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가 죽었다.

 

장례식은 소련 땅도, 미국 땅도 아닌 제3국가에서 치러졌다. 일리야가 숨을 거둔 땅이었다. 그가 평생 받아온 협박의 말들에 꼭 끼어있던 시베리아만큼이나 추운지는 몰라도 아주 추운 곳이었다. 그가 죽은 날에도 눈이 내리더니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눈이 내릴 만큼 추웠다. 나폴레옹은 이곳에 도착하여 쌀쌀한 바람을 맞은 이후부터 줄곧 일리야의 얼굴이 희게 질려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일리야는 나고 자란 소련의 추위에 익숙하고 싶지 않아도 익숙했고, 그러면서도 그 추위를 싫어했었다. 나폴레옹은 그걸 보고 겨울을 닮은 자가 겨울을 싫어한다고 농담을 했던 것도 기억했다. 일리야가 생전에 들었던 마지막 농담이 그런 것이 될 줄이야 그도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었다. 어차피 죽음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은가. 나폴레옹은 실없이 웃었다. 그가 죽어본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으레 다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을 봤어.”

 

웨이벌리는 그렇게 말했다. 갓 관 위를 다 덮은 붉은 흙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드물게 지친 티를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것이 지난 몇 년간 함께 전 세계를 떠돌며 일했던 요원 하나를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옆에 있던 이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이 오랫동안 반복되다보면 슬픔은 무뎌지고 지치게 되어있었다. 그러니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웨이벌리는 최선을 다해 솔직한 표현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안경 너머 충혈된 두 눈을 힐끔 보고는 급하게 세운 비석을 보았다. 이름 없는 무덤이 될까봐 두려워서 석공에게 돈을 두 배는 더 얹어주고 최대한 빠르게 구해온 것이었다. 윤이 나는 검은색 대리석 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나리는 하얀 눈송이 위로 둥둥 떠다녔다. 자꾸만 위로 떠오르는 그것들과 달리 마음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나폴레옹은 얼어서 빨개진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에 차오르는 공기가 시려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잠시 눈을 맞으면서 서있던 웨이벌리는 곧 자리를 떴다. 그러자 내내 말없이 있던 가비가 나폴레옹의 주먹 쥔 왼손 위로 따뜻한 손을 겹쳐왔다. 털장갑을 끼고 있던 그녀의 손은 뜨끈한 체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 손을 마주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가비는 그가 손을 맞잡아주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고 가만히 그의 언 손등을 쓸어주기만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지근해졌을 때에야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가비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도착했던 날에 일리야가 골라주었던 짙은 회색의 샤프카를 쓴 그녀는 나폴레옹의 푸른 눈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툭 떨어뜨렸다.

 

가비.”

미안해요.”

 

가비는 얼른 눈물을 닦으면서 나폴레옹의 왼손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왜 사과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비는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이미 눈이 조금 쌓여서 약간 지워진 웨이벌리의 발자국을 따라 가버렸다. 조문객이 세 명밖에 없던 일리야의 조촐하고 쓸쓸한 장례식에 남은 자는 이제 한 명뿐이었다.

 

나폴레옹은 가비가 저만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묘비를 다시 마주하고 섰다. 새로 만들어진 무덤 속에는 일리야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이 있었다. 일리야 쿠리야킨의 무덤. 나폴레옹은 작게 중얼거렸다. 눈이 오는 추운 지역에 쓸쓸하게 혼자 덜렁 있는 무덤이었다. 늘 예상했던 것처럼 참으로 초라한 결말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노라니 초라해도 너무 초라해서 비참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추운 날씨가 계속 되는 곳이었다. 일리야는 죽어서도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겨울 속에 놓여있었다. 겨울을 닮았다고 한 말이 씨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죄책감인가. 나폴레옹은 가비가 나눠준 온기가 벌써 식어가는 왼손을 두꺼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쇠로 만들어져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만져졌다.

 

마카로프 권총. 나폴레옹은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일리야는 이 권총을 임무가 주어진 이후로는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잘 때에도 늘 베개 아래에 총을 두고 잤다. 넓은 침대에서 그의 옆에 함께 누운 이가 있어도 그의 베개 밑에는 항상 마카로프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폐에 박힌 총알 때문에 피거품을 물고 나폴레옹의 품 안에서 죽어갈 때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이 이제 나폴레옹의 손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총신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가 얼른 녹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나는 겨울이 좋다고.”

 

나폴레옹은 마치 일리야가 제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앞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계속 눈을 뿌리고 있는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도록 허연 구름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나폴레옹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콧잔등에 차가운 눈송이가 두어 개 내려앉자마자 녹아내렸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내가 그랬지. 자네는 겨울을 닮았어.”

 

대꾸해줄 이가 없는 말이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묘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이번엔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냈다. 그의 손에는 일리야가 그렇게 아껴마지않던 아버지의 손목시계가 있었다. 갈색의 가죽으로 된 시계 줄에는 검붉은 얼룩이 크게 묻어있었다. 나폴레옹은 시계를 가까이 들고 보았다. 그의 시선은 바늘이 돌아가는 둥근 시계 판보다는 검붉은 얼룩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는 차분하게 숨을 깊이 내쉬면서 얼룩 위를 엄지로 쓸어보다가 반듯한 비석 위에 총을 올려두고 일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찼다. 그리고 손목을 귓가에 대고 째깍거리는 소리를 잠시 들어본 그는 다시 총을 손에 쥐었다.

 

그래서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

 

나폴레옹은 왼쪽 입 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미소를 지었다. 일리야가 좋아했던 미소였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자신이 이렇게 웃을 때 좋다고 말하던 음성을 아직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조금 민망한 듯이 작아졌던 것도, 양 뺨 위로 동그랗게 옅은 홍조가 돌았던 것도, 괜히 시선을 피하던 것도 그는 모두 기억했다.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안타까운 그 모든 것이 나폴레옹의 머릿속에는 다 들어있었다. 그가 아니면 누가 그런 무뚝뚝해 보이는 커다란 러시아 남자의 보기 드문 그런 모습까지 기억하겠는가. 나폴레옹은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납작한 비석의 위를 쓰다듬었다.

 

내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했지. 미안하지만, 일리야, 바보 같은 짓은 나보단 자네가 더 많이 했었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한 번쯤은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해도 되겠지.”

 

검은 비석 위에 쌓인 흰 눈이 손자국을 따라 녹아서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마카로프의 안전장치를 푸는 손끝을 조금 떨었다.

 

지옥에서 보자고, 페릴.”

 

쌓인 새하얀 눈 위로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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