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Timeline

2015. 5. 17. 23:10

또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가에 놓아두었던 화분의 식물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갈색으로 시들어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는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이 있는데. 투명한 유리창 하나만 넘으면 말라죽지 않을 수 있는 빗물이 있는데. 괜히 그 화분에 측은함이 들었다. 이런 식의 투사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퍼시벌은 옆에 놓아둔 잔을 들었다. 위스키의 색깔이 꼭 저 말라죽은 식물의 것과 닮아있었다. 그는 한 번에 그것을 모조리 들이마셨다.

근 20년이라는 시간동안 킹스맨의 기사들이 나폴레옹 브랜디의 색깔이 어떤지, 향은 어떤지, 또 맛은 어떤지 알 수 있는 순간은 없었다. 무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오랜 시간동안 말이다. 퍼시벌은 10년째가 되면서부터 그 시간이라는 선분의 길이가 지나치게 늘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 길이는 너무 짧아서도 안 되고, 너무 길어서도 안 되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똑같은 길이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단지 그것이 계속해서 늘어지다가는 엿가락처럼 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었다.

실제로 그 선은 최근에 들어서 서서히 휘어지고 있었다. 지구에 붙어살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 변화를 선 위에 있는 자들이 알아채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퍼시벌은 그 선분을 구성하는 점 중에 하나였던 동시에 떨어져서 혼자 있는 점이기도 했다. 그의 위치는 조금 독특했던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선이 엿가락처럼 힘을 잃고 휘어지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알아챈다는 것은 약간의 메스꺼움을 동반했다.

어두운 공간에 빛이라곤 창문을 통과하여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뿐이었다. 말라죽은 화분의 기괴한 형체가 창가에서 까맣게 보였다. 퍼시벌은 지금도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었다. 선분의 하향곡선은 그 위에 있는 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아래로 떨어뜨리는 롤러코스터였다. 다시 상향하지 않는, 끝이 없이 아래로만 향하는 죽음의 롤러코스터.

이제 정상궤도에 오른 새 선분이 생겼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끊어진 선분의 마지막에 서서 투사마냥 투신으로 경고장을 날린 용감한 자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메스꺼움을 달래야 했다. 퍼시벌은 빈 잔에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조그만 물웅덩이를 보았다. 선분의 휘어짐을 제일 먼저 알아챘고, 유일하게 알아챘던 것은 그 투사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왜 이 선분은 관리를 요망하는가. 왜 이 선분은 곧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끝없는 접붙이를 필요로 하는가. 왜. 퍼시벌의 질문은 모두 ‘왜’로 시작됐다. 왜?

역사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선지자의 운명은 꽤 기구한 편이었다. 그러나 퍼시벌은 자신이 가진 선지자적인 측면과 기구한 운명을 이런데 끼워 맞추기는 싫었다. 그는 그런 것을 믿는 편도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에 따른 운명이란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만큼 모순적인 것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퍼시벌은 이 메스꺼움에 익숙해진 지 오래되었다. 위스키가 얼음 위로 또 한 번 쏟아졌다.

유리잔 옆에는 누런 서류철이 하나 놓여있었다. 퍼시벌은 잔을 집어 드는 대신에 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서류철은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오히려 안에 종이가 들어있지 않은 건 아닌가 싶게 얇았다. 새로운 점. 새로운 선분. 그 끝을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는가. 퍼시벌은 서류철을 열어보기를 망설이기라도 하듯이 누런 종이표지를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다시 그것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는 잔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밖에서 들어오던 빛이 더 어두워졌다. 선분에서 굴러 떨어진 점 하나에 바쳐진 나폴레옹 브랜디는 그다지 적합한 추모주라고 할 수 없었다. 퍼시벌은 그 브랜디에 어딘가 싸구려 같은 맛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냈다. 그건 정말이지 아서와 닮아있었다. 이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퍼시벌은 하향하던 시간선이 사실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는 위스키로 입을 축이고 다시 서류철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찾는 게 없었는지 빈손으로 일어서야만 했다.

장식용으로 전락해버린 벽난로는 검게 윤이 났다. 그 위에는 은색의 지포라이터가 있었다. 퍼시벌은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서류철의 모서리는 붉고 푸르고 또 노란불에 쉽게 스러져갔다. 그는 새까맣게 재로 변한 종이들이 흩날리기 전에 벽난로 속으로 반쯤 탄 것을 던져 넣었다.

벽난로에서 돌아서면서 퍼시벌은 생각했다. 차기 란슬롯은 이 추모의 연장선에 서있다. 저런 서류를 보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훌륭하게 승계하여 이 메스꺼운 롤러코스터 타기(roller coaster ride)를 끝낼 것이다.

종이가 타는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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