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했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와 손목에 찬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사위에 적막이 깔려있었다. 때로는 그 조그만 소리들도 거슬리게 느껴질 만큼 조용한 공간에는 천장에서부터 아주 밝은 빛이 내리쪼였다. 일리야는 눈동자만 굴려서 하얗게 타오르는 전구를 힐끔 올려다보고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벽의 반절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검은 유리판이 단단하게 바닥에 고정된 책상 앞에 앉은 그를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유리판 속에 비치는 얼굴에서는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위로 전등 불빛의 잔상만이 파랗게 남아서 둥둥 떠다녔다.

 

허벅지 위에 늘어뜨리고 있던 양 손을 차가운 철제 책상 위로 올려놓을 때서야 일리야는 아래를 보았다. 마땅히 들릴 만 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새삼스럽게 의아해서였다. 그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명확했지만, 보통의 절차를 거치는 보통의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저들도 일단은 그에게 수갑과 같은 거치적거리는 것을 채우지 않았는데도 정작 본인이 착각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는 오른쪽 손목을 괜히 한 번 돌려보았다. 긴장하고 있나? 하지만 긴장할 근거는? 일리야는 다시 어깨를 펴고 앞을 보았다. 그를 잠시간 취조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놓은 것은 오히려 저쪽이 쓸데없이 긴장한 탓이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CIA는 다소 멍청하게 구는 집단이었다. 이미 서로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고 필요 이상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지금 저 얄팍한 유리 뒤에 숨어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들에게 일리야는 가능하다면 마음껏 조소를 해주고 싶었다. 그와 미국은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문고리가 달칵이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일리야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참고 있던 차였다. 그는 그 흔한 누런 서류철 같은 것도 없이 들어온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김이 팍 새는 것을 느끼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꼿꼿하게 앉아있던 온몸의 긴장이 다 풀리고 말았다.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그는 천장의 오른쪽 구석에 붙어있는 검은색의 조그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로써 숨어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CIA가 스스로 밝힌 셈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던 그 날,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있었으니 일리야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유리 너머에 있을 인물이 카메라를 통해 똑바로 보는 저를 보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으레 조국을 등지는 자들을 바라볼 때 자신이 그러했듯이 유리알 같은 눈동자와 포장된 무표정이 그를 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검은 유리를 다 깨부수고 경악한 표정들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을 상상했다.

 

쿠리야킨.”

 

일리야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대로 소리 없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가 앉은 이에게로 돌렸다. 어색하기 그지없게도 이름이 아닌 성으로 그를 부른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를 지쳐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일리야는 얼른 쏘아보던 눈빛을 갈무리했다. 한층 수그러든 기세에 남자는 습관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서류에 적힌 모든 것들은 우리의 기준을 충족하는 그 이상이.”

나폴레옹 솔로.”

그 이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자신의 말을 끊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마저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달고 지극히도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단조로운 말투와 당신이나 우리와 같은 단어들로 선을 긋는 것이 꼭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마리오네트와도 같아서 일리야는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CIA는 멍청하게 굴었고, 그 속에 어쩔 수 없이 속해있는 나폴레옹도 멍청하게 굴고 있었다. 멍청한 집단. 일리야는 갈색의 조각이 침범해있는 나폴레옹의 푸른 왼쪽 눈을 보았다. 지친 기색 뒤로 모든 감정을 숨기고 있는 눈동자가 꼭 그의 뒤에 있는 검은 유리 같았다. 도대체 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리에 비치는 나폴레옹의 멀끔한 뒷모습 위로 에이드리언의 얼굴과 올렉의 얼굴이 한데 겹쳐졌다.

 

그렇다면 문제가 될 게 뭐가 있단 말이지? 이건 절차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아닌 유리 너머의 인간들을 향해 질문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유리관에 든 쥐이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무심하게 쥐를 관찰하는 실험관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에 관해서라면 다시 한 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만, 아무래도 의문점 하나가 있어서 말이지요.”

의문점?”

당신은 소련에서 가장 능력 있는 KGB요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징후 없이 갑자기 이쪽으로 전향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서류상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듣는 쪽이 더 낫지요.”

 

일리야는 코웃음을 쳤다. 결국은 아직도 CIA, 미국은 그를 믿지 않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속해서 편을 갈라놓는 단어를 쓰던 것도 그래서였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나폴레옹을 보내 그의 입을 빌리는 방식마저도 지극히 저들다워서 일리야는 절로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간사한 자들이 아닌가. 진흙탕에 있는 것은 저도 매한가지인데 어떻게든 제 손은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꼴이라니. 끝까지 전 공산주의자 하나를 놀려먹으려는 심보가 정말로 고약했다. 유리벽을 방패막이 삼아서 숨어있는 이들의 얼굴을 보고 직접 비웃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마리오네트 역할을 자처한 나폴레옹이 지친 표정이나마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 그나마 감사할 지경이었으니 일리야는 한숨 쉬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폴레옹의 짙푸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책상 쪽으로 몸을 조금 당겨서 앉았다. 그러자 책상 밑에서 무릎 네 개가 서로 스쳤고, 나폴레옹이 한쪽 눈썹 끝을 살짝 꿈틀거렸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곳을 떠나는 것뿐이지.”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일리야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다 끝난 후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진득하게 얽혀있었다. 일리야는 이제는 자신들의 구두코도 맞닿아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빨리 입을 열기를 바랐다. 어차피 이것은 마지막으로 일리야 쿠리야킨을 조금 갖고 놀아보려는 CIA의 심술이 만들어낸 작은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까부터 깜빡임을 잊은 것처럼 뜨고 있던 눈을 거의 동시에 감았다가 떴다.

 

축하합니다. 일리야 쿠리야킨, 당신은 이제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국법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리야는 미소를 지었다. 나고 자란 곳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는 가진 것이 있는 땅으로 결국 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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