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세등등했던 젊은이들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실에 오매불망 그들을 기다리던 이들이 절망에 빠진 소리였다. 그 비통한 절규는 사방에서 패퇴한 이들을 안타깝게도 에워쌌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도 겨우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패배감이 발목을 잡고 늘어져서 그들은 하나같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바닥에 스치는 발소리는 슥슥 울렸다. 마치 며칠째 시커먼 구름을 한가득 끌어안은 하늘에서 기어이 비를 쏟아내는 것처럼.

 

비참한 행렬의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고 있는 술탄은 이 모든 것을 묵묵하게 듣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검은 갈기를 가진 갈색의 말도 뒤를 따르는 이들처럼 발굽을 질질 끌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면 온 나라에 퍼진 슬픔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괴로운 마음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백성을 잃고 땅을 잃은 군주에게 허용된 것은 이토록 지독한 고통뿐이었다. 그가 애꿎은 말에게 박차를 가해보았지만, 말은 우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말 못하는 짐승도 비통에 젖은 모양이었다. 꾹 감겼다가 뜨이는 술탄의 푸른 눈이 일렁였다. 저기 눈앞에 보이는 톱카프 궁전의 위용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통탄해마지않았다. 이미 쇠퇴해가는 제국이라고는 하나, 그는 제국의 쓸쓸한 마지막을 지키는 이가 자신만은 아니길 바랐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패전은 오스만 제국의 유구한 역사를 황혼의 뒤에 남겨두려는 전조에 불과한 듯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지옥의 것인 양 까맣게 보이는 궁전은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술탄은 느릿하게 열리는 거대한 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이 있기를 바랐다. 그 뱀이 독을 가득 품은 송곳 같은 이빨로 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든다면 그는 기꺼이 제 목을 내놓을 수 있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혈관을 타고 퍼질 독소가 주는 고통이 지금 그의 몸을 짓누르는 고통보다는 한결 나을 테다. 그는 몸을 약간 부르르 떨었다. 궁전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좌절감과 무력감이 한층 사납게 그를 사방에서 압박해왔다. 점점 그의 호흡이 가빠지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어딘가에서 러시아 놈들이 과장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술탄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도 말의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어깨만 옹송그려야 했다.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

 

잇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라는 산을 넘지 못했던 것처럼 오스만 제국의 나폴레옹 역시 그러했다. 이름이 가진 굴레가 정말로 있는 모양이었다. 빌어먹게도.

 

 

 

2

그 놈을 데려와.”

 

씩씩거리는 숨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게 홀을 울렸다.

 

3

창가를 등지고 선 나폴레옹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있어서 아무도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미동도 없었다. 넓은 홀에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 침묵이 시간마저 멈추게 할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왕좌에서 내려와 그 앞에 조각상처럼 우뚝 선 그는 고개를 살짝 쳐들고 눈만 살짝 아래를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닥에 한참을 구른 것처럼 더러운 군복을 입고 강제로 바닥에 무릎이 꿇려진, 남자라기에는 소년에 보다 가까운 이의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금발의 벽안을 한 소년은 누가 보아도 슬라브인의 전형적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양 손목을 등 뒤로 결박당하고 두 무릎을 카펫 위에 꿇고 있음최고급 카펫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다에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시선만 카펫을 향해 있는 소년은 저를 노려보는 나폴레옹의 눈빛에 담긴 위압감을 애써 무시하는 것 같았다.

 

너는 오늘부터 쿠리야킨 제독의 아들도 아니고 내 포로도 아니다.”

 

조금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내는 러시아어에 소년은 크게 몸을 움찔거리고는 앞에 서있는 술탄을 올려다보았다. 나폴레옹은 동그랗게 뜬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코웃음 쳤다. 소년이 말의 내용보다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을 너무 쉽게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몸만 나이에 비해 커 보였지 실상은 앳된 얼굴만큼이나 미숙한 어린애였다. 나폴레옹은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맞물리게 했다. 저 소년의 모든 것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다. 패퇴한 술탄의 제국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이 러시아 소년 하나가 전부였다. 수많은 병사가 잔혹한 싸움 끝에 죽음의 강을 건너고, 술탄은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많은 것을 빼앗기고 얻은 것이라고는 승전국이라고 자존심만 세우는 포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바꾸어 말하면 모든 분노를 오롯이 쏟아낼 수 있는 창구가 이 소년을 제외하고는 없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번개가 치는 것처럼 번뜩이는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그는 제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를 반드시 잡고 놓치지 않을 만큼은 약아빠진 사람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소년을 향해서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년의 눈동자도 점점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코앞까지 바짝 다가섰을 때 소년은 고개를 바짝 위로 쳐들고 있었다. 나폴레옹을 똑바로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저항심에 가득 물들어있었다. 어리석은 자 같으니. 제 처지를 모르고. 나폴레옹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년을 쏘아보며 한 손을 뻗어 노란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대번에 찌푸려지는 얼굴에 그는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바짝 붙였다. 러시아 소년의 몸에서 화약과 피가 섞인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콧잔등만 살짝 찡그리고는 소년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위로 더 당겼다. 그는 작게 끙끙대는 소리를 내는 소년의 몸이 위로 딸려오자 그의 오른쪽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너는 이제부터 사람도 아니게 될 거다.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에 소년의 몸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는 여전히 술탄에게 머리카락을 한 움큼이나 잡혀서는 미약하게 바르작댔다. 나폴레옹은 일부러 손아귀에 더 힘을 주어서 위로 바짝 당겼다. 그의 입술에 귀의 연한 살갗이 닿았다. 그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고는 구부렸던 허리를 똑바로 펴면서 머리채를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소년의 한쪽 뺨을 올려붙였다. 살과 살이 세게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소년은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뺨을 맞은 충격을 그대로 다 받아내야만 했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벌써 입 안이 터져서 비릿한 맛이 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부터 내 명령에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야.”

 

 

 

4

나폴레옹은 서기관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이 아직 홀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소년의 목을 움켜쥐고 그들이 있는 쪽을 보게 했다. 소년이 눈물방울을 매달고서 반쯤 눈을 감고 있다고는 해도 그 자리에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시 절망이 그에게 덮쳐올 것이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일부러 소년의 양 다리를 끌어올리고 허벅지 사이를 더 벌리게 했다. 붉은 피에 허여멀건 액체가 번들거리는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것이 더 잘 보이도록. 가장 효율적으로 육체와 정신을 망가뜨리는 그 행위를 남들에게도 보여줌으로써 그 효과가 더 극대화되도록.

 

고통스러운 비명이 턱턱 끊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나폴레옹은 웃었다.

 

 

 

5

저 아이는 어찌 할까요?”

 

서기관은 헐벗은 채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터번을 다시 쓰기 위해 거울만 보면서 소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기관과는 다르게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렘에 가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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