전달하면 되었다. 만약 실험자들 중 한 명이 피실험자가 되면 실험이 더 수월하게 이루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이유는 기기를 작동한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본인이 실험자인 만큼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에 그들은 지나치게 똑똑했다.

 

그러니까 제가 합니다.”

 

스팍은 늘 그랬듯이 매우 평이한 투로 선언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몇 초간 의미를 헤아려야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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