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냄새가 비렸다. 눈앞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는데 희한하게도 푸른색만은 선명했다. 갑자기 미지근한 체온이 팔뚝에서 힘겹게 제 존재를 더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물방울 몇 개가 후두둑 아래로 떨어진 후에야 시야가 트였다.

 

울지 마.’

 

퍼렇게 질린 입술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울지 마.’

 

마지막 말을 알아보자마자 시야가 다시 뿌옇게 변해버렸다.

 

 

 

 

 

평범한 날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로 미루어보건대 오늘도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스티브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위로 밀어 올렸다. 유리창에 튕겨나가던 바깥세상의 소리가 온전히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가 사는 맨션은 시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가 지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조용했지만,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들의 활기찬 소리로 둘러싸였다. 스티브는 그 왁자지껄한 소리를 눈으로 좇기라도 하듯이 양쪽으로 뻗어있는 도로를 천천히 여러 번 고개를 돌려가며 훑어보았다.

 

그렇게 거리를 내다볼 때마다 스티브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의 옷차림, 차들의 모양새는 그가 아는 70년 전과 확연히 달랐지만, 행인들이 거리를 오가고 자동차들이 바쁘게 도로를 달려가는 상황 자체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스티브는 왼편으로 걸어가는 갈색의 구불구불한 머리를 늘어뜨린 삐쩍 마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움일까.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데우려는 것이 느껴졌다. 스티브는 시선을 돌리며 창을 아래로 내렸다. 바깥의 소리들이 다시 유리에 가로막혔다.

 

스티브가 창가에서 몸을 돌리자, 그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불이 들어온 화면을 보니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흰색의 문자들이 건조하게 떠있었다.

 

여보세요.”

 

스티브의 말에도 휴대폰의 스피커에서는 나타샤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티브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여보세요? ? 하지만 치직거리는 소리가 한번 났을 뿐, 그가 기대하는 나타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의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 ㅌ…!”

큰일 났어요, 스티브.

 

극적이게도 나타샤가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동시에 착 가라앉아있었다. 스티브는 나타샤의 말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온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윈터소아니, 버키, 그 사람이 폭주하고 있어요.

 

평범한 날이었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윈터솔저는 그 이름을 수 없이 되뇌었다. 윈터솔저에게는 오랫동안 이름이 없었다. 언제부터, 왜 없었는지도 몰랐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그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가 믿었던 것은 단지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은 일이란 것이었고, 옳은 일이란 곧 임무의 완수를 의미했다.

 

그런 윈터솔저에게 일종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벌어진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텍사스 주의 댈러스로 파견되어있었다. 목표물은 약 5시간 뒤에 차를 타고 나타날 예정이었다. 윈터솔저는 한 건물에 숨어들어서 저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목표물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냉동에서 깨어난 지 3일이 지난 상태였다. 목표물이 많은 사람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어서 틈을 찾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미 몇 시간 전부터 머릿속에서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무언가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것은 어떤 장소이기도, 어떤 인물이기도,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윈터솔저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미지들 속의 장소에 가본 적도 없었고 인물을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들이 윈터솔저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인가. 윈터솔저는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미지들은 점점 더 큰 퍼즐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 퍼즐들에 잠식당하는 게 아닐까. 윈터솔저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다행히 몇 시간 뒤에 임무를 무사히 끝낸 윈터솔저는 본부로 돌아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곧 훗날 브레인 워싱으로 밝혀진 행위가 그에게 가해졌다. 그는 자신이 댈러스에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도, ‘부작용이 있었다는 것도 잊게 되었다.

 

하지만 윈터솔저는 이제 알고 있다. 인간의 기억이란 책들이 가지런히 잘 정돈된 거대한 도서관 같은 것이 아니라 잡다한 물건들이 마구 쌓여있는 거대한 창고와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된 기억일수록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최근의 기억일지라도 깜빡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기억이란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매우 약한 것이다. 히드라는 제임스의 기억창고를 모두 불살라 없애버리려고 했었다. 제임스는 자신의 기억창고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섰지만, 결국 히드라는 그의 기억들을 모두 깨부수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기억만을 주조해서 넣어주었다. 그렇게 제임스 뷰캐넌 반즈는 윈터솔저가 되었다.

 

단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은 스티브 로저스가 윈터솔저의 허름한 창고를 손쉽게 무너뜨릴 지진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깨져서 조각나버린 기억을 이어 붙여줄 존재라는 것도, 그들은 몰랐다. 어쩌면 자신들이 완벽한 윈터솔저를 만들었기 때문에 스티브가 절대로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자만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름 : 제임스 뷰캐넌 반즈.

 

윈터솔저는 여전히 산산조각이 된 기억의 파편들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만큼은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그를 따라왔고 정기적인 검사와 심문도 군소리 않고 받았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윈터솔저로서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기에 그가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런 자신을 보며 스티브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불편했을 뿐이었다.

 

새로운 임무 : 스티브 로저스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 끄으.”

 

남자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이들 중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겁에 질린 표정을 겨우 총신 뒤로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윈터솔저는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손에는 목이 졸려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다. 윈터솔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오른손으로 왼손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스티브처럼 슈퍼 솔저의 힘을 가지고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윈터솔저는 체념한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소름끼치게 울리는 기계음이 귓가에 더욱 선명하게 박혀왔다. 이윽고 무언가 묵직하게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윈터솔저가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아래를 보니, 남자의 시신이 바닥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그런 꼴로 있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윈터솔저는 여전히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는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누구라도 자신에게 다가서는 순간, 그 자는 바닥에 있는 자들과 같은 신세가 될 터였다.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깜빡대는 형광등이 그 광경을 기이하고 무섭게 만들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다가와선 안 돼.”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윈터솔저가 말했다. 흉흉한 소리를 내는 그의 왼팔이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다시 뒤쪽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 윈터솔저는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리를 움직여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지금 당장 새로운 희생자가 나올 리는 없었으나, 저렇게 자꾸 다가와서 왼팔의 사정거리 안에 들면 윈터솔저가 통제할 수 없었다. 윈터솔저는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고 뒤로 돌았다.

 

스티브.”

 

윈터솔저는 이미 기척만 듣고도 스티브인 것을 알았지만 뒤를 돌아 스티브를 직접 확인하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스티브는 비브라늄 방패도 들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새임에 분명했다.

 

버키.”

안 돼, 스티브. 그 자리에 있어.”

버키, 괜찮아.”

괜찮지 않아.”

 

스티브가 자신에게 꼬박꼬박 대답하는 윈터솔저에게 미소를 지었다. 윈터솔저는 저 미소를 자신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기억의 편린들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괜찮아. 난 괜찮아, 버키.”

 

그렇게 말하면서 스티브가 조금 더 다가왔고, 윈터솔저는 왼팔 속의 일종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 부품이 RPM을 최고조로 올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절대로 스티브가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의 왼팔은 제멋대로 들썩이면서 스티브를 향해 뻗어나갔고, 윈터솔저는 스티브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몇 번을 그렇게 하자, 윈터솔저의 왼팔은 거의 요동을 치는 수준이 되어 그의 몸이 왼팔의 움직임 때문에 휘청거릴 지경이 되었다.

 

버키, 뒤로 가지마. 그대로 있어.”

너야말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윈터솔저가 처음으로 소리쳤다. 스티브는 침착한 얼굴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그가 갑자기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으로 윈터솔저에게 달려들었다. 윈터솔저가 뒤로 몸을 더 내뺄 시간도 없었다. 스티브는 곧장 윈터솔저의 요동치는 왼팔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의 왼팔은 최고의 힘을 내면서 스티브에게 돌진했다. 요행히도 스티브는 기계 팔을 양 손으로 막아내긴 했으나 힘에 밀려서 뒤로 세게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가 나고, 먼지가 일었다.

 

스티브.”

 

윈터솔저는 자신의 왼팔이 한 짓에 자신이 놀라서 스티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스티브가 날아간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딛자마자 그의 앞에 나타샤가 쏜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윈터솔저는 윙윙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인지하며 그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곧 벽이 무너진 파편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스티브가 옷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저 왼팔을 누가 저렇게 되도록 만들었으며, 고칠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토니 스타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이쪽으로 와서 도움을 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스티브는 한쪽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처음으로 윈터솔저가 된 제임스를 만나서 육탄전을 벌일 때를 생각해보면, 저 강철로 된 팔은 지금처럼 폭주하는 상태가 아니더라도 스티브가 가뿐하게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 팔이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면 그가 슈퍼 솔저의 온힘을 다해도 겨우 방향을 빗겨가게 하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장담하지 못할 터였다. 스티브는 제임스를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타샤, 이곳을 비워.”

스티브?”

 

나타샤는 항의의 뜻으로 스티브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스티브를 이곳으로 호출하긴 했지만 결코 그를 희생하게 만들려고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스티브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긴 했다. 나타샤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있는 시신들과 같은 꼴이 되는 한이 있어도 스티브를 혼자 남겨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 나 혼자서는 못 막을 것 같아서? 상태는 어떻지?”

 

나타샤는 스티브의 말투에서 냉소를 느꼈다. 특히, 마지막 말에서 스티브는 가장 냉소적이었다.

 

지금도 원격으로 자비스를 통해 시도는 하고 있지만, 토니가 오려면 2시간 가까이 걸릴 거예요. 그 시간동안 아무리 당신이라도 혼자서는 못 막아요.”

우리 모두가 있어도 안 되는 게 맞겠지.”

 

스티브의 말에 나타샤는 침묵했다. 윈터솔저는 이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팔을 억지로 내리누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런 윈터솔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타샤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요. 하지만, 스티브.”

 

스티브는 여전히 윈터솔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제발, 조심해요.”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몰아쳤다. 아마도 의식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성 싶었다. 아니, 그게 다행인가? 스티브는 멍하게 생각했다. 아까 머리를 벽에 심하게 부딪친 이후로 사고능력마저 마비된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티브의 뇌는 또 다시 달려드는 은빛의 무언가를 인지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힘겹게 그것을 막아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남아있는 힘을 짜내어 그것을 막아내던 스티브는 결국 다시 저편의 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로저스.”

 

곧이어, 스티브가 비틀대며 다시 일어서려하기도 전에 윈터솔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걱정, 미안함, 좌절감, 낭패감과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스티브는 현기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윈터솔저의 목소리에 담긴 것들을 읽어내었다. 그리고는 쿨럭이며 밭은기침을 하면서도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버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스티브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여전히 흉흉하게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자신의 왼팔을 오른손으로 가능한 한 세게 붙잡아 누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투성이였고, 그의 은색으로 반짝이던 왼팔도 시뻘건 핏자국으로 뒤덮여있었다. 스티브는 여기저기 피가 나고,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진 몸을 억지로 감싸고 있는 듯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꼴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듯이, 스티브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버키.”

 

폭주하는 왼팔을 어렵사리 붙들고 있던 제임스는 스티브를 보았다. 벽에 거의 기대다시피해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일어서 있는 스티브의 모습이 그의 눈에 콕 박혀들었다. 그러자 제임스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지마. 물러서지마.”

?”

 

제임스는 약간 반항적으로 되물었다. 그의 폭주하는 강철 왼팔이 스티브를 헬리캐리어에서 그랬던 것처럼 반죽음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데도 스티브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임스에게 스티브는 더 이상 임무의 목표물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왼팔을 저지하려고 마구 내려치고 잡아 뜯어보려고 했던 오른팔이 피투성이가 되고 저릿저릿한 것보다도 스티브의 얼굴에 난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것을 다 아는 양, 그때도 지금도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히드라의 잔당들을 처치하는 건 꽤나 골치 아파, 그렇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난 솔직히 과학이니 기술이니 잘 몰라. 그건 예전에도 그랬지. 언젠가 네가 나는 예술적인 기질이 월등하다고 말해준 적도 있었어.”

스티브.”

 

스티브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나마도 아까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옆구리가 쑤셔서 그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제임스의 미간도 같이 찌푸려졌다.

 

네 마지막 임무는 날 죽이는 거였어, 버키. 히드라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지.”

 

스티브는 시선을 제임스의 왼팔로 옮겼다. 붉은 별이 그려져 있는 은색의 강철 팔이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스티브를 정말로 죽이려고 했었고, 지금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움을 모르는 강직한 캡틴 아메리카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 왼팔이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제임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스티브는 언제든지 기꺼이 제임스에게 자신의 목을 내줄 수 있었다. 아마도 제임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잔인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임스 뷰캐넌 반즈이니까 스티브는 몇 번이라도 죽어줄 수 있었다.

 

스티브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제임스의 찡그린 두 눈을 보았다. 제임스는 순간 몰려오는 불안감에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스티브는 찢어진 입가가 아프지도 않은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 팔은 아직 그 마지막 임무를 기억하는 것 같은데, 임무를 완수해야지.”

 

제임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미 실패했고 더 이상 끝맺을 이유가 없는 임무를 지금 완수하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게다가 그는 절대로 스티브 로저스를 죽일 수 없었다. 스티브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제임스는 맥없이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웃기는 소리. 그럴 수 없어.”

버키.”

 

결국 스티브는 눈을 질끈 감으며 호흡을 고르고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른발이 바닥에 닿을 때, 평소에는 느껴지지도 않는 그 충격이 발바닥부터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제임스는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 스티브는 다시 고통스러운 한 걸음을 내딛었고, 제임스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제임스의 왼팔은 목표물이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임스의 등에 벽이 닿고 말았다. 스티브는 담담하게 제임스를 바라보았고,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스티브.”

 

이제 제임스는 옆으로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공간은 넓게 트인 공간이 아니므로 제임스는 자신이 곧 구석에 몰리고야 말 것을 알고 있었다. 스티브도 그것을 알았기에 제임스를 따라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른팔에 두 번째로 벽이 닿았을 때 제임스는 자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버키.”

 

이제 스티브가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버키의 왼팔은 주인의 통제를 벗어날 터였다. 스티브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마치 겁에 질린 채로 궁지에 몰린 표정을 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면서 제임스는 처음으로 간절하게 신에게 빌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오른손은 이미 왼팔을 붙들고 있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신이시여, 제발.

 

다음 순간, 제임스는 제멋대로 앞으로 뻗어나간 자신의 왼팔이 스티브의 하얀 목을 단단하게 틀어쥐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는 왼팔의 힘에 그의 몸이 앞으로 딸려나가는 것도 그는 인지할 수 있었다. 제임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스티브가 반대편 벽에 등을 맞댄 채로 자신의 강철 손에 목이 졸리고 있었다. 목부터 얼굴까지 붉게 물든 스티브는 숨이 막히고 있음에도 숨을 쉬려는 본능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스티브.”

 

제임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스티브의 이름을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오른손으로 왼손을 스티브의 목에서 떼어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티브가 맞은 혈청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혈청을 맞은 제임스의 초인적인 힘에도 은색의 손가락들은 약간의 찌그러짐만 있을 뿐 스티브의 목을 휘어잡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이제 하얗게 질려가는 스티브의 얼굴을 보고는 미친 듯이 왼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제임스의 오른손은 내려치는 압력에 못 이겨서 여기저기 살이 터지면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의 왼팔에는 붉은 손자국이 이전의 손자국에 더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제임스의 움직임을 멈춘 것은 스티브였다. 스티브의 왼손이 제임스의 피가 흐르기 시작한 오른손을 붙들려다가 그러지 못해서 그의 팔뚝에 닿았다. 제임스는 원래도 흰데 완전히 백짓장처럼 허옇게 되어버린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파랗게 빛나는 스티브의 눈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스티브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과 다소 흐려진 시야에도 불구하고 젖 먹던 힘을 모두 짜내고 있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제임스의 볼 위를 매만졌다.

 

울지 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은 울고 있지 않았다.

 

울지 마. 괜찮아질 테니까.’

 

스티브는 미소를 지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온몸이 마비가 된 것처럼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시야가 점멸하고 있어서 보이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의 왼팔에도 더는 힘이 들어가지 못해서 아래로 툭 떨어졌다.

 

난 너와 끝까지 함께 할 거야. 사랑해.’

 

제임스의 왼팔이 안정을 찾아갔다.







+세상에 이것도 2014년 6월...? 이것도 무슨 만신창이 이벤트 글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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