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그는 블라인드가 쳐진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커다란 유리 위로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과 본인의 눈에만 보이는 흐트러짐 따위가 반사되었다. 꼴이 이게 뭔지. 존스처럼 눈 밑이 까맣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터지는 한숨을 참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끌렀던 타이를 셔츠의 깃 사이에 똑바로 올려붙이고, 살짝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는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차라리 얼른 회의실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만나고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곧 그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에이드리언을 보고 나폴레옹은 조금 놀라서 눈썹을 움찔거렸다.


오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일단 들어오지.


에이드리언은 고갯짓을 하고는 회의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타원형의 탁자를 에둘러서 화이트보드가 있는 안쪽까지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갔다. 넓은 회의실에는 그들뿐이었다. 탁자 가운데에 세워진 프로젝터는 텅 빈 하얀 빛만 화이트보드 위로 쏘고 있었다.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앉는 에이드리언 앞에는 철이 되지 않은 서류가 몇 장 놓여 있었다. 까맣게 칠해진 부분이 없는 걸로 봐서는 단순한 보고서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의자를 빼서 앉지 않고 에이드리언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섰다. 에이드리언은 그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오늘은 통상적으로 하던 것도 집어치우고 본론만 얘기할 거야.

오래 걸리진 않겠네요.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폴레옹은 겉만 빙빙 도는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습관적으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에이드리언은 그다지 푹신하지도 않은 의자에 몸을 파묻는 것처럼 앉아서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은 어때 보였나?

평소와 딱히 다른 점은 없다고 해두죠. 티토의 공산국가 사정을 모르실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임무는 어땠고?


나폴레옹은 여전히 미소를 띤 입술과는 달리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이거 너무 살갑게 구시는데요.

.


에이드리언은 한 손을 턱 밑에 괴었다. 나폴레옹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평소와 같은 대화는 하지 않을 거라던 말과는 달리 방금 에이드리언이 한 질문들은 상당히 의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부러 말을 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저 서류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지. 나폴레옹은 탁자 위에 올려둔 서류를 힐끔 보았다. 아무리 짧은 보고서라고 해도 이렇게 탁자 위에 보이게 두었다는 것은 분명히 에이드리언이 말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존스가 홀로 바빠 보였던 것도 이와 분명히 관련이 있을 터였다. 나폴레옹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 서류를 봐도 좋을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만 대충 훑어보기로 했다. 에이드리언이 서류를 다 보이게 놔두었다고 해서 지금 당장 누군가가 그것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가만히 놔두겠다는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폴레옹이 선 자리에서는 서류의 본문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글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굵은 글씨로 쓰인 제목은 그의 위치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동구권 현지 상황에 대한 보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도 에이드리언이 책임을 맡아 진행 중인 영국과의 장기합작임무에 관한 보고서인 듯했다. 나폴레옹은 1961년에 있었던 일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 해에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던 조지 블레이크라는 자가 소련의 첩자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런데 영국이 이 일로 충격을 받기도 전에 소련은 보복으로 영국 정보부의 동구권 라인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40명의 목숨이 한 순간에 날아갔고, 그들이 흘린 피는 비단 영국에만 튄 것이 아니라 자유 진영의 최전선을 맡고 있는 영미연합 전체에 큰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충격에 휩싸인 것도 잠시, 영미연합은 이대로 동유럽을 포기할 수 없었다. 동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면서 러시아 본토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위성국가들이 반드시 소련에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앞서 헝가리에서 일어났던 혁명뿐만이 아니라 스탈린과 갈라선 티토의 유고 연방만 보아도 동유럽을 주시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영국과 미국이 잃었던 라인을 재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드리언은 이제 동유럽으로 나폴레옹을 보내기를 원하는 것일까? 나폴레옹은 어느 지역에 라인을 구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정보를 얻으려면 사람을 얻어야 했고, 사람을 얻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보원을 포섭하려면 그와의 관계를 두텁게 쌓아서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엄청났다. 나폴레옹처럼 필요한 만큼만 얄팍하게 관계를 쌓았다가 무너뜨리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엉클 일로 최근에 동유럽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해서 그쪽에 빠삭한 것도 아니었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유럽이 아닌 공산 진영으로 범위를 크게 넓혀도 바로 한 달 전에 중국이 5번째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일도 없었다. 나폴레옹은 말없이 앉아 있는 에이드리언을 보았다. 그는 에이드리언이 왜 뜸을 들이는지 슬슬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오래 걸릴 대화가 아니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앉을까요?


나폴레옹은 최대한 비꼬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했다. 그는 짐짓 자리에 앉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어 가까이 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서류 위의 어느 지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리부리한 눈을 몇 번 깜빡인 에이드리언은 앞에 놓인 보고서를 한 손에 집어 들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프리슈티나에서 아주 재미있는 소식이 들어왔어.


프리슈티나는 코소보에 속했고, 코소보는 유고 연방에 속한 곳이었다. 나폴레옹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 달 전에 트레프차 광산에서 극도의 공포에 질린 한 남자가 발견됐네. 그를 처음 발견했던 광부들이 그에게 다가갔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자꾸 도망을 치려고 했다더군. 미치광이처럼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던 그 남자는 결국 호흡곤란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가 누군지 몰랐어. 현지 경찰도 그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지. 그래서 그를 무연고자로 처리하고 대충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어.


에이드리언은 또 뜸을 들이면서 손에 쥔 보고서를 약간 흔들었다.


누구였죠?


나폴레옹은 어느새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있던 손을 떼고 에이드리언을 향해 똑바로 서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보고서를 길게 돌돌 말아서 끝을 탁자 위에 통통 치면서 나폴레옹을 보았다. 눈동자끼리 마주친 채로 침묵이 길어졌다.


소련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나폴레옹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관절 방금 들은 트레프차 광산에서 발견된 이상한 남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소련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건지 그는 정확하게 짚어낼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소련을 위해 일했거나 혹은 소련의 반대편에 선 자들을 위해 일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죽음을 맞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했다. 답을 쥐고 있는 것은 에이드리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행간에 너무 많은 것을 숨겼다. 그가 방금 한 질문을 통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불명확했다. 소련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냐는 질문에는 소련을 믿는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구도는 이미 지구를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근의 추세로 보아 두 국가가 이해관계가 맞으면 잠시나마 서로의 손을 잡을지도 몰랐다. 그 예로 당장 엉클을 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나폴레옹에게 질문했다. 나폴레옹은 미국을 대표할 수 없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단 한 번도 미국인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이제 불안하게 떠오를락 말락 하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에이드리언이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일리야는 내내 그와 함께 붙어 있었다. 죽은 남자가 소련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에 일리야가 직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나아가서 생각하는 걸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질문 하나에 흔들리는 스스로에 불쾌감을 느꼈다.


나폴레옹은 일단 혼란스러움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그는 이 불쾌한 침묵이 오래 머물수록 불리한 것은 스스로라는 것을 알았다. 에이드리언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든 간에 그에게 여지를 남기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눈을 한번 깜빡였다. 여전히 시선은 떼지 않은 채였다.


소련이 언제부터 믿을 수 있는 상대였습니까?

 






+맨프엉 온리전에 냈던 원고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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