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폴레옹은 언제쯤 일리야의 꾹 다문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고 찌푸린 미간이 반듯하게 펴질지 궁금했다. 지난 여름 로마에서 처음으로 합동 작전을 펼친 이후 반강제로 계속해서 한 팀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 나폴레옹이라고 그다지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팀의 수장이 된 웨이벌리를 제외하고는 아마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일리야는 유난히도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러시아의 차가운 바람을 그대로 몰고 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소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서 살아온 탓에 엉클이 결성된 지 석 달이 넘어가는 동안 적어도 제 할 일만큼은 훌륭하게 해내었고 심지어 모두가 동료라는 인식도 확실히 한 것 같았다. 다만 그의 표정은 도무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일리야가 모두를 그런 표정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활짝 웃거나 소리 내어 웃지는 않지만 일반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나 여성들에게는 꽤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심지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평소에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여느 신사와 다름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 거의 얼이 빠질 정도였다. 일리야가 개비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심지어 그의 그런 모습은 나폴레옹이 사람들을 대할 때 신사의 모습을 꾸미는 것과는 달랐다. 일리야는 오히려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서 익숙한 사람처럼 나폴레옹보다도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게다가 상사가 된 웨이벌리에게마저 묘하게 예의를 차리는 일리야가 왜 동료가 된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는지 나폴레옹은 궁금함과 동시에 약간 부아가 치밀었다. 엉클로 계속 함께 활동할 것을 몰랐던 때에는 비록 서로가 적국의 스파이이긴 해도 힘을 모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과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이 생겼다는 일종의 동질감에 위스키를 나눠 마신 적도 있었다. 그때의 일리야는 꽤나 여유로워 보였고, 나폴레옹이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나폴레옹을 향해 작게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시계를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돌려받은 일리야의 표정이 한순간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나 그 직후에 거짓말같은 섹스를 하면서 달아올랐던 것도 나폴레옹은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일리야가 자신만큼이나 숨기고 있는 것이 많으며 그것을 저에게만큼은 더 이상 단 하나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 느꼈다. 불공평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굴면서 이미 한 번 몸을 섞기도 한 동료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나폴레옹이 지난 밤에 일리야에게서 온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도 그가 느낀 불공평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일리야가 직접 연락하는 일은 흔치 않았음에도 나폴레옹은 피로 내지는 귀찮음을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일리야가 그에게 전화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는 하루종일 거만하고 이기적인 정치인의 비위를 맞추다가 막 숙소로 돌아온 참이었기에 정말로 몸이 천근만근 같았다. 와인을 세 병이나 비우며 시가 연기에 푹 파묻혀 있다 보니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도 지금의 일리야 앞에서는 한낱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웨이벌리는 그저 임무 중에 있을 수 있는 작은 사고라고 했지만, 나폴레옹이 본 일리야의 상태는 처참했다. 얼굴의 반을 덮은 붕대가 얇은 환복 아래의 몸도 절반 정도는 덮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리야에 대한 의사의 소견은 더 처참했다. 몸의 상처가 나을 수는 있겠지만,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거나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아도 거의 짓뭉개졌던 다리를 평생 절고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던 소식이었다. 나폴레옹은 웨이벌리처럼 의사들도 어떤 사실을 일부러 축소하여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은 얼굴로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그리고 일리야가 누워 있는 침대에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먼발치에 서서 생각했다.

 

내가 그때 전화를 받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는 눈을 꾹 감은 채로 자신이 방금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떠올렸는지 자책했다. 그 전화는 긴급할 때에만 쓰였다. 일리야는 웬만한 일로 긴급 전화를 쓰지 않았으므로 분명 저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폴레옹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다. 그러니 나폴레옹이 전화를 받았더라면 일리야가 저렇게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일은 당연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락을 받고 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일리야가 당신한테 전화를 걸지 않았던 건 의외지만, 그 상황에선 정신이 없었겠지.”

 

결국 그 다음으로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가비였다. 그녀는 일리야가 나폴레옹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단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힐끔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가 빨갛게 된 이유가 피곤해서가 아닌 울었기 때문임을 금방 알아채고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너무 위험한 일이었어.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다 그래. 나나 당신이나 일리야보다 위험한 역할을 한 적이 있어? 가장 위험한 순간엔 우리 모두 그의 뒤에 있었지. 저 정도는 충분히 해낼 거라고 여기면서. 웨이벌리도 마찬가지야.”

 

가비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서리며 크기를 키웠다. 나폴레옹은 그쯤에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입을 열었다.

 

가비, 이만.”

난 종종 이 일이 싫어.”

 

나폴레옹의 말허리를 자른 가비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마치 그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눈빛을 피해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붕대가 친친 감긴 일리야의 얼굴을 보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바닥의 타일을 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찬 모든 것이 다 그를 탓하는 것 같았다. 일리야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기계들이 내는 작은 소음마저 나폴레옹의 가슴 속 한 구석을 파고들었다. 나폴레옹은 차마 다시 입을 열 수 없었다. 가비를 달래려고 했던 자신이 너무 오만하게 느껴졌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

 

가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병실의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폴레옹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일리야의 얼굴을 슬쩍 본 그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나폴레옹이 가까이에서 본 일리야는 살짝 노란빛이 도는 조명 아래에서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에 규칙적으로 김이 서리는 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일리야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나폴레옹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눈썹이 길게 뻗쳐 있는 일리야의 한쪽 눈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의 눈동자가 어떤 빛깔이었는지를 떠올렸다.

 

맑은 날의 오후 하늘처럼 옅은 푸른색이었던가? 거기에 밝은 빛이 비치면.’

 

일리야의 눈동자를 그리던 나폴레옹은 침대를 둘러싼 철제 펜스를 저도 모르게 꽉 부여잡았다. 새삼스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일리야가 제게 따뜻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질투한 꼴이었다. 위급할 때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폴레옹이 아니었던가. 나폴레옹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일리야가 그 다음으로 겨우 연락한 이가 가비였다. 그는 어쨌거나 나폴레옹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단 뜻이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일리야가 저를 차갑게 대하긴 해도 동료라고 인식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료 이상의 사이였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한 번 섹스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성적인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혼자서 짝사랑에 빠져 온갖 망상을 하는 어린 소년처럼 굴었던 것이다. 그는 침대의 펜스를 잡고서 조금 비틀거리다가 옆에 놓인 간이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치가 수탈한 예술품을 뒤로 빼돌려서 팔아버리거나 다른 이가 소유했던 귀한 보석들을 훔쳐 달아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 사방에서 그를 짓누름과 동시에 수치스러움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나폴레옹은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일리야를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스스로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힘이 풀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는 그대로 앉아서 일리야를 보고 있어야만 했다. 한참 후에 감정을 추스린 가비가 돌아와서 핏기가 싹 가신 그에게 괜찮으냐고 물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