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녹음이 짙어 기분이 상쾌했다. 이런 날에는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손을 잡고 나와서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노는 평화로운 광경도 볼 수 있었다. 퍼시벌은 벤치에 앉았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퍼시벌이 기억하기로 과거에 란슬롯은 이런 풍경을 두고 지켜야 할 것들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종종 시간이 나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곤 했다. 그렇게 하면 그에게는 무언가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친 강박으로 보일 정도로, 그는 한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쉬지 못하고 거리로, 공원으로, 시장으로, 발길 닿는 대로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찾아가곤 했다. 퍼시벌은 밖으로 나가는 그를 한 번도 제지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란슬롯이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확실히 공원의 풍경은 깨뜨리기 아까울 정도였다. 퍼시벌은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지켜야 할 것들에 포함된다고? 퍼시벌은 깔깔 웃으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는 10대 후반의 소녀들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란슬롯의 흉내를 내며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킹스맨 조직에서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타 정보기관들과는 달리 어떤 국가나 단체에 귀속되지 않은 기관이었지만 결국 그 본질은 비슷했다.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퍼시벌은 거기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필요하다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아무리 악랄한 인간이라도 사랑하는 이가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고민은 갓 이 길로 들어선 자가 많이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경력이 쌓인 이들은 그저 무뎌진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하기보다는 본능적인 감각에 내맡길 뿐이었다. 도덕적인 문제가 경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퍼시벌은 란슬롯이 밖으로 나돌며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도 그가 바로 그 지점을 벗어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퍼시벌은 한 번도 란슬롯에게 그 점을 지적해주지 않았다. 란슬롯은 란슬롯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고, 퍼시벌은 굳이 그 부분을 터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란슬롯이 선을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한 번 선을 넘으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계속해서 이 일을 하려면 넘을 수밖에 없었다. 퍼시벌은 한때 거기에 환멸을 가졌지만 이제 그런 것도 모두 거쳐지나갔다. 란슬롯도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을 이 일에 몸담았다.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몰랐지만 그 말은 곧 내일 당장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가 살아있는 한 퍼시벌이 거쳤던 과정을 언젠가는 모두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새빌 로까지는 멀지 않았다. 퍼시벌은 한적한 길에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맞춤양장점들이 줄지어 선 이 거리를 한 블록만 벗어나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리젠트 가였다. 퍼시벌은 정말로 숨통이 탁 트였다.

퍼시벌이 킹스맨 양장점에 들어서자 수십 년을 여기에서 일한 재단사가 그를 반겨주었다. 그는 재단사의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이 많은 얼굴을 보고 새삼스레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재단사는 고개를 까닥이는 퍼시벌을 멈춰 세웠다.

“당신을 기다리는 신사가 한 분 계십니다. 만찬장으로 가보십시오.”

퍼시벌은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재단사는 할 말만을 하고는 다시 옷감을 고르는 일에 열중했다. 만찬장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에 별로 유쾌하지 못한 상황을 내포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여러 가지 확률을 따져보았다. 누가, 무슨 일로?

만찬장은 계단을 올라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공간이었다. 퍼시벌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서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거기 앉아있는 이는 갤러해드였다. 그는 빈 위스키 잔을 앞에 두고 퍼시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퍼시벌이 문을 닫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들의 본래 자리가 서로의 맞은편에 위치했다.

“세르비아와는 악연인 것 같군.”

퍼시벌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세르비아는 지금 란슬롯이 임무지로 가있는 곳이었다. 또한, 퍼시벌은 그곳에서 함정에 빠져 사나흘 간 고문을 받은 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갤러해드는 퍼시벌이 아닌 빈 유리잔을 보았다.

“다 잡았던 대어를 놓쳤어. 우리는 훌륭한 요원까지 잃을 뻔했고.”
“그는…?”
“숨은 붙어있네.”

퍼시벌은 갤러해드의 시선을 따라 유리잔을 보았다. 유리잔에는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퍼시벌은 그제야 그 잔이 왜 거기 놓여있는지 깨달았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오는 느낌에 그는 억지로 침을 삼켰다. 갤러해드는 잔을 뚫어져라 보는 퍼시벌을 보았다. 안경 너머에 있는 두 눈은 고요했지만 소리 없는 파동이 일어난 것 같았다.

“가웨인이 구해왔어. 납치된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니 그 성정에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

퍼시벌은 갤러해드를 쏘아보았다. 갤러해드는 그 눈빛이 자신을 향했기 보다는 다른 대상을 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고 느꼈다.

“악연의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아.”

갤러해드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퍼시벌은 둥근 모양의 유리잔을 보았다. 사실 란슬롯은 지켜야 할 목록에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었던 것이 아닐까. 미련하게도. 불의의 일로 개를 쏘는 마지막 테스트를 하지 않고 란슬롯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퍼시벌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들은 상관없었다. 그는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는 란슬롯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적어도 란슬롯은 약속을 지키긴 했다.

Promise me not to die when you’re away.

퍼시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보러 가야했다. 저 아래가 둥근 유리잔은 적어도 그를 위해 사용될 일은 없어야 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 킹스맨 전력 네 번째 <지키다> 참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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