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간 나폴레옹 솔로는 자신이 썩 좋지 못한 일들을 연속으로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한 테러단체의 별로 대단치도 않은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 좁은 자동차 안에서 며칠 밤을 꼴딱 새는가 하면 날쌘 도망자를 추격하던 중에 꼴사납게도 넘어져서 팔과 다리에 타박상을 입기도 했다. 나중에 그의 몸에 생긴 멍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일리야에게 그는 순전히 피곤한 탓이었다고 말하려다 말고 벌린 입술 사이로 한숨만 폭 내쉬었다. 스스로를 약간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작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에 쉽게 지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정도 더 베오그라드에 머무르며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일리야의 권유도 굳이 거절했다. 가능하다면 일리야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으면서도 그는 돌아섰다. 모든 것을 피로의 장벽 너머에 가두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오랜 비행시간을 고행하는 수도승의 마음으로 겸허하게 보낸 그는 비행기의 유리창을 통해 뉴욕의 전경을 보자마자 얼른 안락한 자신의 집으로 가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뉴욕의 상업지구와 주거지역이 맞물리는 구역에 있는 일반 아파트로, CIA에 소속된 안전가옥이 아니었다. 15년간 목줄을 매게 된 신세인데 집에서마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그가 에이드리언을 설득해서 따로 집을 구한 것이었다. 이번 아파트는 그의 신분 때문에 벌써 서너 번의 이사를 거치고 자리 잡은 지 채 3년이 안 된 곳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아주 깔끔한 성격을 지녔는지 조금 낡아 보이는 아파트 외관에 비해 그의 집 내부 인테리어는 손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이 집을 좋아했다.


노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반겨주는 서늘한 11월의 날씨에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로 나폴레옹은 재빨리 보도를 가로질러 아파트 입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내내 코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열쇠는 미지근했다. 그것을 꺼내 까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등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움츠렸던 어깨를 똑바로 폈다. 로비 안에 들어찬 공기는 다행히도 바깥공기보다 덜 추웠다. 여전히 입김이 조금 나올 정도로 서늘했지만, 로비에 선 나폴레옹은 별로 춥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따위가 웅웅 로비를 울리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근원이 다른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낮게 공간을 울리는 것이 꼭 여기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로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로. 그는 일종의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시선을 옮겼다. 경건한 눈길이 닿는 곳마다 세례를 베푸는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문뜩 오른쪽 벽에 걸린 우편함에서 멈추었다. 그제야 나폴레옹은 긴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을 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군.


그는 수트케이스의 손잡이를 고쳐 쥐면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그는 종종 쓸데없이 감상적인 면을 보이곤 했고, 이는 또다시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피로의 악순환이었다.


그는 손에 든 수트케이스를 약간 흔들면서 우편함에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긴 우편함은 아래에 붙은 아파트의 호수에 맞춰서 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201호의 우편함에서만 편지 하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이 아파트의 201호에는 나폴레옹이 살고 있었다. 그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서 편지를 집어 들어 겉을 살펴보았다. 조금 꺼끌한 재질의 흰 종이 위에는 소인도 없었고 보낸 이가 누구인지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른쪽 하단에 나폴레옹 솔로라는 이름이 타자기로 친 것처럼 삐침이 있는 글자로 가지런히 열을 맞춰 적혀있었다. 나폴레옹은 마음이 순식간에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봉투 속에는 보나마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가 일부러 손에 힘을 주니 종이가 속절없이 구겨졌다.


고약한 양반.


소리를 내면서 구겨진 종이처럼 그도 이마에 깊게 주름을 새겼다. 당연하게도 그는 이곳에서 본명을 쓰지 않았다. 이름과 얼굴만 겨우 알고 있는 그의 이웃들은 그를 존 스튜어트라고 불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이름을 조합한 것이었다. 에이드리언도 그 이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주 가볍게 무시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제 손으로 나폴레옹을 CIA에서, 엉클에서 일하게 해놓고는 가끔 심통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굴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한숨을 쉬었다.


그 고약한 남자를 상대하는 규칙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빈 편지봉투가 도착한다. 나중에 돌아온 그가 그것을 확인하면 바로 랭글리까지 가서 발신인을 만난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러나 랭글리에서 그들이 하는 대화에 영양가가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텅텅 빈 편지봉투처럼 그들의 대화에는 알맹이가 없었다. 나폴레옹이 보기에 에이드리언은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고집 센 남자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그가 끔찍이도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든 알아낼 방법이 있거나 포기한 것을 뜻했고, 에이드리언은 명백히 전자였다. 어쨌든 나폴레옹이 먼저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을 인물은 못 되었으니, 실상 서로 이득이라고는 될 것이 없는 탐색을 위해서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이제 쓸데없는 일에 기운을 빼게 생겼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수트케이스가 꽤나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어깨가 뻐근하고 퍼렇게 멍든 무릎이 시큰거리며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일리야의 말마따나 베오그라드에서 조금 더 미적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폴레옹이 서둘러서 미국으로 돌아올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괜한 짓을 한 뒤에 몰려오는 후회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까만 바탕 위에 공산국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개조된 호텔의 다소 허름한 방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방 한가운데에는 일리야가 멀뚱히 서서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저를 똑바로 보는 그의 눈빛에는 실망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나폴레옹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꼭 벌을 받는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


겨울이 부쩍 다가온 만큼 해는 짧았다. 나폴레옹이 찌뿌드드한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할 때쯤에는 시커먼 숲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건물의 출입구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유일하게 밝았다. 희끄무레한 건물에는 까맣게 코팅된 유리창들이 딱정벌레처럼 붙어서 희미하게 비치는 별빛과 달빛마저 흡수하는 것 같았다. 누가 정보기관이 아니랄까 봐 생색이라도 내는 것 같은 외양이었다. 나폴레옹은 약간 질린 얼굴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속을 꽁꽁 감춰두고 있는 인간들이 역시 속을 꽁꽁 감춰둔 건물 안에 득시글하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약간 속이 불편했다. 정작 본인도 속에 든 것을 잘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남들이 자신에게 그런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굳게 잠긴 금고를 열어 속에 있는 것을 쟁취하고야 말았던 그의 도둑 기질은 값진 미술품에나 작용하는 것이었다.


겹겹의 보안을 통과한 후에야 건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나폴레옹은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타이를 양쪽으로 슥슥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가 대양을 건너기 전부터 입고 있던 베르사체 정장에서는 처음 입었을 때 느껴지던 산뜻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어 찝찝함만이 남은 듯했다. 이런 상태로 흰 편지봉투의 발신인을 만나서 그와의 미묘한 신경전을 버텨야 하다니. 나폴레옹은 자조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며칠간 깔짝깔짝 이어지고 있는 불행은 그 꼬리를 여전히 그의 몸에 칭칭 감고 있었다.


솔로.

존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도착을 알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나폴레옹은 동료와 마주쳤다. 작년에 동베를린에서 개비를 빼내는 작전을 함께 수행했던 요원 존스였다. 두 사람은 각각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며 간단하게 인사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먼저 인사한 존스는 눈 밑이 까맣게 변해 있었고 타이도 없이 입고 있는 셔츠의 양 소매는 위로 돌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 꼴이 척 보기에도 며칠 밤을 꼬박 샌 사람의 몰골인지라 나폴레옹은 눈썹을 약간 치켜세웠다.


일이 바쁜가?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멍한 표정을 한 존스는 질문을 아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층 전체가 사무실로 쓰이는 공간에는 무언가가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밝은 전등 아래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도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는 아직 문이 닫히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다시 돌아보았다.


샌더스는…?


버튼을 누르려던 존스는 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리고 나폴레옹을 보았다.


회의실.


존스의 입에서 지친 답변이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버렸다. 나폴레옹은 뭐라고 대꾸하려고 살짝 벌렸던 입을 닫고 뒤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은 커다란 캐비닛 몇 개를 제외하고는 책상들로 가득했다. 일전에 에이드리언은 열을 맞춰 늘어선 책상들을 가리켜 도열한 군대라고 표현했다.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정보요원들은 전 세계를 양분한 차가운 전쟁의 최전방에서 사투를 벌이는 군인들이었고, 그들이 소속된 정보부는 후방을 지원하는 대대였다. 에이드리언의 비유는 오히려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강박적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책상들 사이의 통로를 지나가던 나폴레옹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속한 진영과 일리야가 속한 진영 사이의 거리감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나 보란 듯이 눈앞에 드러눕곤 했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서 손끝으로 책상의 표면을 쓸면서 지나갔다. 그의 앞에 책상군대가 끝없이 늘어섰다. 그들은 건물의 벽을 뚫고 랭글리를 벗어나서도 계속 늘어났다. 더 이상 어디가 끝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대로 가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라는 러시아 땅도 모두 덮을 수 있으려나? 나폴레옹은 피식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손끝에 걸리는 것이 이제는 없었다. 책상군대는 이미 암전되듯이 사라졌고, 그는 사방에 블라인드가 내려간 회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맨프온에 냈던 원고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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