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릴이 이상해졌다.

 

나폴레옹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최근 들어서 미묘하게 혹은 확연하게 달라진 일리야의 행동과 감정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한 지는 일주일째였고, 일리야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2주가 되었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일리야 본인도 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으니 명확히 보이는 이유가 아니라면 옆에서 지켜보는 나폴레옹이라고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는 2년이나 되었고 함께 살기 시작한 지는 이제 막 반 년 차에 접어든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폴레옹이 연인에게 유난히 세심한 편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이 일리야가 달라졌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일주일 동안 행한 관찰의 결과였다. 일리야는 사람들이 장신의 러시아 출신 남자라고 하면 으레 짐작하는 것처럼 무뚝뚝한 표정에 차가운 성격을 가진 남자에 가까운 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나폴레옹에게만큼은 색다른 면고정관념과 다른 진짜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일리야는 그런 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에는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피곤해하고 사소한 것에도 자주 짜증을 냈다. 처음에는 그도 나폴레옹도 그저 임무로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나, 임무가 없어서 쉬는 날에도 피곤해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거의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잠만 자며 침대에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군대에서의 규칙적인 생활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나폴레옹만큼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던 일리야였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설마 말 못할 병에 걸리기라도 했나?’

 

나폴레옹은 약간 핏기가 가신 얼굴을 한 채로 그 자리에 굳었다. 일단 건강이 나빠지면 자연히 피곤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리야는 수족냉증을 앓아서 손발이 늘 찬 편이었는데 요즘에 나폴레옹이 그의 손을 잡으면 예전만큼 차갑지도 않았다. 몸에 열이 나는 것 역시 아플 때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 일리야.”

 

나폴레옹은 때마침 침실에서 나오는 일리야를 불렀다. 일리야는 언제부턴가 일상이 되어버린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막 깨어나 조금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나폴레옹을 보더니 그쪽으로 걸어왔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일리야의 옅은 푸른색 눈이 여전히 흐리멍텅한 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것을 보고 묘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차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침을 두어 번 삼킨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나나?”

무슨 약속?”

 

몸을 약간 나폴레옹 쪽으로 기댈 것처럼 기울인 채로 앉은 일리야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웅얼거렸다. 그는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 하늘로 넘어갈 때까지 자고 난 후에도 여전히 수척하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서로의 건강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던 것.”

그랬지. 그게 왜?”

뭔가 나한테 할 말이 없는지 궁금한데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일리야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폴레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일리야가 몸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가 나폴레옹과의 약속을 깼을 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큰일이었다.

 

모른 척 하지 마.”

뭘 모른 척 하지 말란 거야?”

 

나폴레옹의 눈썹 양 끝이 아래로 축 쳐지는 것을 보며 일리야가 눈을 좀 더 찡그렸다.

 

요즘 이상하게 굴잖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좋아. 하나씩 말해 줘야 하는 거라면 그러지.”

 

어딘가 비장함이 서리기까지 한 말투에 일리야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면서 팔짱을 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잠시 뜸을 들이며 목을 가다듬고는 일리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관찰을 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말해 볼 테니 이의가 있거나 할 말이 있다면 내 말이 끝나고 했으면 해. 첫째로 예전보다 쉽게 피곤해하고 늘 피곤해하고 있어. 둘째로 피로하기 때문인지 잠이 많이 늘었지. 오늘도 방금 전까지 낮잠을 자고 나왔잖아.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나? 오후 2시가 넘었군. 셋째로 몸에 미열이 있는 것 같더군. 그리고 마지막이야.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많이 내더라고. 이외에도 사소한 변화가 있긴 하지만,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이 정도가 될 것 같네. 그러니까 내 결론은.”

 

나폴레옹은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더니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온 단어들에 당황한 일리야의 팔짱이 풀려 무릎에 늘어져 있는 두 손을 슬며시 잡았다.

 

어딘가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 거야.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숨길 만큼 큰 병인지 아닌지는 아직 자네가 말하지 않았으니 아직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말이지. 내 말이 틀렸나? 어때? 일리야, 자네 생각이 뭔지 듣고 싶은데.”

나는.”

 

일리야는 나폴레옹에게 붙잡힌 두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잠시 할 말을 고를 요량인지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에 깔린 카펫만 빤히 쳐다보았다. 나폴레옹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의 마음만큼은 대체 일리야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잔뜩 캐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는 탓이었다. 만약에 나폴레옹의 추측이 맞다면, 일리야도 큰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폴레옹은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 말 것에 불과했다.

 

솔로, 사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일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금방 주저하는 모습에 나폴레옹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일리야의 입에서 그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절대 그를 원망하는 말 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그저 나는, 그러니까 당황스럽군. 나는 멀쩡해. 어딘가 아프거나 한 게 아니라 그냥 좀 피곤한 것뿐이지. 어젯밤에도 조금 무리하지 않았나. 정말로 괜찮으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피곤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네가 말한 그 증상들.”

 

일리야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네게 거짓을 말한 적은 없어.”

하지만 그냥 피곤하다는 것으로 넘기기엔 너무 증상이 오래 가는 것 아닌가? 내가 관찰한 건 일주일이지만 자네가 그런 행동을 한 지는 벌써 2주도 더 지났어. 나도 피곤하면 평소보다 더 잠을 많이 자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지만 그건 일시적인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닌 것이 아니니 그렇지. 지금도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결국 나폴레옹은 말 끝에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들의 직업 특성상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요인은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늘 새로운 임무를 맡을 때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서로가 무사하기를 바랐으며, 이는 굳이 연인이 아닌 동료로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일리야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나폴레옹은 그 지점의 연장선을 끌어다가 앞에 갖다 놓았는데, 일리야는 그것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는 꼴이었다.

 

솔로, 나는 진실만을 말했어.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어줄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자네가 정 그렇다면, 당장 근처에 있는 병원이라도 가지.”

.”

 

일리야는 기가 막혔다. 나폴레옹이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알겠지만, 일리야는 아까부터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다짜고짜 어디가 아픈지 말해 보라고 하질 않나, 그가 한 말을 믿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런 문제로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도 일리야에게는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나폴레옹의 태도까지 영 마뜩찮았다. 일리야도 최근 들어 자신이 쉽게 지치고 지나치게 많이 잠을 잔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임무에 지장이 생기지도 않았고, 일리야가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느끼지도 않았기에 그에게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괜찮다는 일리야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당장에 병원에 가서 몸에 이상이 없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으라고 종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일리야는 어쩐지 서운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나폴레옹의 파란 눈이 오히려 미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일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2년 전에 서로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말할 때만 해도 온갖 사탕발린 말을 다 하더니 벌써 그것을 다 잊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그의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잠깐, 어디 가려고?”

 

다급하게 저를 붙잡으려는 말이 등 뒤로 따라붙었음에도 일리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 침실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얼른 일리야의 팔을 붙잡고 그를 멈춰 세웠다.

 

일리야, 왜 그래?”

그렇게 못 믿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못 믿겠다니,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면 뭐지?”

 

일리야는 잔뜩 화가 났는지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되물었다. 그 기세에 눌린 나폴레옹이 달래듯이 말해도 일리야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근처의 모든 병원이 열려 있을 시간이니 가보면 결단이 나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도 토를 달 거라면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침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린 일리야의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니 그가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아서 나폴레옹은 더 이상 그를 쫓아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한숨을 푹 내쉬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무엇이 일리야를 저토록 화나게 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일리야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것도 아니거니와 그는 그저 일리야를 걱정을 한 게 다였다.

 

대체 일리야가 저러는 이유가 뭐지?

 

나폴레옹은 그에 대한 답을 병원에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