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은 장황하게 늘어지는 법 없이 빨리 끝났다. 완벽한 보스턴 억양을 사용하는 제레미는 짧은 추모사와 모금을 독려하는 말 외에 군말을 하지 않았고, 중간에 마이크를 넘겨받았던 전 대통령의 사촌들도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자선 행사의 목적은 1년 전의 충격과 슬픔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제레미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금방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에게 몇몇 사람들이 다가갔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이들 모두와 일일이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했다.


저러다가는 끝이 없겠어.


그 장면을 지켜보던 가비가 중얼거렸다. 나폴레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끌어야지.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제레미 앞에 불쑥 튀어 나갔다. 가비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아서 종종걸음을 해야 했다.


펠레티에 씨! 방금 그 연설은 정말 군더더기 없이 훌륭했습니다. 최근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좋았어요. 게다가 말로만 듣던 케네디 가문 사람들을 정말로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역시 여기 오길 백 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배우처럼 약간 과장된 말투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폴레옹을 보았다. 다른 이와 말을 하던 제레미도 갑자기 끼어든 그를 쳐다보았다. 나폴레옹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도 아주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제레미는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자기 앞에 선 나폴레옹의 정체를 가늠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실례합니다만, 저희가 아는 사이던가요? 억양으로 봐선 이 지역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 이런, 제 소개를 먼저 하지요. 저는 조지 게이먼입니다. 그냥 조지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제 사업 파트너이자 약혼자인….


제레미와 악수를 한 나폴레옹이 말끝을 흐리며 옆에 있던 가비를 돌아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나폴레옹만큼이나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자벨라 스펜서예요. 저희는 시카고에서부터 펠레티에 씨를 뵙고 싶어서 왔어요.


나폴레옹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가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가 평소에 쓰던 독일어 억양이 섞인 영어와 완전히 다른 미국식 영어 발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여배우들이 쓰는 것과 비슷한 억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이 이자벨라 스펜서라는 인물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완벽한 가면을 덮어쓴 사람은 바로 가브리엘라 텔러였던 것이다. 그녀의 웃는 얼굴 위로 드리워진 갈색의 단발머리를 가로지르는 흰색의 머리띠가 가면에 달린 하얀 공작새의 깃털 같았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로마에서 일종의 이중 스파이와 비슷한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정말 제대로 엿을 먹었다고 생각했고, 반쯤은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남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바람잡이 역할을 잘하는 것이 그의 타고난 성질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가비가 가면극에서 주연배우의 역할을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면극의 진짜 주인공이면서도 유일하게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제레미와 악수하면서 입꼬리를 더 끌어올렸다.


시카고에서 여기까지 저를요?


제레미의 물음에 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라는 듯이 나폴레옹의 왼팔을 슬쩍 잡았다. 나폴레옹은 그녀와 미리 맞춰둔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 ,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자선 행사도 자선 행사지만, 저희 사업에 대해서 펠레티에 씨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지요. 저와 벨라는 가전제품을 제조하는 업체를 운영해 왔는데, 사실 저희는 식품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이미 그쪽 사업을 시작한 지도 2년 정도 되었고요.

피닉스가 최근에 가전제품 회사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로 오자고 했답니다. 물론, 펠레티에 씨,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원치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사업 이야기는 장소와 맞지 않는 것 같군요. 펠레티에 씨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죠. 다시 기부금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농담이 아니라, 저는 정말로 기부금을 많이 낼 용의가 있습니다. 기부금을 위탁하는 곳이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단체라고 들었습니다. 와스프였던가요? 혹시나 단체 관계자가 여기 왔다면 만나 보고 싶군요. 앞으로도 계속 지원을 하고 싶어서요.


두 사람은 호흡을 척척 맞춰 제레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를 흘리고 한 발 뒤로 빠졌다. 마치 낚시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미끼를 엮은 낚싯줄을 늘어뜨리면, 곧 탐욕스러운 물고기 한 마리가 나타나 미끼를 입에 물고 끌어당긴다. 그 신호를 받으면 낚싯줄을 당겨서 사냥감을 거둬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이미 가상의 회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눈을 번쩍인 제레미는 다 잡은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 와스프 측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 제가 나중에 따로 연결을 해드릴 수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수고롭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그리고 제 조언을 듣고 싶다던 것 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요즘 저는 가전제품 분야에 공을 들이고 있지요. 기업을 인수하려면 가능한 많은 대안을 검토해야만 하니,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좀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대화 주제라면 장소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겁니다. , 그리고 제레미라고 편하게 불러주시면 좋겠군요.


가비와 나폴레옹은 다시 밝게 웃었다. 미끼를 덥석 문 사냥감을 건지려면 이제 그들이 낚싯줄을 당길 차례였다.

 

∴∵∴

 

세 사람은 저택의 동편에 있는 넓은 응접실에서 와인을 두 병이나 비울 때까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제레미는 진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게이먼이라는 회사에 대해 아주 적극적으로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면 가비와 나폴레옹은 있지도 않은 사업 이야기를 해야 했고, 제레미는 냉철해 보이는 호박색 눈을 빛내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가끔 나폴레옹이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기술 연구에 대한 것에 질문을 하거나 가비가 신문에서 봤다며 실종 사건을 언급하며 다른 이야기를 해도 제레미는 금방 다시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피닉스가 제대로 날아오를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것이 다인 것 같았다. 그는 진짜 시종일관 정중한 말투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했다. 지극히 사업가적인 면모를 보이는 그를 두고 가비와 나폴레옹은 섣불리 그가 유리 아포닌의 실종과 분명히 관련이 있을 거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 자는 사업가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제니퍼 카터의 뒤를 미행했던 사설탐정은? 혹시 이 자가 우리의 정체를 미리 알기라도 하고 깜빡 속이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도록 하나둘씩 떠오르는 질문들을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기만 했다. 제레미가 보여주고 있는 열정적인 사업가의 모습이 연기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짜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그가 결백하다면 도대체 유리 아포닌과 제니퍼 카터에 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딜레마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가 풀고자 하는 수수께끼 두 개의 답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가비를 보았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덩달아서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 이번 임무는 이제 시작한 것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무언가가 빠져서 꼬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게 있어요.


소파에 널브러진 것처럼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던 제레미는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는 담배를 든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말했다. 와인 두 병을 비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한 병을 더 꺼내 왔던 그는 이제 양 뺨에 약간의 홍조가 올라 있었고, 영어 발음에 묘하게 프랑스어 억양이 섞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노란색 눈동자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피닉스란 회사를 세우고 이만큼 이끌어온 것을 간혹 신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겉만 보고 하는 소리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미국으로 왔을 때 빈털터리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피닉스를 이 정도로 단번에 키울 만큼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는 않았어요.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을 고용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게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니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하는 겁니다. 부모님은 나치가 일으킨 전쟁에 희생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치를 믿었어요. 지금은 소련이 나치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프레임이 짜여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련은 나치와 달라요.


그는 꼭 넋두리를 하듯이 말했다.


제가 왜 정부와 군대를 두고 자꾸 다른 민간 상업 분야로 눈을 돌리는지 아십니까?


답을 바라기라도 하듯이 그는 가비와 나폴레옹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일일이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이미 반쯤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얇은 담배 끄트머리의 주황색 점이 빛나면서 하얗게 타들어 갔다.


저는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이러니하지요. 그래도 무기는 지금으로서는 필요악입니다. 우리 자유 진영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어요. 와스프, 그 단체를 지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그들이 하는 것이 당장은 성과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작은 움직임이 큰 파도를 밀고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무기가 필요악이 아니라 정말 악으로 남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제레미는 꽁초만 남은 것을 재떨이에 버리고 유리잔에 조금 남아 있던 와인을 몽땅 입에 털어 넣었다. 가비는 그가 다시 소파에 머리까지 기대고 눈을 감는 것을 보고는 나폴레옹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눈짓으로 문을 가리키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폴레옹도 그녀를 따라서 일어났다. 제레미는 잠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그들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저 사람은 아니야.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가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뻗은 복도는 유난히 조용해서 벽에 장식처럼 매달린 조명에서 나오는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시끄럽게 보일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한숨을 쉬고 가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래, 아니야.

어떻게 된 거지? 가족이 없어서 가족이 한 짓은 아닐 테고.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때 홀을 향해 꺾이는 복도 반대편 끝에서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나폴레옹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거의 또각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따뜻한 색감의 조명을 받으면서 걸어오는 여자는 둥글게 말아서 한껏 치장하여 올린 짙은 갈색 머리에 하얀 어깨를 다 드러내는 검붉은 벨벳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흰색의 클러치를 흔들면서 걷는 그녀는 자신과 마주보고 걸어오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폴레옹은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머릿속으로 달달 외울 정도로 보았던 제레미의 서류를 떠올리며 여자에 관한 언급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서류의 어디에도 그런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가비와 나폴레옹 가까이로 다가온 여자는 그들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입술의 한쪽 끝만 올려 설핏 미소를 지었다. 붉은색의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은 유려하게 곡선을 그렸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다시 앞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그녀의 시릴 것처럼 밝은 하늘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이 그를 덮쳤다. 그의 옆에 붙어서 걷던 가비도 뭔가를 느꼈는지 뒤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금세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녀는 콧잔등을 약간 찡그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거기 두 분.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여자가 뱉어낸 딱딱한 영국식 영어 단어들이 고요한 공기 중에 널리 퍼뜨려졌다. 가비와 나폴레옹은 멈춰 서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여자는 그들과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서서 그들을 향해 아까처럼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 제레미를 만나셨나요?

. 방금 그 분과 헤어지고 나오는 길이에요.


나폴레옹이 입을 열기도 전에 가비가 먼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와 함께 계시던 곳이 응접실인가요?

, 맞아요. 저기,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제레미를 만나러 오신 거라면 그 분께서 와인을 많이 드셨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 같네요.


가비가 덧붙인 말에 여자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말할 때는 높고 카랑카랑하게 들렸던 여자의 웃음소리는 갑자기 누군가가 오디오를 조절한 것처럼 낮고 킥킥거렸다. 그것은 명백히 비웃는 소리였다. 나폴레옹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가비는 여자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밤길이 많이 어둡더군요.


여자는 말끝에 채 갈무리하지 않은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뒤돌아섰다. 그녀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들반들한 까만색 구두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가비와 나폴레옹의 눈에 기묘한 잔상을 남기면서 멀어졌다. 두 사람은 여자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환한 빛이 쏟아지는 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붙박인 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앞편과 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주요인물들이 이제 모두 등장했습니다. 일리야만 빼고. 본격 솔로의 짝사랑.

선입금예약폼이 오늘 밤이나 새벽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무사히 행사 전에 원고를 넘기고 책이 나올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맨프온에 나왔던 원고 수정. 앞편과 이어지지 않아요. 일리야 등장이 꽤 뒤쪽이라서 일부러 일리야 등장 장면 공개합니다-0919


앞편에서 이어짐-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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