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외출하시오? 오늘 날씨가 꽤 추운데.”


밖으로 나서려는 일리야에게 별로 달갑지는 않은 인사말이 따라붙었다. 투박한 말씨에는 분명 친절함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었으나, 일리야는 마치 못 들을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굳히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여관 주인이 넉살 좋은 표정을 지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주름이 얼굴에 자글자글하게 피어난 여관 주인은 다소 어수선한 낡은 여관의 입구 맞은편 벽에 길게 널빤지를 대어서 만든 프런트 뒤에 서 있었다.


종일 찬바람이 불거요.”


회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파묻혀서 반쯤 보이는 늙은 여관 주인이 덧붙이는 말에 그를 노려보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던 일리야가 조그만 창문을 힐끔 보았다. 가장자리에 살짝 부연 김이 서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빛깔을 잃은 휑한 거리가 다였다. 어제부터 닥쳐온 지독한 한파에 굳이 밖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없는 탓이었다.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차가운 바람이 부는 소리가 윙윙 울리고, 유리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것들이 무어라고 호들갑인가 싶어서 일리야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늙은 주인장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일리야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로 된 문손잡이를 잡자마자 그의 뒤에 대고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했다.


정말 성가시게 하는군.’


일리야는 기어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손잡이를 홱 당겼다. 두꺼운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문이 안쪽으로 열리면서 오래되어 녹이 슨 경첩이 끼익하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기 무섭게 문 위쪽에 달린 조그만 종도 경박스럽게 딸랑거렸다. 그 불협화음도 잠시, 열린 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한 걸음을 내딛으려던 일리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가 문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더 이상 여밀 곳 없는 옷깃을 잡아 여미어도 주인 영감이 경고했던 추위는 외투에 숨은 몸을 통째로 감쌌다. 심지어 꼭 뼛속까지 파고들 것처럼 공기가 시렸다. 그러나 그는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로 얼른 밖으로 나섰다. 늙은 주인장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등 뒤에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 늙은 여관 주인이 잠깐 머물다가 금방 바람처럼 떠날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는, 천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매번 눈을 흘기는 것은 그런 친절마저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탓이었다. 그의 처지에 타인의 관심은 가당치도 않았다. 도망을 다니는 사람이 남들의 시선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며칠 전부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용케도 피해서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꼬리가 기어코 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얌전히 방 안에 처박혀 있는 편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안전할 터였다. 최대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의심을 살 일도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가만히 좁은 여관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리야의 어깨에는 이제 막중한 책임감이 매달려 있었고, 그가 그것을 외면하고 도망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는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날숨이 공중에서 하얗게 성기다가 퍼지면서 사라졌다. 그 위로 자꾸만 유난히도 혹독했던 10살 무렵의 겨울이 어른거려서 일리야는 차갑게 곱아든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괜히 좁은 여관방 한 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난로의 온기를 떠올리다가 몸을 잘게 떨었다. 온기, 애정, 상냥함, 희망, 도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런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이나 보장된 신분 같이 확실한 것이어야 했다. 문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래를 보고 있노라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일리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계획을 하나 세웠다. 그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미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온 것도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두 블록을 더 가서 왼쪽으로. 그리고 한 블록을 간 다음에 오른쪽으로. 다시 쭉 뻗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왼편에 나타나는 큰 건물 사이에 난 샛길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일리야는 머릿속 지도 위에 빨간 선으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그렸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음산해 보이는 거리 위로 길게 그어진 붉은색의 선이 아주 이질적으로 둥둥 떠다녔다. 일리야는 문득 그것이 무채색의 포장지에 싸인 상자 위를 예쁘게 묶은 리본 같다고 생각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과연 그가 바라던 것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었다.


일리야의 목적지는 은밀하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토마스라는 자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이틀 전에 일리야는 우연히 KGB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에 알게 된 토마스가 프라하의 뒷골목에서 신분증을 위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의 위조 기술은 아주 뛰어난 편이라서 열에 아홉은 속아 넘어갈 정도였는데, 서방 국가에 적발될 위기에 놓인 KGB 요원들이 그가 만든 위조 신분증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그는 KGB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적절한 액수의 돈만 준다면 의뢰인이 누구이든지 작업을 해주었고 다른 사람에게 의뢰인에 관한 정보를 주는 멍청한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일리야는 일단 그의 솜씨를 빌어 가짜 여권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일리야의 계획은 위조한 여권을 이용해서 아이를 데리고 중립국에 가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가까운 중립국은 스위스였다. 물론 중립국에 간다고 해서 도망자라는 신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거라는 보장은 없었고, 일리야 역시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스위스행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이 계획은 그저 그가 오로지 아이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아이만을 생각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제 태어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갓난아이에게 그는 절대로 자신이 겪은 끔찍한 세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일리야 스스로가 도망자 신세이므로 아이도 마찬가지라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짐은 자기 혼자서 짊어질 것이라고 되받아칠 작정이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런 악다구니뿐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양분된 세계는 이제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그가 아이와 함께 살아남으려면 그런 발악이라도 해야 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손을 펼쳤다. 몇 주 전에 생긴 손톱에 패인 상처 자국이 아직도 그의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마치 어떤 상징이라도 되듯이.


한참을 크고 작은 까만색 돌들이 박힌 땅바닥만 내려다보면서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걷던 일리야가 시선을 들고 앞을 보니, 그는 어느새 인도도 없는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머리에 푹 눌러쓴 납작한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붉은 지붕의 건물들이 모두 비슷한 높이에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모두 하층 노동자들이 사는 공동주택들이었다. ,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일리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만치에 있는 골목 어귀를 보면서 몸을 조금 긴장시켰다. 저 골목길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만큼의 샛길이 있을 테고, 샛길은 곧장 토마스의 집이자 작업실로 연결되었다. 일리야는 모퉁이가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토마스가 가짜 신분증을 만드는 데에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늦어도 내일 밤이면 일리야와 아이가 프라하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기대감에 일리야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가기만 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골목길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부르튼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빠르게 걸음을 내딛던 그는 불현듯 뒷목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기운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거의 기계적으로 공격자나 미행하는 자가 숨어 있을 만한 지점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좁은 길에 서 있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고, 단지 칼바람만이 칙칙한 건물들 사이를 마구 내달리고 있었다. 일리야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너무 예민해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의 오랜 스파이 생활로 다져진 기민한 감각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뒷목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던 미행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단순히 그의 강박적인 예민함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가 총을 가져 왔던가?’


그제야 일리야는 가슴팍을 더듬으면서 건물 외벽에 몸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제 품 속에 총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골목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찾는 거라도 있나, 쿠리야킨?”


꽤 단조로운 어조의 러시아어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일리야는 그만 눈을 크게 홉뜬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몸속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하얀 얼굴이 정말로 백짓장처럼 질리고, 그의 사지는 불시에 전기충격을 당한 것처럼 뻣뻣하게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저런. 오랜만에 보는 꼴이 말이 아니로군.”


경악에 찬 표정으로 굳어 버린 일리야를 보고 한쪽 입술 끝만 위로 끌어올려 비릿하게 미소를 지은 올렉은 짐짓 걱정이라도 된다는 말투였다. 숨 쉬는 것도 멈춰 있던 일리야가 겨우 입술만 달싹이자, 올렉은 습관적으로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살짝 모은 입술 사이로 허연 연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꼭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 일리야는 그가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뜻 일말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올리브색 눈동자가 모자의 챙이 만든 그늘에도 반짝였다. 일리야는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그가 겨우 11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던 젊은 스파이의 눈빛을 그가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눈가의 오래된 흉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올렉은 강철 같은 성격의 수용소장이 당황했을 정도로 갑자기 수용소에 들이닥쳤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어린 수감자들을 살펴보겠다고 하면서 어린 일리야를 포함하여 수용소에 있던 모든 어린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는 아이들을 품평이라도 하듯이 꽤나 꼼꼼하게 보더니, 곧 어린 일리야와 다른 아이 하나를 골라냈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손에 이끌려 어느 독방에 집어넣어진 두 아이들은 살아남는 자만이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때까지 일리야는 아무 원한도 없는 자를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그와 함께 갇힌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숨죽인 채로 깜깜한 방에 갇혀 있던 두 아이는 결국 살기 위해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평생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열렸을 때 올렉은 오른쪽 뺨 윗부분에 난 상처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일리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그때도 지금도 웃지 않았다.


돌아가야지?”


그의 말에 일리야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제야 올렉은 흥미가 다 떨어졌다는 듯이 무신경하게 표정을 굳혔다.


집으로 갈 시간이다, 쿠리야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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