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와 나폴레옹은 호텔로 돌아와서 각자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곗바늘은 거의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레미의 저택을 나서면서 만났던 여자의 모습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 있는 탓이었다. 이미 제레미가 몇 시간에 걸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인 사실은 그들의 머릿속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여자의 첫 인상은 마치 늘씬한 검은 재규어를 코앞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까만 벨벳드레스를 입고 패션쇼의 쭉 뻗은 무대 위에 선 것처럼 당당하게 걷던 여자는 어딘가 로마의 빅토리아 빈치구에라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가비와 나폴레옹은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가비는 몇 시간 동안 발을 괴롭혔을 구두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그대로 다리를 뻗고 앉아서는 한 손으로 머리를 계속 쓸어 넘겼다. 그녀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조금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자선 행사에 가기 전 약 한 시간 동안 공들여서 손질했던 그녀의 짧은 밤색 머리카락이 금세 차르르 흩어졌다. 나폴레옹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가비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침대 위로 풀썩 누워 버렸다. 어두운 색의 정장이 푹신한 이불에 묻혀서 구겨지는 것도 지금 그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미색의 벽지가 발린 천장에 붉은 입술의 끝을 위로 부드럽게 끌어올리던 여자의 흰 얼굴을 둥둥 띄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레미의 얼굴을 떠올린 그는 곧 그 두 얼굴에 어떤 공통점이 있나 찾아 보았다. 어쩌면 정보기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제레미가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숨기고 있었던 딸이라도 될지 몰랐다. 하지만 곧 나폴레옹은 두 얼굴 사이에 닮은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공중에 팔을 휘저어 얼굴들을 지웠다.


이상해. 그 여자 대체 누굴까?


가비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폴레옹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팔을 내렸다.


펠레티에의 정부라던가 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우리가 몰랐을 리 없을 여자지. 그래도 웨이벌리에게 보고해야 할 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아?

퍽이나.


가비는 톡 쏘는 것처럼 말을 하고는 구두를 벗어서 침대 아래로 던졌다. 흰색의 굽이 낮은 단화가 짙푸른 색의 카펫 위를 마구 뒹굴었다. 그녀는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다가 조그만 보석이 박힌 귀고리와 목걸이도 벗어서 탁자 위에 대충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드레스를 입은 그대로 나폴레옹처럼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여러모로 그때가 생각나.


그녀가 피로에 충혈된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 나폴레옹은 말없이 침대 아래로 늘어뜨린 양 다리만을 달랑거리며 그녀가 지칭한 그때에 대해 생각했다. 장화 형태의 땅덩어리 한가운데에 위치한 로마에는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이 모든 것을 달구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도시에서 엉클은 이미 결성되었으되 결성되지 않은 채로 빈치구에라 일가의 음모를 막아냈고, 세계는 언뜻 평화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 눈속임 같은 평화는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에 세계 종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몸을 섞은 나폴레옹과 일리야 덕분에 호흡을 한 번 고를 수 있는 찰나의 순간만큼만 더 시간을 벌었을 뿐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었지.

무슨 뜻이야?


나폴레옹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던 것을 멈추고 상체를 일으켜서 앉았다. 가비가 고개만 돌려서 그를 보았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오른쪽 눈가를 문질렀다.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는 소리.

 

∴∵∵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폴레옹은 약간 부은 눈두덩을 문지르면서 손으로 더듬더듬 전화기부터 찾았다. 간밤에 아무렇게나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속옷차림으로 잠을 잤던 그는 침대 옆에 있던 가운만 대충 걸친 채였다. 그는 인상을 마구 찌푸린 채로 겨울의 해가 벌써 커튼 사이로 빛을 드리우는 것을 보다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어제 저택에서 와인 두 병 반을 깨끗하게 비운 사람은 제레미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대신 숙취를 겪는 것처럼 두통이 느껴졌다. 전화기가 있는 화장대에 잠시 몸을 기대면서 차가운 거울에 이마를 갖다 대니 조금 나은 것도 같았다. 나폴레옹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고작 이 정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체질은 결코 아니었는데 이번 임무는 하여간 그에게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추억을 선사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거울을 통해서 저편에 이불이 불룩하게 위로 튀어나와 있는 침대를 건너다보니, 파투 드레스를 입은 그대로 누워서 잠들었던 가비가 여전히 이불 속에 폭 파묻혀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제레미의 비위를 맞추느라 피곤한 것은 비단 나폴레옹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수화기를 들고 호텔 직원에게 웨이벌리의 방으로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는 인상을 확 찌푸리고 말았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형편없게 쩍쩍 갈라졌다. 억지로 목을 가다듬어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최악이군.


침을 모아 삼키면서 그는 저쪽에 있는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웨이벌리가 조금 늦게 전화를 받는다면 가서 물병을 들고 올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화가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웨이벌리는 신호음이 채 두 번도 울리지 않았을 때에 전화를 받았다. 산뜻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리자마자 나폴레옹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괜히 심술이 나서 나폴레옹은 웨이벌리가 인사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레미가 이번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말부터 대뜸 꺼냈다.


펠레티에가 유리 아포닌을 납치했다거나 사설탐정에게 제니퍼 카터를 따라다니도록 사주했다거나 하는 것은 직접 만나 보니 터무니없는 것 같더군요. 금고나 장부 같은 걸 뒤져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아니에요. 이건 제 독단적인 생각도 아닙니다. 가비도 동의했어요.

-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다르….


단호한 목소리로 어제 있었던 일의 결론을 말한 나폴레옹은 웨이벌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말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고 얼른 이어서 진짜 본론을 던졌다.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아 있습니다. 그 여자.

-그 여자?

그래요, 그 여자. 펠레티에와 만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여자가 있었어요. 짙은 갈색머리, 밝은 하늘색 눈동자에 아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는데 펠레티에와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왜 우리는 몰랐죠?


웨이벌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가 실수를 인정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 침묵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여자, 한눈에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어요.


나폴레옹은 웨이벌리가 모를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투로, 그리고 조금은 그를 비난하는 것 같은 투로 말했다.


-유감이지만, 자네가 잊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군. 나도 실수는 할 줄 안다네. 나도 인간이거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지.

농담이 아주 재미있군요.

-아니, 진심일세. 그리고 화를 낼 거면 차라리 찾아와서 하는 게 어때?

그러니까 전혀 몰랐단 말씀이시군요.


웨이벌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인내심 있게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짙은 갈색머리에 시릴 것 같은 푸른 눈을 가진 여자. 그래, 제니퍼가 언급한 적이 있어. 기억이 나는군.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서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파리에서 어떤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어. 누가 봐도 아주 매혹적이고 아름다워서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진으로 봐도 그래 보였지. 제니퍼는 우연히 그녀를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고 했고, 그 후로는 여자를 본 적도 없다고 했지. 그 여자의 이름이…. 저베즈, 저베즈 라벨.

농담이란 말은 취소하죠.

-여전히 비아냥대는 투인데. 이 나이에도 스쳐간 이야기를 이 정도로 기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만.

어쨌든 신중을 기해야 했어요.

-변명은 않겠어.


나폴레옹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니까 저베즈 라벨이라는 여자는 이미 제니퍼의 주위에 나타난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는 순전히 우연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숫제 제레미 펠레티에와 깊은 관계에 놓인 묘령의 여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더 이상 우연으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 일에 어떻게 엮여 있으며 제레미와는 어떤 사이란 말인가. 나폴레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를 통해 그가 내뱉은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아직 수수께끼가 풀리려면 더 많은 실마리들이 필요했다.


펠레티에가 결백하다는 결론을 좀 더 미뤄두죠. 그를 좀 더 이용해야겠어요. 저베즈 라벨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고요.

-알겠네.


나폴레옹은 대답을 듣자마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결국 웨이벌리는 그 여자에 대해 미리 알고서도 그냥 넘어갔던 것이었다. 그도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다 알고 대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했다. 다행히도 저베즈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고 단지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이지만, 만약에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정보의 부재로 인해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 나폴레옹은 단연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스파이란 그렇게 멋지고 훌륭한 일이 아니었다. 곳곳에 적이 도사리고 있기에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으며 어둠 속에 숨어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가 습관처럼 남은 형량을 세는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에이드리언의 말마따나 감옥에 처박혀서 썩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삶인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가끔 자신이 CIA행을 택한 것이 옳았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울적해지는 기분이었다.


솔로.


나폴레옹은 거울을 통해 가비를 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자색의 가운을 어깨 위에 걸치고 무릎을 모아서 품에 껴안은 채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는 걸로 보아서 그녀가 깨어난 지도 조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자신이 웨이벌리와 통화하는 것을 들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원점이야.


그는 최대한 한탄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저베즈 라벨이라고? 웨이벌리마저 전혀 몰랐던 것보단 낫네.

긍정적인데.

빅토리아 빈치구에라가 부활하기라도 한 줄 알았거든.


그 말에 나폴레옹은 손에 힘을 풀면서 피식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러자 가비는 짐짓 정색을 하고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웃을 일 아냐. 난 정말로 그 여자가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줄 알았다고.

부활의 기적은 약 2천년 전에 이미 신의 아들이 써먹은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틀렸나?

전 세계의 인구가 몇 명인데 2천년 동안 겨우 한 번이 다야? 너무한걸. 인간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신이라더니. 내가 이래서 신을 안 믿는다니까.

농담이 늘었어.


가비는 여전히 거울 속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얼굴 좀 펴.


그제야 나폴레옹은 가비가 자신을 달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끔은 서툴러 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던 그였는데 언제부터 그녀에게 위로를 받을 정도로 벽이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면서 뒤로 돌아서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보는 가비의 표정은 꼭 베오그라드에서 먼저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그를 보던 일리야의 표정과 겹쳐졌다.


나폴레옹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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