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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레오] 1

2017. 9. 1. 02:24

바실리는 때로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곤 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빗발치는 총알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이미 누군가의 몸을 관통하고 포탄은 땅에 커다란 구덩이만을 남겼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어 아예 참전하지 않거나 혹은 내가 죽기 전에 적을 모조리 죽여야만 했다. 둘 중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저 소중한 물건인마냥 총을 품에 안고서 몸을 벌벌 떨기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보통 겁쟁이라고 불리었고, 어딘가에 숨어서 용감히 전쟁터로 나서지 않는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적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싸운 이들이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영웅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니까 겁쟁이는 운 좋게도 전쟁 영웅 옆에 숨어 떨다가 얼떨결에 살아남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실리는 겁쟁이로 살아남은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가 전쟁터에서 아무것도 못한 건 결국 두려워서였고, 살아남기만 한다면 과정이야 어쨌든 누군가가 조롱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요행으로 살아남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억지로라도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게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질문을 자꾸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그를 살린 영웅 때문이었다. 두 다리로 단단하게 땅을 딛고서 거대하리만치 우뚝 서 있던 전쟁 영웅은 항상 속을 뒤틀리게 할 정도로 바실리를 고통스럽게 했다. 어쩔 때는 그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메스꺼워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다 게워낸 적도 있었다. 식도를 죄다 태울 것 같은 위액까지 뱉어내는 날이면 바실리는 너무 화가 나서 손을 벌벌 떨었다. 어째서 한 인간의 존재가 그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하는 걸까.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반짝거리는 황금별을 제 구둣발로 마구 짓밟고 싶었다.

 

그래서 바실리는 틈만 나면 증오를 가능한 한 꽉꽉 눌러담은 시선을 레오에게서 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눈빛을 눈치채고서 불쾌해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정작 당사자는 등 뒤로 진득하게 달라붙은 시선을 단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다. 바실리의 속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또 한 번 달구어지는 지점이었다.

 

승리의 날로부터 2주 뒤 토요일에 시간 있나?”

 

낮고 거친 음성에 바실리는 습관적으로 잘 벼린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낡은 책상 위에 펼친 서류철 속의 사진에서 레오는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손바닥만큼 큰 흑백사진에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만나 은밀히 대화하는 것을 몰래 찍은 사진. 바실리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사진을 힐끔 보고는 반쯤 고개를 숙인 레오의 반듯한 이마로 시선을 옮겼다. 포마드를 발라 죄다 넘긴 머리카락은 단 한 올도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법이 없었다. 웃기는 일이지. 바실리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아마도요.”

그래? 잘 됐군.”

 

레오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실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짜를 계산했다. 승리의 날은 오늘로부터 약 2주가 남았으니, 레오가 말한 토요일까지는 약 한 달이나 남았다. 한 달 후의 일을 지금 어떻게 단정짓겠냐마는 딱히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도 할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하필 그날로 콕 집어서 일정이 있느냐 묻는 건지. 바실리는 괜히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레오의 까만 머리통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제길. 바실리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묘한 긴장감에 말이 조금씩 딱딱하게 끊기며 흘러나왔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레오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바실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몇 초간 바실리의 굳은 얼굴을 보다가 이내 피식 웃더니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맛을 몇 번 다셨다. 바실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노란끼가 스민 조명 아래에서도 레오의 창백한 뺨에 아주 미미하게 홍조가 든 것처럼 보였다. 그에 왠지 속이 메슥거리는 것만 같아서 바실리는 턱근육에 더 힘을 주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오는 처음 보는 부드럽게 풀린 눈으로 바실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사와 결혼하기로 했어.”

 

바실리는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것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의 뒤통수를 레오가 세게 후려갈기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혼이란 단어가 레오 데미도프라는 전쟁 영웅의 입에서 이리 쉽게 나올 수 있는 단어였던가. 바실리의 동그랗게 뜬 눈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이리저리 헤매며 레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레오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의 궤도를 찾아가리라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바쁜 MGB 생활 중에도 레오는 그동안 몇 번씩이나 잘도 여자를 만나곤 했다. 하나같이 레오와 잘 어울릴 만큼 예쁘고 훌륭한 여성들이었다. 그래도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는 여태껏 없었는데, 라이사라니, 그녀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결혼 날짜까지 잡았단 말인가. 바실리의 뱃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거렸다. 아마 지금 입을 열면 마그마가 쏟아져 나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실리가 한때 겁이 많았던 적은 있어도 멍청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영리한 축에 속했다. 그는 레오에게 자신이 딱히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침착함을 가장하여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혀끝으로 침을 모아 삼켰다. 그걸로는 내장을 쥐어짜는 용암을 완전히 달래기엔 역부족이겠지만 그 자리에서 토악질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레오는 아직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에게 바실리도 마주 웃으며 축하의 말 한 마디 정도는 거들어야 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자세한 건.”

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레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서 말을 끊은 바실리를 보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는 바실리의 안색이 꽤나 창백했다. 원래도 그리 혈색이 좋은 건 아니었는데. 속으로 걱정하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본 레오는 생각보다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실리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인사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쉬어.”

 

레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바실리는 재빨리 집무실을 벗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화장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바실리는 아무 칸에나 들어가 변기통에 머리를 처박고서 한참을 웩웩대며 헛구역질만 해댔다. 저녁을 거른 탓에 나오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대신에 커다란 몸을 옹송그리고 토하는 시늉만 하는 그의 눈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잔뜩 맺혔다. 눈물은 그가 간혹 역류하여 올라온 시큼한 위액을 퉤퉤 뱉어낼 때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다보면 입가로 흘러내린 위액과 눈물이 섞여서 종래에는 얼굴이 엉망진창이 됐다.

 

잠시 구역질이 멈추었을 때 바실리는 제복 소매로 얼굴을 마구 벅벅 문질렀다. 기분이 한 마디로 아주 개좆같았다. 이제 배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가슴까지 번져서 타는 고통이 느껴지는데도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리 토해내려고 해도 토해지질 않았다. 목젖에 닿도록 손가락을 쑤셔 넣어도 말간 위액이 고작이었다. 바실리는 바닥에 대충 널브러지듯 주저앉아서 칸막이에 머리를 기대고 허여멀건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빌어먹게도 방금 전에 보았던 레오의 웃는 얼굴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씨발. 레오 데미도프. 레오, 레오, 레오.

 

빌어먹을 새끼.”

 

바실리는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저주와 욕을 레오에게 다 퍼붓고 싶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겨우 그게 다였다. 그것도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듯이 내뱉은 것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그는 한 손으로 두 눈 위를 덮었다.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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