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긴 하지만 너무 튀지는 않고, 신사적이지만 고루하지는 않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을 갖고, 필요이상으로 얕지도 깊지도 않은 지식을 겸비하여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서 치고 빠져나와 상대가 다시 먼저 다가오게 만드는 사람.’

 

나폴레옹은 이번 임무에서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금세 머릿속에 그려냈다. 늘 그런 인물을 연기해왔으니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종류의 인물을 연기해보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CIA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그를 재능이 아깝다는 이유로 억지로 저들의 세계에 끌어다놓고는 적당히 써먹는데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나폴레옹도 자신이 가끔 특식을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쳇바퀴나 돌리는 조그만 햄스터 취급을 받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고생으로 훗날에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는 그것도 그런대로 할 만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그가 정말로 알파인지 베타인지 오메가인지조차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CIA도 손에 쥔 목줄의 끝에 서슬이 퍼렇게 잘 벼린 눈빛을 한 것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 줄을 끊고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CIA에 몸담고는 있지만, 나폴레옹이 속으로 그들을 얼마나 비웃고 있는지는 그들도 잘 알았다.

 

다소 심드렁한 표정을 한 나폴레옹에게 샌더스는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그는 직접 나폴레옹을 CIA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절대로 그를 믿어주는 법이 없었다. 신뢰가 아닌 필요에 의한 관계라는 것이 다 그러했다. 필요하니 써먹다가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것. 그 사이에 감정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잠시 얼마나 더 CIA에 봉사 아닌 봉사를 해야 하는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보고는 도출된 숫자들 옆에 이번 임무에 자신이 연기할 인물의 형상을 다시 한 번 세워보았다. 인물의 형상 옆에는 커다란 글씨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매력으로 목표인물의 마음을 앗아서 필요한 것을 빼오는 일이라고 정의된 이번 임무내용이 둥둥 떠다녔다. 그에 나폴레옹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 웃고 말았다. 확실히 CIA는 좀 멍청한 방법이긴 해도 그를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었다. 고미술품을 수집하여 팔아넘기는 일도 어떻게 보면 매력적인 가짜 인물을 연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이 출신성분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영국의 사교계에까지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런 능력 덕분이었다. 그것의 연장선에 스파이가 닿아있었던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

 

 

예상했던 대로 나폴레옹은 파티가 벌어지는 연회장에서 순식간에 목표인물의 눈길을 끌어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최근에 연인과 소원해져 외로워하고 있는 마음을 아주 적절히 어루만져준 매력적인 남자에게 넘어오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 슬쩍 흘린 연락처로 그녀가 연락하기까지는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으니 나폴레옹은 조금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순탄하게 일이 진행될 것은 또 뭐란 말인지. 절로 튀어나오는 한숨을 삼킨 그는 제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는 여자에게 그럴 듯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화답하고 그녀가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기 전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외로움을 핑계로 그를 유혹해보려는 속마음이 담긴 미약한 몸짓이 그녀의 온몸에 둘러져있는 사치스러운 것들에 비하면 천박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임무 때문이 아니었다면야 충분히 매력적인 그녀의 몸짓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서 가벼운 관계를 가질지도 몰랐다. 그는 딱히 형질을 가리는 편도 아니었기에 이 베타여성이 본인이 가진 향이 없어 비싼 향수를 코끝이 찡할 정도로 뿌렸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매끈한 까만색의 차는 곧 고급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로 들어섰다.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도 길가에 보이는 차들도 모두 돈 냄새라도 풍기는 것 같았다. 블록이 깔끔하게 잘 깔려있는 인도 옆에는 밤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는 가로등과 함께 초록색의 잔디밭도 길게 누워있었지만, 정작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 차를 타고 왔다가 차를 타고 나가는 이곳에서 잘 조성된 거리는 그저 드나드는 이들의 수준에 맞게 잘 꾸며진 외관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 보았다. 혹자는 이 거리를 보고 경멸어린 시선을 보낼지 몰라도 그는 한때 이런 풍경 속에 섞여드는 자신을 꿈꾸었고 실제로 그 꿈을 이루는데 거의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엔 성공한 척 행동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붙어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의 사락대는 최고급 실크로 만든 옷자락의 촉감 같은 것이 전혀 싫지 않았다. 웃기게도.

 

다 온 건가요? 여긴 오랜만이네. 미슐랭 스타를 2개밖에 못 받았던 곳으로 기억하는데요.”

 

차가 흰색으로 칠해진 건물 앞에 서자마자 여자는 창밖을 슬쩍 내다보고 말했다. 딱히 궁금한 투보다는 조금 실망한 쪽에 가까운 투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답을 해주는 대신에 얼른 차에서 내려서 차 둘레를 반 바퀴 돌아 여자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서 내리는 와중에도 내내 이 식당이 자기 성에 차지 않는 티를 역력히 내는 표정이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느린 것도 그녀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린 탓이었으니 나폴레옹은 아까 차 안에서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작년에 여기서 스펜서 공작일가가 식사를 한 다음에 식중독으로 앓아누웠던 사건이 있었죠. 그 후로 주방장이 해고되고 새로 온 주방장이 주방뿐만이 아니라 식당 전체를 다 갈아엎었다더니 한 달 만에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을 다 휘어잡았다더군요. 그리고 올해 미슐랭 스타를 하나 더 추가했다던 걸요.”

그런 일이 있었던 건 몰랐어요.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이라면 워낙. 아시잖아요? 저는 그쪽 소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요. 그래서 이 얘긴 처음 들었어요.”

 

한층 실망감이 누그러진 표정으로 여자가 손에 든 클러치를 조금 흔들면서 말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치형의 회랑을 흉내 내어 만든 건물의 외관을 보았다. 연속된 아치형으로 뚫려있는 벽 안쪽에는 네모난 창문으로 식당내부가 보였다. 그녀는 체면을 차리는 모양인지 곁눈질로 창문으로 보이는 식당내부를 훔쳐보면서 재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던 나폴레옹은 그녀의 허영심이 자신과 사교계 사이에 거리를 두는 화법으로 흘러나왔던 것을 깨닫고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정작 본인이 사교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에 본인만 고상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잠시 그가 발을 들였던 영국의 사교계에도 이런 인물들은 있었기 때문에 익숙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본능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른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흥미가 좀 생기나요?”

, 그런 셈이죠.”

 

여자는 조금 애교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식당 입구에 다다랐을 땐 나폴레옹에게 팔짱을 낀 오른팔을 조금 들썩이면서 예전에 이 식당에 왔을 때 먹었던 메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메뉴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가명으로 예약한 내용을 확인하고 식당 안쪽의 자리에 안내받을 때까지도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메뉴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녀가 머릿속을 뒤져보느라 조금 인상을 쓴 것을 본 나폴레옹은 어차피 그녀가 메뉴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웨이터를 따라가서 자리에 앉기까지 눈동자를 굴리며 식당 내부를 살펴보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은 식사 중에 나누는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귀를 기울이면 들릴 정도로는 컸고, 붉은 색 카펫이 깔린 바닥은 아이보리색의 벽과 대비를 이루었다. 벽에는 밖에서 보았던 세로로 긴 유리창들이 고동색의 두꺼운 원목으로 된 틀 안에 갇혀있었고, 천장에는 가운데에 매달린 커다란 크리스털 샹들리에 주위로 조그만 조명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흰색의 테이블보에 싸인 둥근 식탁들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일행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띄우고 놓여있어 약간의 사적인 대화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미슐랭 가이드의 심사원이었다면 이 식당 내부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만으로도 별점 3점 정도는 후하게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간단하게 감상평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의 테이블 위에는 미리 세팅된 식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폴레옹은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꽃병에 꽂힌 생화를 슬쩍 보고 작게 웃었다. 그가 오면서 보았던 다른 손님들의 식탁 위에는 이런 꽃병이 없었다. 일회적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관계가 타인의 어설픈 기대치를 만났을 때 생겨나는 부산물은 으레 엉뚱한 데서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나폴레옹은 혹시나 여자가 왜 그러느냐고 캐물을까봐 얼른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헛기침을 하고 메뉴판을 들었다. 미색의 용지에 인쇄된 것들은 음식의 이름과 가격이 다였다. 음료의 리스트가 적힌 페이지까지 한 번 훑어 본 나폴레옹은 최고급 송아지 스테이크에 어울릴 와인의 조합 따위를 생각했다. 그가 여자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는 즉석에서 대충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새로 온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뉴에 표기된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조합이 두 가지 정도는 나왔다. 이에 조금 즐거워진 그는 메뉴판을 보면서 간간이 여자가 하는 말을 대충 흘려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부른 웨이터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나폴레옹은 여자의 갈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면서도 손에 쥔 메뉴판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스테이크에 어울릴 와인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는 이런 것에 꽤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이것도 그의 미를 탐하는 기질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이런 일에 나폴레옹 솔로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최상의 것을 얻겠다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둥근 유리잔에 물을 따르는 큰 손의 주인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곧 웨이터가 어떤 음식을 주문하겠느냐고 물어오면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산 와인이냐 이탈리아산 와인이냐를 두고 고민하면서 나폴레옹은 임무 중의 일탈과도 같은 길티플레져를 느끼며 먼저 생선 요리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은근슬쩍 웨이터를 무시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저는.”

 

나폴레옹은 주문을 끝낸 여자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말하며 옆에 서있는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옅은 푸른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 금발머리를 깔끔하게 포마드를 발라 한쪽으로 넘긴 장신의 웨이터는 그를 향해 약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손님?”

 

웨이터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그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나폴레옹은 그를 빤히 보던 시선을 황급히 여자에게로 돌렸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둔 메뉴판으로 옮겼다가 다시 푸른 눈동자로 옮겼다. 저를 바라보는 의문에 싸인 두 개의 시선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 전채요리는 빌리와 같은 것으로 하지요. 미디엄으로 익힌 송아지 스테이크에 와인은 주방장이 추천하는 것으로 부탁합니다. 프랑스산이면 좋겠군요.”

 

고개를 까딱이고 물러가는 웨이터의 이름표에 적힌 이름은 I. 쿠리야킨이었다. 나폴레옹은 입 안에서 그 이름을 혀 위에 굴려보았다. 러시아계 성이 혀를 위에서 아래로 춤추게 만드는 것에 나폴레옹은 메뉴를 보며 고민을 했던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그와 마주앉아있는 여자를 만났던 사교 파티를 포함해서 최근에 그가 임무 수행 중에 보았던 모든 이들을 통틀어 쿠리야킨과 같은 사람을 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저 하룻밤을 함께 보낼 상대에게 적용되는 미적기준이란 느슨하기 짝이 없는 것에 불과했으나, 겨우 고급식당에서 웨이터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에게 적용되는 미적기준은 차원이 달랐다. 예술품을 보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차는 인물은 예상할 수 있듯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니 딱 보는 순간 운명처럼 그의 사고까지 멈추게 하는 인물은 그의 인생에 몇 명 없었는데 뜻밖에 이런 곳에서 그의 앞에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약간 떨면서 유리잔을 들고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걸 보고 여자 아니, 빌리가 그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하면서 괜찮으냐고 묻는 말에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대충 끄덕여주었다. 임무와는 별개로 이제 그녀가 완전히 나폴레옹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폴레옹은 이제 임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CIA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계속 빌리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유도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그는 그녀가 여전히 그의 관심사라는 것을 그녀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했다. 이미 흥미가 떨어진 일을 계속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어쨌든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스파이였다. 이번 일을 망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가 완전히 CIA와 에이드리언의 사람이 아닌 한은 임무를 제대로 끝내야 뒤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쿠리야킨이 와인을 따르거나 음식을 내오느라 가까이 올 때마다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제 알파 형질을 개방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이 쿠리야킨이고 직업이 이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터라는 것밖에 없는데도 당장 본딩을 맺지 않으면 죽기라도 할 것 마냥 그는 조금 안달이 났다. 매끄럽고 반듯한 얼굴과 긴 목 아래로 유니폼 속에서 시원시원하게 뻗은 몸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다. 그가 어떤 형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만약에 오메가라면 얼마나 매력적인 향을 뿜어낼지 궁금했다. 그가 향이 없는 베타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흠이 되지 못할 것이고, 이는 나폴레옹과 같은 알파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예술품은 어차피 그 자체로서 완벽한 것이 아니던가.

 

해서 아버지가 그 배를 팔아넘겼지 뭐에요. 조만간 친구를 불러서 함께 그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보고 싶었는데.”

그거 참 안타깝네요.”

 

나폴레옹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그는 마침 빌리의 와인잔에 화이트 와인을 따라주던 쿠리야킨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쿠리야킨이 가버리자 그는 포크로 육즙이 나오는 송아지 스테이크 조각을 꾹꾹 찌르면서 렘브란트의 유화를 무명화가가 그린 값싼 그림인줄로만 알면서도 절대 팔지 않겠다고 버티던 독일의 한 평범한 회사원을 떠올렸다. 그 남자는 그 그림이 별로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그림의 진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쿠리야킨이라는 남자에게도 그 회사원과 같은 주인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내 상류층 인사들이 자신을 깔보는 시선을 견디며 일하는 그가 렘브란트의 유화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을 나폴레옹은 알았다. 어차피 갖고 싶은 예술품이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 일은 없었다. 결국은 렘브란트의 유화도 그의 손에 들어왔었다. 물론 그때처럼 쿠리야킨을 몰래 훔쳐올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폴레옹은 빌리가 몇 점 남지 않은 대구요리를 얼른 다 먹기만을 바랐다.

 

아무튼 아버지가 그 남자와 가까이 지내시는 것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덜컥 그 양반 아들에게서 혼처라도 받아오신다면 집을 나가고 말 거니까.”

설마요.”

, 당신이 우리 아버지를 몰라서 그래요. 전에도 웬 어중이떠중이들이랑 친하게 지내시더니 덥석 혼처를 받아오셔서 어머니가 얼마나 기겁을 하셨는데요. 당사자인 전 어땠겠어요? 너무 놀랐는데 우울하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침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는 친구를 따라 프랑스에 갔다가 쟝을 만난 거였어요. 쟝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저런, 빌리.”

 

빌리는 한참을 혼자 떠들다 말고 현재 사이가 멀어진 연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입맛이 떨어진 모양으로 포크를 내려놓고 좀 전에 새로 채워진 화이트 와인이 든 잔을 들고 거의 절반가량을 한 번에 마셨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포크를 들고 하얀 생선살을 쿡쿡 찔러보더니 이내 다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그녀는 식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나폴레옹도 그녀를 따라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조금 남아있던 와인을 모두 마셨다. 심장이 쿵쾅대면서 피가 잘 안 통하는 것처럼 손이 차가워졌다. 그는 빌리가 디저트도 거절하고 그만 이 식당에서 나가자고 할까봐 덜컥 겁이 났다. 아직 그는 쿠리야킨에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상태였는데 벌써 이곳을 나갈 수는 없었다. 아까보다 더 조바심이 나는 것 같아서 그는 손을 허벅지 위에 얹고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비볐다.

 

빌리, 디저트를 주문할까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지도 몰라요.”

 

달려가는 마음이나 차가워진 손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다행히도 몹시 온화했다. 빌리는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대답을 망설였다. 그 오래지 않은 시간 동안 나폴레옹은 초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파티에서처럼 차라리 당신이 위로해주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나폴레옹은 하마터면 완전히 실망한 표정을 지을 뻔 했다. 그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무시하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포장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하룻밤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말에 흥분이 되기보다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이미 완벽하게 마음이 떠난 상대를 돌아봐주기에 나폴레옹은 여유가 없었다. 이 식당에 더 오래 머문다고 해도 그에게 쿠리야킨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뾰족한 방안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저 형질로나마 조금 떠보는 방법을 제외하면 식당의 손님과 웨이터는 정말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표면적인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었다. 그 관계를 깨려면 한쪽이 노골적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임무의 목표인물을 대동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쿠리야킨이 그런 행동을 할 리는 만무했다. 어쩌면 좋지? 나폴레옹은 꼭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진 것 같았다. 그가 혼자서도 이곳을 다시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는 있었지만, 훗날을 기약하기에 쿠리야킨은 움직일 염려가 없는 조각상이 아니었다. 무생물인 예술품과 살아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 계산서를 좀 가져다주겠어요?”

 

나폴레옹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이에 그걸 알 리가 없는 빌리는 멀리 있는 쿠리야킨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나폴레옹과 함께 보낼 오늘밤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비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는 계산대가 있는 쪽으로 가는 길쭉한 뒷모습을 보며 벌써부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 셈치고 정말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걸까. 나폴레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남은 것은 형질로 그를 조금 떠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사자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형질을 조금만 개방해서 반응하는 것을 보면 상대의 형질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하룻밤 잘 상대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펍에 갔을 때나 쓰는 질 낮은 방식이었지만, 지금의 나폴레옹에게는 썩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도 빌리는 베타이니 그가 형질을 아주 살짝 개방한다고 해도 그의 의도를 알아채기는 어려울 터였다.

 

마음을 정한 나폴레옹은 쿠리야킨이 계산서를 가져올 때까지 약간 긴장한 채로 앉아있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자신의 다리를 쿡쿡 건드리는 빌리의 발끝은 그의 신경을 전혀 거스르지 못했다. 그는 계산서를 작은 은반 위에 올려서 들고 온 쿠리야킨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는 순간에 맞춰서 얼른 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조금 스치고, 그 틈을 타 약하게 개방한 나폴레옹의 쌉싸래한 향이 쿠리야킨에게로 조금 묻어갔다. 쿠리야킨이 테이블 가까이에 온 순간 빌리의 발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찰나의 순간에 세 사람 주위를 두르고 흘렀다.

 

계산은.”

 

긴장하여 조금 막힌 목소리가 나폴레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까처럼 나폴레옹에게 꽂혔고, 나폴레옹은 쿠리야킨의 눈치를 살폈다. 향을 맡은 쿠리야킨이 표정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보이면 알파나 오메가가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빌리와 같은 베타임이 분명했다. 혹은 베타가 아님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확률의 싸움으로 넘어가는 머릿속 계산에 나폴레옹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쿠리야킨은 계산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 위로 내밀어진 지폐를 보고 다시 나폴레옹을 보았다.

 

이걸로 하지요. 남은 건 팁으로 가져요.”

감사합니다.”

 

쿠리야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반 위에 놓인 돈과 계산서를 다시 주워들었다. 타원형의 은반은 길쭉한 손가락과 넓적한 손바닥 안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작아보였다. 굳이 그것을 양 손을 포개어 쥔 쿠리야킨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나폴레옹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는 것으로 그제야 형질을 닫았다.

 

나폴레옹의 향을 뒤집어 쓴 쿠리야킨은 빌리와 같은 베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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