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루는 침대에 널브러지듯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았다. 얇은 커텐이 살짝 드리워진 창밖에서부터 옆 건물의 불빛과 가로등 불빛 따위가 비쳤으나, 방 안은 깜깜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아날로그식의 시계 소리뿐이었으니 깜깜한 방에는 적막함마저 감돌았다. 그 속에서 그는 머릿속을 사로잡은 한 가지 생각만을 계속해서 했다.

 

몇 시간 전, 엔터프라이즈 호가 지구로 귀항하던 때였다. 술루는 장장 3 6개월이 걸린 임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간다는 것 때문에 들뜬 함장 짐 커크를 보며 자꾸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도 커크는 장난기가 많고 농담을 잘하는 함장이었지만, 그날따라 그가 더 재미 있어 보였던 것은 술루가 그를 좋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런 커크에게 익숙해진 다른 크루들도 그날만큼은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고 함께 신이 나 있었다. 푸른 별 지구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했으므로.

 

엔터프라이즈 호는 순조롭게 지구로의 워프를 해내고 정거장에 도킹했다. 곧바로 커크가 짐짓 꾸며낸 근엄한 목소리로 스타플릿 본부로의 귀환을 알림과 동시에 해산 명령을 내리자마자 아까부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크루들은 얼른 하나둘씩 셔틀을 타고 지구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마치 관례처럼 모든 크루들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교를 비우는 커크를 따라 마지막으로 엔터프라이즈 호에서 내리던 술루는 내심 아쉽기도 했다. 지구로 돌아가면 당분간 그의 함장을 만날 일이 없었으니까. 그들의 거처는 꽤나 떨어져 있었기에 굳이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우연히 마주치는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한참이나 망설이던 술루는 이번에야말로 조금만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하자.’

 

그가 바라는 건 많은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기쁠 것 같았다. 애초에 그는 커크에게 고백하는 것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혼자 되는대로 감당하고 감당하다가 정 안 되면 그때 어떻게든 되리라. 지금은 그저 술 한 잔 기울이며 한 마디 말을 더 섞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그리고 커크가 술 한 잔 하자는 말을 거절할 리는 없을 테다.

 

그러나 셔틀이 지상에 닿고 드디어 고향 땅을 밟았을 때 술루는 생각했던 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가 커크에게 가서 말을 걸려는 순간에 커크는 어떤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은 술루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을 선사했다. 혼자 조용히 속으로만 삭이던 것도 안 되는 일이었나? 술루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우뚝 멈추어 섰다. 높다란 기둥을 지나치는 순간에 스팍과 함께 그 뒤로 사라진 커크가 무엇을 했는지 본 사람은 분명 술루뿐일 테다. 원치도 않았던 비밀이 준 날카로운 고통이 가슴을 통과하면서 퍼뜨리는 통증에 토할 것만 같았지만, 술루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듯이.

 

길게 한숨을 쉬면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술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상대방도 모르는 사이에 받은 상처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는 눈을 감았다.

 

 

*

 

 

무어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선 술루는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눈에 띄는 간판에 이끌려 어떤 클럽으로 들어왔다. 그는 시끄러운 음악이 어디선가 쾅쾅 울리고 현란한 빛이 울렁거리는 가운데 지구인과 다른 행성 출신들이 한데 섞여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으나, 곧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바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정장을 차려입은 B612 행성에서 온 바텐더를 불렀다.

 

보드카로 줘요.”

보드카요?”

, 보드카요.”

 

바텐더가 꼭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되묻더니 술루가 뒤쪽의 커다란 보드카 병을 가리키자 그제야 술을 내왔다. 유리잔에 반쯤 찰랑이는 투명한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속이 타는 것을 느끼면서 술루는 하고 많은 도수 높은 술 중에 굳이 보드카를 찾는 이가 사라진 지도 벌써 1세기가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는 너무나도 친숙해진 외계의 술들이 언제든지 취기를 올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루는 피식 소리를 내면서 실소했다. 그까짓 술 종류가 다 뭐야? 참 웃기지. 혼잣말을 하면서.

 

그렇게 술루는 바에 걸터앉아서 술만 연거푸 마셔댔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다가왔지만, 그는 아주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뒤로 뺐다. 개중에는 하룻밤 정도는 가볍게 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는 방금 또 여성을 돌려보내며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잔을 비웠다. 그러고서 바텐더에게 한 잔을 더 달라고 하려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이것도 못 해먹겠군. 완전히 실패자 같이 행동하고 있잖아.’

 

괜히 청승이나 떨고 있는 자신에게 술루는 문득 화가 치밀었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고 그럴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나, 어쨌거나 눈 딱 감고 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후회는 이미 저편으로 넘겨 버렸다. 혼자서 시작한 마음을 들킬까 두려운 사람처럼 숨기고 또 숨기다가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진실을 마주친 것도 결국 술루 그 자신이 선택한 것 아닌가. 처음부터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게 스스로 덫을 놓아 두고는 이제 와서 거나하게 실연당하고 슬픔에 잠긴 사람처럼 굴고 있다니. 술루는 흐흐 웃기 시작하다가 금세 세상에서 다시 없을 재미를 본 것처럼 배를 잡고 하하 웃어댔다. 그럼에도 시끄러운 음악에 그의 웃음 소리가 가득 묻히는 것이 꼭 그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웃었다.

 

어어, 괜찮으세요?”

 

그러다가 그만 술기운에 뒤로 넘어질 뻔한 술루를 누군가가 다급하게 붙잡아 주었다.

 

저는 괜찮... 체콥?”

 

뒤에서 단단히 받쳐 주는 팔에 의지해 똑바로 서려고 노력하던 술루는 사과를 하려다가 말고 상대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술루? , ,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네요."

 

번쩍이는 조명이 비추고 지나가면서 술루를 알아본 체콥은 술루보다도 놀란 표정이었다. 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됐네. 친구랑 온 건가?”

. 술루는요?”

이만 가려고 했지.”

 

술루는 체콥의 질문을 무시하고 씩 웃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체콥의 어깨를 툭툭 치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나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그는 그만 또 넘어질 뻔했다. 체콥이 놀라면서 다시 그를 단단히 잡아 일으키더니 부축하기 시작했다. 술루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체콥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클럽 밖으로 나가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조용했다. 술루는 아무 말 없이 부지런히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려고 애썼고, 그를 부축하는 체콥도 덩달아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땅바닥만 바라보며 까만 밤하늘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에 조금씩 옷이 젖어가는 것도 몰랐다.

 

비가 오네요.”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은 체콥이었다. 술루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고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체콥을 바라보았다. 그때 시선이 마주치고, 둘은 걸음을 뚝 멈추어 섰다.

 

"체콥."

"."

 

술루는 체콥의 연한 색깔의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나랑 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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