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로 곧장 어질러진 부엌으로 가서 그새 말라버린 당근부터 버렸다. 도마와 칼을 비롯해서 꺼내 두었던 식기들도 모두 싱크대에 넣고 봉투에 싸인 채로 있던 다른 채소들은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벽에 붙은 찬장의 문을 모두 여닫으면서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두운 구석이나 발끝을 들어야 보이는 높은 찬장에는 손까지 뻗었다. 그렇게 그의 몸집에 비해 다소 작은 손이 닿고 나면 회색의 먼지들이 손가락마다 잔뜩 묻어 나왔다. 정체 모를 까만 장치가 손끝에 걸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마지막 찬장의 문을 닫으면서도 별로 기쁜 표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에는 부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에 뿌옇게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낸 그는 부엌에서 바로 이어진 거실과 침실, 화장실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서랍장 안, 옷장 위, 심지어 탁상시계의 배터리를 넣는 부분까지도 탐색의 대상이었다. 조그만 틈 하나도 그냥 허투루 넘길 것이 아니었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놓치는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거의 강박적으로 온 집안을 다 헤집었다. 어디든 도청 및 감청 장치가 있을 만한 곳은 죄다 뒤져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상 없음.


마침내 욕실의 거울 뒤 수납장을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음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자 안도감과 동시에 밀려드는 미묘한 허탈감에 그는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아예 뒤로 누워버렸다. 여전히 그가 입고 있던 옅은 갈색의 버버리 트렌치코트가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저 천장을 보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면서 그의 반듯한 이마에는 땀이 살짝 배어났다.


그가 집안을 다 헤집은 것은 으레 스파이라는 직업상 해야만 했던 절차 같은 것이 아니었다. 관련 수칙이 없다는 뜻은 아니나, 모든 스파이들이 잠깐 외출을 했다가 돌아올 때마다 도청 및 감청 장치가 있는지 찾아보지는 않는 법이었다. 특히나 나폴레옹은 천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만의 규칙을 세우고 거기에 따르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 규칙에 따라서 그는 보통 사흘에 한 번 정도 집 곳곳을 살펴보곤 했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외출하고 돌아오자마자 집 내부를 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집안 곳곳을 들쑤셨던 것은 순전히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에이드리언이 말했던 사건과 소련의 관련성이나 거기에서 이어지는 일리야에 관한 것들이 나폴레옹의 머릿속에서 다시 스멀스멀 기어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에이드리언과 일리야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스스로가 일리야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착잡한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고 무력하게 누워서 머리만 굴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가진 퍼즐 조각의 수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적었다. 여차하면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은 되었으니 무슨 일이 닥치든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모르고 시작한 일이란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구석에 세워놓았던 작은 수트케이스를 펼쳐놓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둘씩 넣기 시작했다. 정장 외에도 잠입할 때 입곤 하는 어두운 색의 움직이기 편한 옷이나 브라우닝 권총, 몇 가지 조그만 장비들─그는 애정을 담아 이것들을 장난감이라고 부르곤 했다─따위를 넣는 그의 손놀림은 거의 기계적이었다. 수트케이스 안은 금세 가득 찼다. 그가 일사불란하게 공간을 꽉 채운 것들을 손바닥으로 한번 살짝 누른 다음에 수트케이스를 닫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채 20분도 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그제야 코트를 벗고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뉴욕 시에서 보스턴까지는 기차로 5시간은 족히 가야 했고, 그는 온종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그러모아서 뭐든 먹어야만 했다.


∴∵∴

 

보스턴의 호텔에 머무는 사흘 동안 나폴레옹은 가비와 함께 방을 쓰면서 웬 사업제안서와 투자계획서 따위를 외우는 일이나 하고 있었다. 웨이벌리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제레미 펠레티에에게 내보일 위장 신분이 다름 아닌 냉장고와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 제조업체의 대표와 투자자이기 때문이었다. 제레미는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자신의 회사인 피닉스가 군수공업이 아닌 민간분야에서도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길 바라며 가전제품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미사일 유도 체계를 개발했다는 피닉스의 명성도 가전제품 시장에서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남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스스로도 수완이 좋다고 여기고 있던 제레미는 형편없는 실적에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는데, 그렇다고 그가 거기에서 포기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가전제품 시장에서 어느 정도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사업체를 인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적당한 목표물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웨이벌리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가비와 나폴레옹이 제레미에게 접근하기를 원했다.


나폴레옹은 이미 여러 번 보았던 서류를 탁자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약간 벌게진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보통 기업의 보고서들이 다 그렇듯이 하얀 종이에는 중간중간 삽입된 그래프를 제외하고는 온통 까만 글자들이 그득했다. 나폴레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난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서 줄곧 읽어댄 서류의 내용은 눈에 익을 대로 익어서 몇몇 구절은 문장부호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집중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평소보다 더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는 이마에 손을 댄 채로 거의 널브러진 것처럼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보던 가비가 그를 힐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꾸 왜 그래?

뭐가?


나폴레옹은 눈동자만 굴려서 가비를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단단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녀는 눈을 약간 찡그리고 그를 보았다.


지금 한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 보고 있어서 그렇지. 게다가 그것들에는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잖아? 모른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뭐가 문제야?

글쎄.

글쎄? 그거 알아? 굳이 말해줄 생각이 없어도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거.

내가 스파이로써 실격이란 소린가, 그거?


나폴레옹은 농담을 하면서 별로 농담이 아닌 투로 말했다. 가비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일리야 때문이지?

…글쎄.


가비의 물음에 나폴레옹은 잠시 입만 뻐끔거리다가 애매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단어 하나를 겨우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작게 들렸다. 그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내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가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다지 길지 않은 엉클의 역사에서 웨이벌리를 포함한 세 명 중에 누군가가 임무에서 빠진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외부에 보이는 모양새를 중시한 미국과 소련은 속으로는 탐탁지 않더라도 겉으로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두 나라의 정보기관에서 자국의 요원이 엉클의 임무를 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다. 비록 두 국가가 대립 각을 세우고 있긴 해도 모든 부분에서 반드시 날을 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나 이념 문제 같은 것을 떠나서 공동의 적을 막을 연합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양 진영의 대표주자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패권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는 빅토리아 빈치구에라가 아니라 텔러 박사의 디스크와 핵탄두 같은 것들이 적이었다. 그런 적들은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대항마가 필요했다. 바로 거기에서 미국과 소련의 합의점 하나가 생겨났고, 양국의 승인을 거쳐서 탄생한 것이 엉클이었다. 영국이 거기에 끼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는데, 가비가 웨이벌리의 정보원으로 포섭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편이 연합이라는 구색을 맞추기에는 차라리 적당하긴 했다. 여전히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그 즉시 합의가 깨질 위험에 놓여 있긴 했지만, 무늬만이라도 중재역은 있어야 했다.


어쨌거나 가비는 그런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 그저 일리야 한 사람의 빈자리가 큰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폴레옹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문득문득 허전함을 느끼고 있을 테고, 그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요 며칠간 연인 행세를 한답시고 내내 같은 방을 쓰면서 그녀가 본 그의 행동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던 나폴레옹과 일리야가 어느새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것을 그녀도 눈치로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일리야가 미국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에 나폴레옹이 저렇게까지 어두운 낯빛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큰 문제였던가? 질문을 머릿속에 던져놓고 이리저리 답을 찾아 헤매보아도 안개만 잔뜩 낀 것 같아서 가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웨이벌리가 직접적으로 별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그야 직접적으로는 그렇지.


나폴레옹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는 보스턴에 도착한 다음날에 웨이벌리를 만났다. 그 자리에는 이번 임무에 관한 회의를 하기 위해서 일리야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가비는 가끔 빈자리를 힐끔거리면서 웨이벌리가 일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웨이벌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방을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웨이벌리는 동문서답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지난 10월에 쿠데타로 소련공산당의 제1서기장이 니키타 흐루쇼프에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로 바뀐 소식을 말했다. 가비의 뒤에 서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나폴레옹은 웨이벌리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니 입을 닥치고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을 굳이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나폴레옹은 웨이벌리가 일리야의 입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직 그는 랭글리에서 에이드리언이 이를 두고 한 말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쯤 되면 트레프차 광산의 일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란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두 국가 간에 어떤 오해가 생길 정도는 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본디 이해에 따른 합의란 매우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엉클은 깨지기 쉬운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법과 집행을 위한 연합 네트워크 사령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스파이 연합이 만들어진 지도 벌써 2년째인데 여태 소속된 사람들이 초기의 네 명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다 그런 바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를 믿지 않는구나.


가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폴레옹은 그제서야 허리를 세우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늘 그랬어.

맞아, 나폴레옹 솔로는 늘 그랬지.


그녀는 작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웨이벌리가 뭔가 숨긴다고 생각해?

아니. 그 양반이 숨기고 있는 것이 어디 한둘은 아니겠지. 하지만 웨이벌리는 아냐.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조금 답답한 듯이 가비가 몸을 약간 들썩이느라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신문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폴레옹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무언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던 그는 끝내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비의 시선이 그를 따라 위로 약간 올라갔다.


슬슬 나갈 준비나 해야 할 것 같군.


나폴레옹은 말을 마치고 으레 그러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가비는 그 미소에 화답하지 않았다. 눈가를 살짝 씰룩인 그녀는 말없이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신문을 다시 펼쳐 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


어깨를 한 번 들먹이고 돌아선 나폴레옹에게 그런 말이 작게 들린 것 같았다.






+ 맨프롬엉클 온리전 <냉전과 열정 사이>에 냈던 원고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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