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 그게….”

 

나폴레옹은 말을 어물쩍거리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현실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일부러 쿠리야킨 가의 저택에서 온갖 소문이 무성한 그림을 훔쳐 내기 위해 러시아까지 홀로 왔으며 그의 인생에서 그가 자신만의 공간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잠시 빌린 집의 거실에서 마치 이곳이 제 집인 양 어떤 남자가 천으로 된 소파 위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져 있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자세로.

 

어제 그게 꿈이 아니란 거야?’

 

소파에 기대어 있는 남자는 분명히 지난 밤에 나폴레옹이 쿠리야킨 저택에서 훔쳐온 그림 속의 남자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입을 살짝 벌리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그의 앞에 그림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소문이 실현되긴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서 걸어 나와 태연하게 집안 곳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는 남자가 그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짧은 환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림 속의 인물이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 여름 밤의 꿈이 새로운 날이 밝고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이어진다면 나폴레옹이 여전히 꿈에 취해 있거나 남자가 실존한다는 뜻이 되었다.

 

사실 나폴레옹은 남자가 환상이 아니길 바라긴 했다. 소문이 단지 소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보다도 살아서 숨쉬는 예술품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제 앞에 우뚝 선 남자와 대면한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의 여신이 무엇 때문에 그림에 불과했던 자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 그가 느꼈을 감정이 나폴레옹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그것은 마치 운명의 계시를 받는 것과 비슷했다. 머릿속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을 지어도 그게 제발 현실이기를 바라게 될 정도의 강력한 계시가 벼락같이 내렸다. 물론 조금 전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간밤의 일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이 아닌 진짜 인간의 형상으로 보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나폴레옹에게 신이 직접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는 그마저 믿지 않으려고 했으니 다만 아쉬움이 남아 있던 것뿐이었다.

 

, 새삼스럽게 놀라운 모양이군.”

 

남자는 몸을 일으켜서 소파에 똑바로 앉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제자리에 붙박인 듯이 서 있던 나폴레옹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 , 어쨌든 좋은 아침.”

 

대답 대신에 돌아온 것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전부였으나, 나폴레옹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식탁 위에 펼쳐져 있는 캔버스로 시선을 옮겼다. 다소 어둡고 탁한 색의 배경이 칠해져 있는 커다란 캔버스는 남자가 앉아 있었던 그림 한가운데의 긴 의자 위를 덩그러니 비워 둔 채였다.

 

이상해.”

 

식탁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바로 앞에 둔 나폴레옹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남자를 어깨너머로 돌아보았다. 남자는 꽤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나폴레옹의 뒤쪽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캔버스의 모퉁이를 보며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해가 뜰 때쯤이면 캔버스가 다시 나를 부르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기미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림으로 돌아갈 때가 지났단 소린가?”

 

나폴레옹의 물음에 남자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옅은 푸른색 눈이 저를 쳐다보자,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숨을 작게 들이켰다. 아직도 화가의 정교한 손놀림이 그려낸 눈동자와 실제로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글쎄, 아직 완전히 늦은 것은 아냐.”

 

남자는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문 쪽을 힐끔 보고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폴레옹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러면 뭐가 문제야?”

무슨 소리지?”

내가 당신이었다면. ,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어쨌거나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림 밖에 나온 지금을 좀 더 즐길 것 같아서. 그림이 부를 때까지.”

 

남자는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나폴레옹을 보았다. 나폴레옹은 어깨를 으쓱이며 오히려 캔버스로 돌아가지 못해 불안해하는 것 같은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남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림에서 나와서 일정 시간을 보낸 다음에 캔버스가 그를 부르면 다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캔버스가 시간이 되었음에도 그를 다시 부르지 않고 있는데, 그가 스스로 그림 속으로 돌아갈 방법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국 캔버스가 부를 때까지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말인데, 그때까지 뭐든지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왜 그가 특별히 신의 가호를 받은 것처럼 그림 밖에 살아났다가 그림 속으로 사라지는지는 몰라도 나폴레옹은 그가 굳이 안달스럽게 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도 멀쩡하게 살 수 있는 몇 시간을 준다고 하면 하고 싶은 일을 수천 가지 넘게 꼽을 텐데 하물며 그림에서 튀어나온 이 남자도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터였다. 특히나 남자가 현실에서 숨쉬도록 만든 간절한 염원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남자 스스로의 것이라면 더더욱.

 

즐긴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보란듯이 나폴레옹의 생각을 받아쳤다. 그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게 빛났다. 마치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 둔 상처를 그대로 내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가만히 그 눈빛을 받아 주었다. 그림이 살아난 경위야 어찌 되었든 200년도 더 되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쿠리야킨 가문이 예로부터 명망 있는 가문이었던 만큼 그 명성을 지키느라 뒤로는 수없이 많은 짓을 했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눈앞에 있는 그림 속 남자의 실제 모델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림이 살아난다는,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간 쿠리야킨 가문이 쌓은 업보의 연장일지도 몰랐다. 나폴레옹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짜 사람처럼 보이긴 해도 일단 남자는 여전히 예술품의 일부였다. 사연이 많이 얽힌 예술품이 더 아름답다는 말에 나폴레옹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림을 훔친 도둑 이전에 작품 자체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좋아.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림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내가 도울 일이 있어?”

저택으로 돌려보내 줘.”

 

나폴레옹의 질문에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나폴레옹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건…. 그래, 좋아. 하지만….”

하지만?”

그 차림으론 안 돼. 그림이 그려진 지 200년도 더 되었다고. 더 이상 사람들은 그런 차림으로 밖을 돌아다니지 않아.”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새삼스레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나폴레옹이 입고 있는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로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남자에게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급한대로 그가 갈아입을 옷가지를 찾아야 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좀 더 치렁치렁한 1800년대 복식을 차려입은 남자를 그대로 길거리로 데리고 나가서 이목을 끌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아까 이름을 물었었지?”

 

커다란 트렁크를 뒤지면서 옷을 여러 벌 꺼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던 나폴레옹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방에 들어온 남자가 벽 한가운데에 크게 걸려 있는 거울을 등지고 서서 나폴레옹을 보고 있었다.

 

그랬었지.”

내 이름은 내 이름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해.”

상관없어.”

 

나폴레옹의 대답에 남자가 어깨를 조금 움찔거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약간 놀란 것 같아서 나폴레옹은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부터 말하지. 나폴레옹 솔로. 특이한 이름이지. 알아.”

아무 말도 안 했다.”

얼굴에 쓰여 있던 걸.”

 

놀리는 말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한 것 같았으나, 나폴레옹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일리야 쿠리야킨.”

일리야.”

 

나폴레옹이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로 200년도 더 전에 죽은 실제 인물의 이름이자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어젯밤에 그림 속 인물이 캔버스 밖으로 살아서 나오는 것을 본 것만큼이나 강렬한 느낌이 또 한 번 나폴레옹을 덮쳐오는 것 같았다. 살다가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두 손가락 안에 꼽히기는 할까. 나폴레옹은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 갓 잡은 양을 바치며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은 아마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