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으로 화창한 날이었다. 기후 변화로 해가 갈수록 더위가 빨리 찾아온다는 어느 나라와 비교하면 영국으로 오는 더위는 거북이처럼 걸음이 느렸다. 게다가 섬나라의 특성상 날씨의 변화도 많아서 한동안 바람이 쌩쌩 불고 가끔 비도 오는, 변덕이 심한 날씨가 계속되던 참이었다. 그러니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씨는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멀린은 어디선가 보았던 광고의 문구를 떠올렸다. 어느 티백 광고였던가. 그는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머그컵을 보았다. 미지근해진 밀크 티가 반쯤 흰 머그컵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그컵 너머에는 갖가지 영상이 수신되는 커다란 스크린과 각종 필요한 정보가 떠 있는 작은 모니터들 여러 개가 있었다. 광고의 문구와는 지구와 태양 사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로 날씨가 좋았다.

사방이 막힌 방 안에는 창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멀린은 익숙했던 풍경이 갑자기 답답하게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아서 끝까지 잠근 셔츠 단추를 풀까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검지를 셔츠 위쪽으로 넣어서 양쪽으로 조금 당기기만 하고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이 좋은 것과 일과의 상관관계는 적어도 그에게는 없었다.

[Receiving messages from Lancelot...]

그때 모니터들 중 하나에 초록색의 글씨로 알림문구가 떴다. 멀린은 메시지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갤러해드가 맡은 임무의 연장선으로 란슬롯을 카디프로 보냈었다. BBC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영화를 찍다가 우연히 얻게 된 영상을 받으러 갔을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일을 벌써 끝내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철없이 굴어서야, 원. 멀린은 잠시 알림문구를 노려보다가 결국 메시지 확인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는 뜻밖에도 임무를 순조롭게 끝냈다는 문장이 전부였다. 평소처럼 은근하게 치근덕대던 메시지를 보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 빗나간 것이었다. 멀린은 잠시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보고를 일일이 하는 성격도 아닌 사람이. 멀린은 메시지 창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껐다.

사실, 멀린이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의 아이들도 아니고 날씨에 따라 그가 변덕을 부린다거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변화무쌍한 영국의 날씨에는 이골이 난 영국인이었단 소리다―더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그저 요 며칠 잠도 제대로 잘 시간 없이 바빴기에 신경이 곤두서서 괜한데다 트집을 잡아서 분풀이를 하고 싶을 뿐이었던 것이다. 란슬롯의 꽤나 정상적인 메시지에 안심은 못할망정 짜증을 내는 것도 다 그래서였다. 그걸 깨닫고, 멀린은 “젠장”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Receiving messages from Lancelot...]

그때 모니터에는 또 알람이 떴다. 멀린은 자세를 바로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깊게 내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란슬롯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길가에 꽃들이 예쁘게 폈어요, 멀린.]

란슬롯이 보낸 메시지에는 사진이 하나 첨부되어있었다. 멀린은 이게 또 무슨 시답잖은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려고 애쓰면서 첨부된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에는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보도 옆에 잔디가 조성되어 있는 한적한 길을 따라 연보라색의 라일락꽃이 피어있었다. 잔디 위에도 곳곳에 노란 민들레꽃이 예쁘게 피어나있어 사진에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사진이었다.

“이런 걸 다 보내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멀린은 이번에도 답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란슬롯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그가 보낸 메시지는 멀린의 답답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주었다. 란슬롯은 정말 희한하게도 멀린이 혼자 끙끙댈 때를 아는 사람처럼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멀린이 일일이 내색하지 않았기에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전에도 이랬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그는 란슬롯에게 마음의 짐을 쌓아두었다.

모니터의 시계는 벌써 오후 2시가 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멀린은 란슬롯이 본부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자동차로는 최소 3시간은 걸릴 터였다. 멀린은 이제 식어빠진 밀크티가 든 잔을 쳐다보았다. 글쎄, 아무렴 어떤가. 그는 란슬롯의 표정과 말투로 생각했다.

그 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멀린은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날씨는 온종일 맑고 따뜻했지만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짜증을 내는 일도 없이, 그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식은 밀크티를 개수대에 부어버리고 새로 타오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작은 계기란 것이 이렇게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에 집중한 멀린은 외부에 반응하는 것이 느렸다. 한창 가웨인이 보내온 코드를 푸는 프로그램을 돌리던 그는 노크소리에도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게다가 누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니터에 고개를 박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들어밀어진 것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의자를 뒤로 뺐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뒤로 돌돌돌 굴러갔다.

“하하, 뭘 그렇게 놀라요?”
“란슬롯.”

란슬롯의 즐거운 표정에 멀린은 한숨을 쉬었다. 모니터에는 그가 디코딩하는데 쓰던 프로그램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란슬롯은 멀린의 눈길을 따라서 모니터를 슬쩍 보더니 아예 그 앞으로 막고 섰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한 손에 올려놓고 있던 것을 멀린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내민 것은 조그만 이름 모를 흰 꽃과 푸른 줄기로 만들어진 반지였다. 멀린은 그걸 몇 초간 바라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란슬롯의 눈을 마주 보았다.

“소꿉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갑자기 웬 꽃반지를 내밀어?”
“소꿉놀이하자고 하면, 부인 역할이라도 해주시려고요? 선물이니까 그냥 받아주시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들 장난은 정도껏 해.”

란슬롯은 짐짓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봐. 이러니 제가 사진을 보낸 거예요. 삭막하게 사는 멀린에게 제가 굳이 화사한 꽃 사진을 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거 만드느라 손에 풀물이 들었어요. 부모와 놀러 나왔던 여자아이가 일일 꽃반지 만들기 교사를 자청하고 나섰는데 그 결과물을 이렇게 매정하게 뿌리치시면 섭섭합니다.”

멀린은 어딘지 연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란슬롯의 말을 믿지 못함과 동시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란슬롯은 여전히 그의 앞에 서서 하얀 꽃으로 만든 반지를 내밀고 서서 비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멀린은 란슬롯에 반쯤 가려진 밀크티가 담긴 컵을 보았다가 꽃반지를 보았다가 란슬롯의 얼굴을 보았다. 한숨이 또다시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그가 힘을 내서 좀 전까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란슬롯, 방해하고 있는 것도 란슬롯이었다.

잠시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펼치던 두 사람 중에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멀린이었다. 항상 아쉬울 게 있는 사람이 지는 법이었다. 멀린은 고개를 까닥였고 란슬롯은 미소를 지었다. 명백한 승리의 미소에 멀린은 고개를 내저으려다 말고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란슬롯은 눈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더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멀린이 내민 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에 그 깜찍한 꽃반지를 끼워주었다. 그의 손톱 끝에 풀물이 든 것이 멀린의 눈에 보였다.

“멀린은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역시 잘 어울리네요.”

란슬롯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멀린은 제 손에 끼워진 꽃반지를 보았다. 손가락 위에 올리어진 흰색의 꽃이 앙증맞았다. 아마도 아까 보내온 사진 속의 길가에서 꺾어 만들었으리라 짐작되었다. 푸른 줄기로 만들어진 반지부분은 그의 새끼손가락 굵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사이즈를 알고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꼭 맞았다. 멀린은 란슬롯의 웃는 얼굴을 최대한 무심하게 보았다.

“하고 싶었던 거 끝났으면 나가 봐. 난 아직 일이 많으니.”
“고맙단 인사는 안 바라요. 꽃이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짬 내어서 꽃구경이라도 가시죠.”

란슬롯은 멀린의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했다. 멀린은 그런 란슬롯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비키라는 듯이 다리로 의자를 굴려서 앞으로 조금 다가섰다. 그러자 란슬롯은 비켜주려는 것처럼 움직이나 싶더니 허리를 숙여 멀린의 뺨을 키스를 남기는 것이었다.

“일 끝나면 연락해요.”

재빠르게 방을 나가는 란슬롯은 싱글벙글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본 뒷모습에서 멀린의 귀는 새빨개져있었다. 최대 이틀 안에는 연락이 올 것이다. 란슬롯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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