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일이죠. 파라오의 무덤을 지키는 것을 이렇게 공원에 떡 하니 세워놓았으니.


고개를 들고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꼭대기를 보고 있던 가비는 오른쪽에 선 남자의 목소리에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옅은 회색의 긴 돌덩이 위로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그 위로 햇볕이 쏟아졌다. 헐벗은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웠지만, 바닥에 넓게 펼쳐진 잔디는 푸르렀다.


딱 맞춰 왔네요.

숙녀 혼자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가비는 그제야 나폴레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장갑을 끼지 않아 차가워진 양손을 맞잡아 주무르면서 주위를 한 번 힐끔 둘러보았다. 그도 이미 그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여 어딘가에 웨이벌리나 일리야가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주변 그 어디에서도 일리야의 높이 솟은 노란 머리통이나 웨이벌리의 어두운 색 정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솔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나폴레옹은 이름이 불리자 얼른 가비를 보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폭 쉬었다.


나 혼자 온 거야.

여길? 아니면 미국을?


이름이 불린 시점부터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아예 대놓고 질문했다. 그리고 그는 질문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조금 멍청하게 군 것을 깨달았다. 아까 그는 분명히 웨이벌리의 목소리를 들었고, 가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나폴레옹을 보며 피식 웃었다.


글쎄, 확실히 때가 좋지 않기는 하지. 온 나라가 추모 물결인데. 라스 베가스의 카지노에도 손님들이 뜸할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별로 놀리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나폴레옹은 한쪽 눈썹을 약간 움찔거렸다. 어쨌든 그는 가비 앞에서 자신이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다 내보이고 말았으니 뒤늦은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케네디를 추모하겠다고 온 건 당연히 아냐. 그러려고 미국까지 온 거면 차라리 워싱턴으로 갔겠지. 삼촌이 불러서 온 거야.


가비는 삼촌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습관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삼촌은 웨이벌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코드네임인 엉클의 뜻을 비틀어 말한 것이었다.


딱 보아하니 예상했겠지만, 그는 나와 함께 여기 오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일이 생겼대.

?


가비는 뒤쪽에 있던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오벨리스크를 다시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였다. 그녀는 어깨에 걸친 조그만 흰색 가방의 끈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손으로 짧은 밤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단발머리가 달랑거리는 진주귀고리 뒤로 목선을 따라 얌전히 달라붙으면서 그녀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미국으로 오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지.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녀는 말끝을 조금 흐렸다. 일리야의 이야기였다. 그가 결국은 미국에 아예 들어오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유의 땅을 표방하면서도 적국에게는 가차 없는 곳이 바로 미국이란 나라였다. 혹은 러시아에서 일리야를 보내주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폴레옹은 입 안에 고이는 침을 모아 삼켰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의 혓바닥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우린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는 중이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가비가 나폴레옹을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점을 향해 있었다. 가비는 뭐라고 말을 더 할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삼촌이 부른 이유는?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은 곧 가비의 옆에 앉으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그 안에서 흑백 사진을 두 장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제니퍼 카터. 프리랜서 사진기자야. 타임지나 라이프지에도 자주 사진이 실릴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래.


사진은 각각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을 찍은 것이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액자에 담긴 사진들이 빼곡하게 붙은 벽 앞에 서서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묶고 까만 카메라를 든 채로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제니퍼 카터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에는 웨이벌리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아무런 무늬가 없는 어두운 색의 배경 속에서 원목장식이 멋들어지게 들어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장의 사진은 주인공들만큼이나 그 분위기가 완전히 상반되어 보였다. 나폴레옹이 남자의 사진을 가비 쪽으로 들어 보였다.


유리 아포닌. 우크라이나 출신 화학자이고 제니퍼 카터의 생부. 제니퍼가 2살 때 전 부인과 이혼했어. 전 부인은 곧장 어린 제니퍼를 데리고 미국에 와서 재혼하며 이름을 바꿨대. 그런 후에도 편지로 계속 연락은 주고받았고.

그런데 문제는?

유리가 올해 1월에 폴란드에서 실종됐어. 친척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사라졌대.

실종?


가비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제니퍼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어. 그런데 그녀가 몰랐던 사실은 유리 아포닌이 소련에서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거야.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전쟁이 터지자마자 소련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연구소에서 무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여러 건 진행했다고 해. 주로 가스를 이용한 화학무기를 연구했다고 하는데 6년만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돌연 모든 걸 그만두고 교수직으로 가버렸어. 최근에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서 그만뒀던 연구를 계속하려고 했다는데 갑자기 실종된 거지.


양손에 하나씩 사진을 들고 내려다보면서 가비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소련의 중요한 인재 중 하나인 유리 아포닌이라는 화학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 그의 딸은 그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실종된 지 10개월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엉클이 미국에 왔다? 유리의 딸인 제니퍼 카터가 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했다. 배후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사건의 성질이 달라질 가능성이야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일은 소련의 KGB 내지는 인터폴이 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폴레옹은 두 사진을 겹쳐 들고 다시 가비에게 내밀었다.


우리가 유리 아포닌을 찾아야 한다는 건가? 그는 폴란드에서 실종되었다면서. 그리고 그가 소련의 중요 인물이었다면…,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사진을 조금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나 가비는 다시 제게로 내밀어진 사진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받지 않았다.


당신답지 않게 성급하게 구네. 나는 그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솔로.


그녀는 유리의 사진 위에 겹쳐 있는 제니퍼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단조로운 색채의 사진 속에서도 제니퍼는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웨이벌리는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다 각자의 복이라고 했었다. 가비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웃어본 지는 이미 오래되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팔랑거리는 사진이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가비는 곧 가방에서 다른 사진 한 장을 더 꺼내 나폴레옹에게 주었다. 그 사진은 주인공이 모르게 멀리서 몰래 찍은 것인지 노이즈가 자글자글 있었지만, 잘 손질한 콧수염을 달고 식사를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자기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제니퍼를 계속 미행하는 자가 있었어. 사설탐정이었는데 고용인이 이 남자, 제레미 펠레티에였지. 프랑스계 미국인이야. 부모가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대.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죽었고, 그는 혼자 미국으로 와서 군수공업으로 크게 성공을 거뒀어. 부모와는 다르게 그는 나치를 싫어했다고 하는데 글쎄….


가비는 말을 끝맺는 것을 잊은 것처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레미 펠레티에의 사진을 보았다. 나폴레옹은 빈치구에라 가문이 소유한 초승달 모양의 섬 지하에 있던 연구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텔러 박사를 떠올렸다. 박사의 시체가 누워 있던 연구실의 사방에 총알이 관통한 머리에서 튄 인체 조직과 피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가비가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아버지는 정비공인 사람뿐이므로 박사의 죽음이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우도 텔러라는 이름이 나오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리곤 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그럴 때와 비슷했다. 나폴레옹은 새삼 그녀도 많은 것들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그 부당한 착취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지.


그가 나지막하게 건넨 위로의 말에 가비는 한쪽 입꼬리를 조금 씰룩였을 뿐이었다.






+맨프온에 냈던 원고 수정-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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