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진 날씨에 게으름을 부리며 늦게 나온 해가 빛을 살며시 창문을 통해 뿌리자, 커튼이 걷혀 있는 창문의 모양대로 각진 노란 빛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창문 아래에는 벽에 딱 달라붙은 라디에이터가 뜨끈하게 열을 발산함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공기는 서늘했다. 으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인지라 나폴레옹은 이불에 푹 파묻힌 채로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핏발이 잔뜩 선 눈을 끔뻑이면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 그는 조금 괴로운 심정이었다. 간밤에 잠을 대단히 설쳤기 때문이다. 뻑뻑한 눈은 꾹 감아도 영 불편했다. 양손을 들고 눈을 마구 비벼보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눈꺼풀 아래에서도 눈알을 굴리기가 어려울 정도인지라 억지로 하품을 또 해보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괜히 옹송그린 몸만 반대로 돌려서 벽에 바싹 붙었다.


어제 에이드리언은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가 나폴레옹의 의문형을 띤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쥔 보고서의 끝을 계속 탁자에 치면서 한쪽 입가를 약간 비틀어 미소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표정을 한번 지었을 뿐이었다. 명백히 대화는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었다. 거기에 대고 나폴레옹은 더 이상 무어라고 덧붙일 수 없었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으니 곧 회의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그저 표정을 굳히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이상하게도 패배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문제가 승패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님에도 그랬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상대의 도발에 넘어간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그러니 그가 그토록 원했던 푹신한 침대에 누워도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던 셈이다. 레드 페릴의 말을 듣지 않은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피식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오는 허탈한 웃음을 구태여 참지 않았다.


프리슈티나, 죽은 남자, 에이드리언, 그리고 소련.


나폴레옹은 허연 벽지 위로 검지를 뻗어서 점을 네 번 찍었다. 이들을 모두 관통하는 접점은 아주 거대한 원 안에 있었다. 비슷한 것은 같은 것과는 또 다른 법이었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오히려 정확히 겹치는 부분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에이드리언은 나폴레옹에게 질문했다. 어찌 보면 일종의 경고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네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상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은 볼 수 있는 것을 손에 쥐고 호루라기를 불면 대개 무서워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무언가를 두려워하기에는 일반 사람들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을 감옥에서 데려와 CIA에 봉사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도대체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소련이 개입되기는 했나?

죽은 남자의 시체를 찾아온 이는 또 누구인가?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다소 멍한 머릿속이 금방 시끌벅적거렸다. 나폴레옹은 몸을 뒤척이다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러고는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얼굴도 모르는 죽은 남자를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 남자가 아주 중요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일리야처럼 KGB요원이었을지도 몰랐다.


결국 일리야 쿠리야킨이군.


나폴레옹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생각의 흐름은 언제부턴가 늘 일리야로 끝을 맺곤 했다. 불가항력적이었다.


그 후로 그는 며칠간 가벼운 불면증에 시달렸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몇 개 되지 않는 퍼즐조각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고, 그는 처량하게도 그것들을 제대로 맞춰 보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나 지나가 있곤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넓은 판에 비해 그가 가진 퍼즐의 개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에이드리언이 했던 이야기가 얼마나 큰 판을 가지고 있는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퍼즐 맞추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차지한 것을 밀어내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잠을 미루며 혼자 씨름하다가 아침이 되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고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물론 지켜지지 않는 다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번뇌 아닌 번뇌를 끝낼 전화가 생각보다 빨리 걸려온 것이었다.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나폴레옹은 멍하니 스튜에 넣을 당근을 느릿느릿하게 썰다가 전화벨 소리에 움찔하고 놀라서 하마터면 자신의 손가락을 썰어버릴 뻔했다. 그가 황급히 식칼을 던지듯이 도마 위에 내려놓고 보니 손가락에는 칼날에 눌린 자국만 길게 나있었다. 그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푹 나왔다. 이제는 당근을 썰다가도 에이드리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낮과 밤의 경계는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입에서 정신이 완전히 빠졌다며 자책하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그는 꾸역꾸역 삼켰다. 그러고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따르릉 소리를 내고 있는 전화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서 자잘한 꽃무늬가 들어간 앞치마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 나예요.


나폴레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놀랍게도 가비였다. 그녀는 나고 자란 동독을 떠나서 대영제국 여왕 폐하의 품으로 간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이 시간에 대서양 건너편까지 전화를 걸었다? 나폴레옹은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사적으로 통화하면서 만나는 사이가 절대로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대양 하나를 건너서 하는 통화라면, 나폴레옹은 일리야와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너무 급하면 이런 통화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거쳐서 평소보다 조금 높게 들리는 가비의 목소리에는 별로 다급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평온한 목소리로 나폴레옹을 가명으로 부르는 여유도 부렸다. 나폴레옹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가비가 괜히 이런 연락을 취할 리 없었다. 혹시나 그녀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라면, 이 회선이 보안된 것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중요한 말일수록 좀 더 구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안전한 법이었다. 적당히 손을 거친 정보는 오히려 새어나갈 위험이 적었다. 가비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나폴레옹은 눈꺼풀이 당기는 느낌이 날 정도로 미간의 주름을 더 깊게 잡았다.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그가 전화기 옆에 놓여있는 원목으로 된 탁상시계를 보았다. 망설이는 사이에 벌써 시간은 1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일단은 뭐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대충 아무 이름이나 떠올렸다.


나탈리,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 전 잘 지냈어요.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 무슨 일이죠? 전화를 다 하시고.

-오늘 뉴욕의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아서요. 공원에 나가볼 참인데 일행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혹시나 시간이 괜찮으신가 하고요.


나폴레옹은 흠칫 어깨를 크게 떨었다. 가비가 방금 한 말에 놀란 탓이었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뉴욕에 있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엉클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국을 무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엉클이 영국, 미국, 러시아의 합작이긴 해도 국제적인 조직을 표방했기에 형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지역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질적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언젠가 엉클이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두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라면 당장에 KGB에서 일하고 있는 일리야 스스로도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 곳이었다.


, 마침 집에서 혼자 지루하던 참인데 잘 됐네요.

-좋아요. 오래 걸리나요?

아닙니다. 15분쯤.

-그럼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앞에서 봐요. 안녕.


가비는 나폴레옹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전화를 먼저 끊었다. 금방 일정한 음이 나폴레옹의 고막을 울렸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뒤쪽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이집트에서 온 거대한 바늘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긴 세월을 거치면서 군데군데 상형문자가 닳아서 보이지 않는 조형물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활동을 하게 된 엉클의 기념비가 되기 직전이었다. 나폴레옹은 가비가 전화를 끊기 직전에 웨이벌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엉클의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들려준 것이 분명했다. 접선지로 오벨리스크를 선택한 것도 웨이벌리일 것이다. 나이 든 영국의 스파이는 매사에 영악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다시 너저분한 주방으로 간 나폴레옹은 도마 위에 있던 썰다 만 당근을 잠시 보다가 그냥 두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의자에 대충 앞치마를 걸던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엉클의 일로 가비와 웨이벌리가 뉴욕으로 왔고 방금 나폴레옹이 호출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또 다른 엉클의 요원인 일리야도 미국에 왔을 것이라는 소리가 된다. 소련인인 데다가 KGB요원인 그가 어떻게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얼마 전에 베오그라드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나폴레옹은 조금씩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려고 하지 않았다.







+맨프온에 냈던 원고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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