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바람이 불어오던 계절이 어느덧 훌쩍 떠나버리고 기온이 점점 떨어져서 이제는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얗게 수증기가 올라오고 외투를 입지 않고 밖에 나가면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정도가 되었다. 스티브는 깜빡하고 외투를 막사에 놔두고 나왔지만 다시 외투를 가지러 갈 생각도 없이 그저 양 팔을 한 번씩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다음날에 감기로 열이 오를 것을 걱정해야 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을 하기는 커녕 아무 생각도 없었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가 그에게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바보야, 이젠 그러고 있으면 춥다고.”

 

잠시 예전 생각을 하며 서 있던 스티브의 어깨 위로 무게감 있는 군용 코트가 얹혔다. 스티브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제임스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스티브는 코트의 양쪽 깃을 잡아서 여미었다. 더 이상 웬만한 일로는 그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에도 제임스는 여전히 그를 걱정했다. 그래서 스티브는 바보란 소리에 대꾸하지 않았다. 군대에 있기 때문에 계급질서에 위배되는 일인데도 말이다.

 

고마워.”

 

제임스는 씩 웃으면서 스티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스티브가 그 보다 조금 더 커지는 바람에 자세가 영 편치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야, 우리 꼬맹이 많이 컸다?”

이제는 꼬맹이 아니라니까? 그놈의 꼬맹이 소리 좀 그만해, .”

 

제임스는 스티브의 어깨를 몇 번 팡팡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에 스티브가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러면 제임스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 이제 나보다 더 커졌다고 그러는 거야? ? 조그마해도 깡만 셌던 브루클린 꼬맹이가 그리워지려고 하는데.”

버키, 장난치지 마.”

 

스티브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딛으며 제임스의 어깨동무에서 벗어났다. 돌아보니, 제임스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스티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의 얼굴에서 피곤함을 볼 수 있었다. 스티브가 히드라의 소굴에서 그를 구해준 뒤로 여러 날이 흘렀지만 도무지 그는 예전과 같은 생기를 되찾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거르지는 않았지만 아직 많이 먹지도 못했고, 잠자리에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숙면을 취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스티브는 친구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일을 당한 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제임스는 스티브의 안색이 조금만 달라져도 제 안위는 뒷전으로 팽개쳤다. 스티브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제임스도 얼굴을 굳혔다. 스티브는 스스로 바른 것을 좇아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려고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지켜야하는 것들을 생각하느라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는 스티브를 걱정해주는 것은 제임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은 스티브가 할 일이 아니었다.

 

아까 저녁은 제대로 먹었어? 어젯밤에 잠은.”

스티브.”

 

제임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유독 스티브에게는 잘 져주는 제임스가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스티브는 잠시 그와 서로 마주보며 기 싸움을 했다. 친구 사이에 걱정 좀 하면 어때서. 하지만 스티브는 결국 한숨을 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넌 내가 하나뿐인 내 친구 걱정하는 게 싫지?”

 

먼저 걸음을 뗀 스티브가 불퉁하게 말했다. 제임스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아까 걸쳐준 코트를 제대로 입지 않고 그대로 옷깃만 부여잡고 가는 스티브의 뒷모습에 씩 미소 지었다. 그 언젠가 전쟁이 세계를 덮치기 전, 캡틴 아메리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 않았던 조그만 브루클린의 꼬맹이에게 제임스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준 적이 있었다. 체격의 차이로 인해 제임스의 외투는 그에게 너무 컸지만 그 조그만 아이는 소중한 것을 선물로 받은 양, 양 손으로 외투자락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갔다.

 

제임스는 코트를 걸치고 저만치 걸어가던 스티브가 뒤돌아보며 얼른 오라고 소리칠 때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덮인 조그만 뒤통수는 그때와 여전히 같아서, 제임스는 웃는 얼굴을 하고서도 공연히 아려오는 마음을 애써 숨겼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자 기온은 순식간에 내려갔다. 스티브는 무언가 대단한 작전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커다란 막사로 들어가서 몇 시간 째 나오지 않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막사 옆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하얗게 김이 피어올랐지만 제임스는 밖에서 스티브를 기다렸다. 아마 회의가 끝나고 나온 스티브가 그를 보면 크게 뭐라고 한 마디 할 것이 분명했으나, 제임스는 옷깃을 여미고 간혹 추위를 떨쳐낼 듯이 몸을 털며 그저 기다렸다. 왜 기다리느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글쎄. 그가 할 대답은 딱히 없었다. 적어도 제임스 뷰캐넌 반즈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드라의 소굴에서 구출된 후로 제임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또한 걱정으로 이어져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스티브가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스티브가 혈청을 맞아서 건강해지고 늠름한 남성, 멋진 군인이 되었다고 한들 제임스에게 그는 그저 스티브일 뿐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친구, 가장 소중한 친구, 가장 사랑하는 친구, 그리고 어쩌면. 제임스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히드라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았다모두들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으나 그는 생생히 기억한다. 다만, 슈퍼 솔저 프로젝트의 성공작으로서 스티브가 계속해서 선봉에 섰다가 히드라에 잡혀가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임스는 땅에서 툭 튀어나온 돌부리가 붉은 빛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딱딱한 군화를 신은 발로 그것을 툭툭 찼다. 돌부리를 차던 발이 조금 아려올 쯤에 막사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곧바로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섰다. 스티브는 맨 마지막에 페기의 뒤를 따라 나왔다. 페기는 제임스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가버렸고, 제임스는 자신에게 화를 낼 스티브를 기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스티브는 제임스를 보지 못한 건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그를 지나쳤다.

 

스티브?”

 

제임스는 스티브의 뒤를 따라가며 그를 불렀지만, 스티브는 듣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스티브 로저스!”

 

제임스가 스티브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어깨를 짚자, 마침내 스티브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버키?”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못 듣고.”

, 그게 회의내용을 좀.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아까 돌아간 거 아니었어?”

 

스티브는 걱정과 화가 섞인 말투였다. 제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씩 웃었다.

 

나름대로 요양하랍시고 작은 막사를 나한테 통째로 내줬는데, 거기서 딱히 할 게 없잖아. 밤공기가 쌀쌀하니 잠도 깰 겸 밖에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회의가 꽤 많이 길어졌는데, 상황이 안 좋아? 심각한 건가?”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할거리가 좀 생겨서.”

뭔지 가르쳐주진 않을 거고?”

 

스티브는 한쪽 입술 끝을 조금 올리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는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때 스티브가 갑자기 제임스의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이번엔 좀 자연스러울 뻔 했어. 세상에! 뺨이랑 코끝이 차갑잖아. 내내 기다린 거지? 쓸데없이 그러지마. 이제 감기에 걸릴 위험성은 상대적으로 나보다 네가 더 많다고.”

 

제임스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스티브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스티브는 회의를 했던 막사 안에서 데워진 자신의 손으로 이제는 제임스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티브는 잠시 제임스의 얼음장 같은 손을 주물러주었다.

 

언젠가 나더러 멍청한 짓 하지마라고 하던 분이 어디의 누구시더라?”

네 눈앞에 서있는 세계제일미남?”

멍청이.”

 

제임스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스티브의 말을 받아넘겼다. 스티브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조금 더 자신의 온기를 제임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화를 풀지 않은 채로 휙 손을 빼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조금 따뜻해진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고는 얼른 스티브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스티브의 옆에서 걸어가면서 스티브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스티브는 저만치 앞의 땅을 쳐다보며 제임스에게 말하기 곤란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에 잠긴 스티브의 얼굴을 보고는 제임스도 얌전히 앞만 보며 걸었다.

 

스티브의 막사와 제임스의 막사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있었다. 스티브는 그들이 헤어져야 할 때쯤이 되었을 때 걸음을 멈춰 섰다.

 

.”

.”

난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 이 전장에 있을 거야. 슈퍼 솔저니까 내가 싫다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너도 정말로 계속 남을 거야?”

, 스티브.”

 

제임스는 자신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저쪽에서 일렁이는 붉고 노란 빛이 스티브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제임스는 그 눈에서 자신에 대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 하나뿐인 조그만 친구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 위험한 전쟁터에 있는데 어떻게 혼자 둘 수 있겠어? 또 누군가한테 두들겨 맞고 있을 때 내가 없으면 누가 구해주느냔 말이야.”

버키, 난 더 이상.”

알아. 하지만 넌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알아. 난 네가 여기 있는 한, 떠나지 않을 거야.”

 

제임스는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진지했다. 스티브는 제임스의 군용 외투 위에 수놓아진 그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병장 제임스 B. 반즈. 저격에 뛰어나고 군복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스티브는 히드라의 기지에서 그를 빼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자기 곁에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은 그토록 이 전쟁에 나서길 원했고 이제 이곳에 있어야만 할 인물이 되었으나 제임스는 아니었다. 좀 전의 회의가 길어진 것은 제임스의 문제가 엮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에게 새로운 작전지시가 내려졌고, 히드라를 겪어보았기 때문에 제임스가 그 작전에 동참할 인물로 거론되었다. 스티브는 거의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스티브는 제임스의 파란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은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고, 그런 자신 때문에 제임스도 남겠다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 스티브는 제임스의 부드러운 눈빛 속에서 절대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제임스의 확고한 의지를 느꼈다. 스티브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래, 알겠어. 내일은 이동할 거라고 하니까 오늘은 푹 자도록 해. 마을을 지나갈 거라고 하니까 어쩌면 마을에서 술 한 잔 할 수도 있을 거야.”

그거 듣던 중 좋은 소식이네.”

 

휘파람을 부는 제임스에게 스티브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자.”

너도.”

 

먼저 인사하고 돌아서는 스티브의 뒤에 제임스가 인사했다. 스티브는 뒤돌아서서야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가 반대한다고 해서 제임스를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은 없었다. 상명하복이 원칙인 군대에서, 그것도 전시에 제대를 시켜준대도 본인이 원해서 남아있겠다는데 이미 명령이 내려진 후에 그를 빼낼 방법이 있을 리가. 스티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임스에게 작전에 대해 알리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가 제임스의 입대 전에 슈퍼 솔저 프로젝트의 실험체로 입대허가를 더 빨리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제임스가 히드라에 잡혀갈 때 옆에서 그를 도왔더라면 어땠을까. 스티브는 의미 없는 가정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조금 더 훗날에 스티브는 이 순간과 관련된 의미 없는 가정을 한 가지 더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그를 돌려보냈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사랑하는 버키, 내 친구.






+이벤트로 썼던 글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음..... 2014년 8월 22일자로 저장된 옛날깐날 버키스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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