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보스턴의 길거리도 벌써부터 다양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던 간판과 크리스마스 전구들은 곳곳에서 가게의 외관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뉴욕에서처럼 번쩍이는 전구에 휘감긴 장식들이 본래 건물에 붙어 있던 네온사인들과 함께 요란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노란 전구들을 건물이나 장식물에 얼기설기 감아놓은 모습이 이 도시 특유의 조용하고 보수적인 분위기와는 잘 어우러져서 구경하기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가비는 차창 밖으로 노란 빛들이 길게 잔상을 남기며 뒤로 사라져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폴레옹을 태운 흰색의 크라이슬러 뉴포트는 보스턴 시내를 가로질러서 자선 행사가 열리는 제레미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의 1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겸하여 열리는 행사였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번에는 까만색의 정장에 짙은 회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가비는 창문 위로 비치는 그를 힐끔 보았다. 차에 탄 이후부터 말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하얀 얼굴이 어두운 배경에 스며들 것처럼 까맣게 보이는 옷과 곱슬머리 사이에서 동동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로마에서 아직 약간은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일리야와 연인을 연기할 때에도 이렇게 무거운 침묵을 견뎌야 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도 그 생각이야?


한참 동안 고요하던 공간에 가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자 운전수가 룸미러 너머로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나폴레옹도 눈썹을 움찔거리고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가 말한 그 생각이란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비는 눈을 살짝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폴레옹을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그녀는 중간에 말을 멈추고 룸미러를 힐끔 보았다. 운전수는 앞만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앞 유리창 너머를 본 그녀의 눈에 높게 솟은 저택의 정문이 들어왔다. 그녀는 차가 열려 있는 정문을 통과하고 난 후에 다시 나폴레옹을 보았다.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지장은 가지 않게 해.

그럴게.


나폴레옹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그녀의 왼손을 잡아서 위로 들었다. 작고 가느다란 약지에 가짜 약혼의 상징이 저택에서 나오는 불빛을 받아서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도 나지 않은 조용한 입맞춤이었다. 가비는 그의 입술이 반지 위에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얼른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갑자기 다정한 약혼자 행세를 하는 그에게 당황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어 번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딱히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가비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에 그는 얼른 문을 열고 자동차에서 내렸다. 흰색의 뉴포트는 어느새 저택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멈춰 있었다. 가비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나폴레옹이 차를 휘둘러 와서 제 쪽의 문을 열 때까지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실까요, 스펜서 양?


차 문을 연 나폴레옹이 꽤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 임무에서 쓸 가비의 새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꾸며낸 미소를 생긋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올라가서 커다란 오크 문을 통과하여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넓고 으리으리하다고 소문난 곳답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아주 넓은 홀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하얀 대리석 계단은 벽을 따라 양쪽으로 둥글게 휘어지며 나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있는 공간은 저택의 안쪽으로 더 뻗어 있었다. 각자 조용히 담소를 나누거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음에도 넓은 공간을 채우기에는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두툼하고 값비싸 보이는 카펫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고 벽에는 프랑스산 태피스트리가 몇 점 걸려 있어서 드넓은 홀이 허전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안쪽 홀의 좌우 벽에 작은 아치형의 구멍을 연속으로 뚫어서 만든 회랑에 세워둔 여러 조각상과 벽 곳곳에 걸려 있는 그림들 때문에 커다란 미술관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 위쪽 벽에는 케네디를 기억하며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개츠비도 여길 보면 울고 가겠군.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했다며? 군에서 받은 돈이 어마어마할 거야. 부모도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였다니까 그럴 수밖에.


가비는 꽤 냉소적으로 말하면서 짙은 군청색 코트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가 안에 입고 있던 흰색 배색이 들어간 검정 파투 드레스가 드러났다. 나폴레옹은 그녀와 자신의 코트를 맡기고 돌아섰다.


꼭 누구랑 같은 소리를 하는데.


가벼운 말투 속에 들어 있는 씁쓸함을 감지한 가비가 나폴레옹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나폴레옹은 입꼬리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려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홀을 둘러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의 미소는 더 진해져서 아주 매력적으로 변하곤 했다. 가비는 벌써부터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완벽한 가면을 쓴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것은 이제 그녀의 숙명과도 같았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 가면의 뒤를 보는 것을 유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홀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저기에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억양이 강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끔 다른 지역의 말투가 들리기도 했다. 케네디의 이름이 걸려 있어서 매사추세츠주나 근처의 다른 주들 외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들 속에서 가비는 제레미를 찾아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저기 왼쪽 태피스트리 아래. 보여?


두 사람이 홀 안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왔을 때, 가비가 왼쪽 벽에 걸린 커다란 태피스트리 앞을 가리켰다. 그쪽을 본 나폴레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와 같은 색의 콧수염의 끝을 길게 기른 남자가 주위를 둘러싼 서너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마르고 키가 큰 그는 바로 두 사람이 찾던 제레미 펠레티에였다. 두 사람은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만 제레미 근처로 다가가서 샴페인이 담긴 유리잔을 하나씩 손에 들고 서로 마주보았다. 그들은 샴페인을 마시는 척하면서 대화를 잠시 엿들었다.


대화 주제는 제레미가 최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안에서 막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살 사건과 케네디 가문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9월에 암살 사건을 수사하고 그 결과를 정리한 워렌 커미션 리포트가 발표된 이후에도 암살 사건에 얽힌 음모설은 끝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폴레옹은 홀 저편에 서 있는 비너스 상 앞에서 죽은 존 F. 케네디의 사촌들 중 두 명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건너다보았다. 브루클라인에 터를 잡고 있는 케네디 가문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언제나 당사자들의 진실한 이야기보다 주위 사람들이 곱씹는 소문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되는 법이었다. 전 대통령의 사촌들 두 명은 지금 산 채로 웃으면서 사람들의 소문 위에서 화형을 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케네디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작 자선 행사의 주최자는 케네디 가문을 해체하는 말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제레미는 간간이 추임새만 넣으며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콧수염의 끝을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는 그는 꽤 따분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가 자리를 뜨지 않는 이유는 그의 대화 상대가 피닉스의 민간사업을 지지해주는 투자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어깨너머로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던 가비는 유리잔의 길쭉한 목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거의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는 샴페인이 찰랑이며 잔의 벽에 부딪쳤다.


개츠비 씨가 엄청 지루한 모양이야.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군. 소문은 피곤해.

소문에 시달린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온 유럽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거든.


나폴레옹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소문이란 나쁜 쪽으로 더 크고 넓게 퍼지는 법이었다. 당시에 그는 자신에 대해 굉장히 악질적으로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때때로 그들이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할 때면 나폴레옹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그가 그런 소문들에 휘둘릴 성격은 아니었지만 주변을 떠도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퍼진 소문 덕분에 그가 더 자유롭게 온 유럽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짓에 둘러싸인 진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거짓으로 둔갑해 있곤 했다. 여느 로맨스 소설에 쓰이는 클리셰처럼 질투에 눈이 먼 여자가 약을 탄 음료를 그에게 먹이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폴레옹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온통 헤집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두고 가정을 하는 것은 굉장히 쓸데없는 짓이었다. 인터폴에 붙잡히고 CIA에서 형량을 채우게 되었다고 해도 그의 삶은 그럭저럭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임무 중에 손재주를 발휘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추운 나라에서 온 남자를 만나서 동료 이상으로 두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에 단맛이 조금 돌자마자 알싸한 알코올 향과 함께 탄산이 느껴졌다.


이제 모금 행사를 진행할 모양이야.


가비의 말에 나폴레옹은 몸을 돌려서 수행원 한 명과 함께 연단으로 향하고 있는 제레미를 보았다. 그가 오를 무대는 넓었지만 높지는 않았다. 그런 무대 위에는 세로로 길쭉한 받침대 위에 놓인 마이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유독 휑하게 보였다.


모금한 돈을 기부하려는 곳이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비영리 시민 단체라고 했지?

, 와스프.


연단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던 가비의 물음에 나폴레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좀 이상하지 않아? 웨이벌리는 와스프에서 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이런 자리에 빠질 리가 없는데.

저택이 너무 넓어서 길이라도 잃었나 보지.

그 농담 엄청 형편없어.


계속 고개를 빼고 무대 주위를 살펴보던 가비가 눈을 흘겼다. 나폴레옹은 눈썹을 들썩이고는 말했다.


리 하비 오스월드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잠시나마 소련으로 전향했었어. 그런데 그는 다시 돌아와서 잭을 죽였지. 그러니 여기서는 굳이 와스프에서 나서지 않고 케네디라는 이름만 들먹여도 충분해 보이는데.

명분은 되겠지.


제레미가 무대에 오르자, 연단 주위로 사람들이 점점 몰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과 가비도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사람들 속에 섞여 들었다. 제레미는 마이크를 툭툭 쳐서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을 한 후에 짧은 인사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그래. 이념 문제만큼 명확해 보이는 건 없으니까.


가비는 나폴레옹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시선이 더 먼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구태여 헤아려보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 끝은 필시 거대하고 차가운 땅에서 온 남자를 향해 있었다.


애틋하기도 해라.


가비는 어릴 적에 잠깐 다녔던 발레 학교에서 본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폴레옹과 일리야의 상황을 집안끼리 반목하는 와중에도 사랑의 싹을 틔웠지만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 빗대어 보면 꽤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맹세컨대 가비는 셰익스피어가 내린 비극적인 결말을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그녀는 동료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만큼 혼란스러운 게 없어. 그러니까 그 너머에 있는 걸 봐야지. 그게 우리가 할 일이잖아.







+ 맨프엉 온리에 낼 원고 6편... 안 올리려다가 그냥 올림... 질질질질질질질ㅈㄹ 늘어지는 중입니다....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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