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이잉.

 

 

미세하게 그런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정밀한 기계가 스스로 태엽을 감는 것처럼 그렇게 위이잉. 저것이 정말로 그런 소리를 냈나? 나폴레옹은 동공을 최대치로 확장시켜 옅은 푸른색의 홍채가 얇은 고리형태로 쪼그라든 것을 뚫어져라 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 안을 크게 차지한 동공은 마치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동굴의 입구 같기도 했다.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한 번도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는 눈을 바라보던 나폴레옹은 제 눈이 말라서 아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대신해서 자신의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커튼이 반쯤 걷힌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하얀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빛은 사선으로 곧장 쏟아져들어와서 얇은 비닐 같은 옷을 입은 채로 우뚝 서 있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한 '그것'에 부딪쳐 흘러내렸다. 나폴레옹은 진짜 인간의 것처럼 보이는 금발이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것에 시선을 멈추었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예전의 어느 날에 그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신과 안드로이드의 관계를 설정해주십시오. 단어 하나를 말하면 관계가 설정이 됩니다."

 

지극히도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것'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기계처럼 말하는 것이 목소리는 인간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작게 입을 벌리며 숨을 조금 들이켰다. 원래 관계라는 것이 단어 하나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나? 그는 숨을 들이쉰 채로 멈춰서 다시 '그것'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과거 속에서만 살아있는 이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것'은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한쪽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는 기억 속의 흉터가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갑자기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게다가 눈을 여러 번 깜빡여 봐도 조금 전 보다 여간 뻑뻑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가가 점점 더 쓰려왔다. 그럼에도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아서 그는 결국 눈을 꾹 감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까매진 그의 시야에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가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얼굴은 더 흐려져만 갔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느낌에 나폴레옹은 숨을 얕게 쉬었다. 어느새 옹송그린 어깨도 앞으로 둥글게 기울어 있었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한 채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의 기억 속 인물과 현재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하나둘씩 떠오른 단어들도 이리저리 엉켜들었다. 관계? 저것이 관계를 요구했나? ''와 나는 어떤 관계였지? 저것과 나는 또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지? 생각들이 꼬이고 꼬여서 마치 털뭉치처럼 뭉쳐지는 와중에 질문들이 계속 솟아났다. 사고회로가 거의 마비될 것 같아서 나폴레옹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둥글게 말아쥔 손에서 금방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렸다.

 

"...연인."

 

거의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폴레옹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양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연인.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그래, 그랬지. 그랬었지. 그는 여러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관계가 연인으로 설정됩니다. 곧 리부트를 진행합니다. 리부트 후에는 입력하신 기초설정에 따라 행동합니다."

 

다시 '그것'의 입에서 안내사항이 흘러나왔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얼굴이 자꾸만 그를 놀리듯이 꾹 감은 눈앞에서 점멸했고, 누군가가 칼로 그의 가슴을 계속해서 쑤시는 것 같았다. 이런 류의 고통에 익숙지 않은 그는 이대로 금방 그 자리에 거꾸러져서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만 낮게 울리던 투박한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만 크고 작은 흉터가 새겨진 그 몸을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만 따뜻한 입술 위에 입 맞춰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내어줄 텐데. 나폴레옹은 작게 신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누가 그를 이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구원해줄 수 있단 말인가.

 

"...달링?"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폴레옹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수한 의아함만이 담긴 그 목소리는 심지어 생각마저도 멎게 했다. 구원자. 나폴레옹의 정지된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던 목소리였다. 그는 귀를 의심하며 눈을 떴다.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아래를 향한 그의 눈에 진회색 카펫을 밟고 선 맨발이 보였다. 그는 구원자라는 단어가 가진 스테레오타입에 그것만큼 걸맞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이 서린 기대감이 느리게 움직이는 나폴레옹의 몸을 감쌌다.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리야."

 

시커멓게 동공이 커져있던 눈이 아닌 맑은 하늘색 눈이 나폴레옹의 바다색 눈을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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