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선택

2015. 5. 17. 23:09
‘임무에 들어간 이상 대부분의 권한은 그 현장의 한복판에 서있는 자가 맡는다.’

세계의 각종 정보기관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킹스맨은 요원이 활동할 때도 다른 점이 확실히 많았다. 특히, 임무에 관한 재량권이라면 킹스맨 개개의 요원이 여타 기관의 요원들보다 가장 많이 할당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이라고 했던가. 임무에 대한 대부분의 권한이 그 일을 맡은 자에게 넘어가는 순간부터 그의 어깨에는 많은 짐이 지워졌다. 임무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성공하는지 혹은 실패하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개개의 요원에게 함께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자율성보다도 더한 제약이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란슬롯이 임무를 위해 보급된 물품 중에서 특별히 특수 장치가 되어있는 안경을 피하는 것도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컨트롤 타워의 ‘조언’도 그에게는 제약이었던가. 퍼시벌은 왼손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란슬롯은 이상한데서 반항적인 기질이 있었다.

“Last contact was?”
[15 hours ago.]

안경에 내장된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멀린의 음성은 이질적인 기계음과 섞여있었다. 벨로루시로 떠났던 란슬롯은 이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 퍼시벌은 그 기질에 마지막으로 혀를 내둘렀던 적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했으나 괜한 시간낭비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잡생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퍼시벌은 멀린이 전송해주는 란슬롯의 마지막 위치 정보를 토대로 다시 연산을 하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만 얻었다.

[Glass notification: Incoming call...]
“Merlin.”

퍼시벌의 안경이 작게 삑 하는 소리를 내며 띄운 글자에 퍼시벌은 사고하던 것을 멈추었다. 이 시각에 다른 누구도 아닌 퍼시벌에게 연락을 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는 멀린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통신을 받았다. 곧 로망스언어 사용자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I assume you already know we have your fellow spies.]
“What do you want?”
[They tried to escape and killed one of my people, so I’m going to execute one of the spies. The choice is on your hands. You have to choose which one.]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퍼시벌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행동을 멈추었고, 내용을 들었을 멀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란슬롯과 함께 붙잡힌 이는 현지에서 백업을 담당하는 요원들 중에서도 뛰어난 요원이었다. 이름이 코스텔 세르반이었던가. 사고마저 정지한 것 같았던 퍼시벌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정보들이 스쳐지나갔다.

[You won’t.]

멀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동료의 생살여탈권을 이 손에 쥔다고? 퍼시벌은 양 손을 펼치고 내려다보았다. 이 같은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본 적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실제상황에 놓여본 사람은 아마 현재 킹스맨 요원 중에 퍼시벌이 유일할지도 몰랐다.

[I gave you enough time to decide. You only have to say one name.]
[You don’t have to say anything, Percival.]

전화의 발신자와 멀린의 목소리가 섞였다. 퍼시벌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살리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퍼시벌에게 생살여탈권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면 그는 주저 없이 한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언젠가 란슬롯은 컴퓨터의 회로가 하듯이 연산을 하고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퍼시벌의 특기라고 했었다. 퍼시벌에게 인간미가 없다는 것을 비꼬아서 한 말이었다. 그에 대해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었던가. 퍼시벌은 눈을 감았다. 그는 눈꺼풀 속의 깜깜한 어둠이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덮어주기를 바랐다.

퍼시벌은 낮은 웃음소리에 눈을 떴다. 중저음의 익숙한 목소리가 웃고 있었다.

“Darling.”

란슬롯은 퍼시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그는 현재 상황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퍼시벌에게 크게 유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퍼시벌이 생살여탈권을 쥐고 주저하는 모습에서 동정심을 느꼈다. 란슬롯에게 삶과 죽음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Darling, we can’t run away from death. The choices we’ll make are just right on the way to death.”

퍼시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란슬롯은 제 머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는 총구를 보았다. 그와 등을 맞대고 앉은 요원, 코스텔 세르반의 머리에도 또 다른 총구가 겨누어져 있을 터였다. 코스텔은 요원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란슬롯은 이번 임무를 통해서 코스텔을 알게 되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코스텔은 신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아마 눈을 감고 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신이 자네를 살려줄까? 아니면….

란슬롯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총구는 언제라도 그의 머리통을 날릴 불을 뿜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You think you can control everything and you can win in the end, don’t you?]

퍼시벌은 충동적으로 란슬롯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But you will never win. You will never ever win this game.]

퍼시벌은 보이지 않아도 란슬롯의 날선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푸르게 잘 벼려진 날과 같은 눈빛이 선연하게 보였다. 그는 그 눈빛이 저 먼 벨로루시에서부터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안경 너머로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선택해선 안 된다고 하는 멀린의 말도,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을 란슬롯의 목소리도, 벨로루시의 어느 이름 모를 공간에서 퍼시벌에게 강제로 두 명분의 생살여탈권을 쥐어준 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폭풍전야처럼 긴장된 침묵이 모두를 뒤덮은 것 같았다. 그리고 퍼시벌은 끝까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이 침묵을 깨는 단발의 총성을 들어야만 했다. 총성의 메아리는 길게 울려 퍼졌다. 퍼시벌은 내면의 꿈틀거림을 내리누르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Next time you have only one choice.]

통신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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