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가운데가 썩둑 잘린 가지에 완전히 이질적인 다른 종의 나뭇가지를 접붙인 것과 비슷했다. 강제로 잘린 가지는 아주 여리고 나약하면서도 아름다웠기에 처절했고, 그에 반해 접붙인 가지는 단단하고 강했지만 흉물스러웠다.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접붙이기였다. 일리야가 보기에도 두 가지가 그렇게 붙어서 공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절로 따뜻함을 품게 만들던 기억들이 어떻게 한순간에 산산이 조각나고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이어진단 말인가? 무지개처럼 갖가지 색깔로 빛나는 세계에서 살던 일리야가 왜 붉은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흑백의 세계로 넘어가게 될 수밖에 없었나?

일리야는 자신의 11살 생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그 어느 날의 일이 쿠리야킨 가문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흉측한 뿌리를 깊게 박아 넣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그 당시를 아주 단편적인 이미지들로만 기억했다. 가령 이젠 잊어버린 아버지와의 약속, 칙칙한 카키색의 제복, 흰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 그를 끌고 가는 억센 손 같은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그것들을 생각하면 일리야는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팠다. 예전에 그의 정신을 감정했던 의사의 말에 따르면, 메스꺼움과 두통은 일리야의 몸이 일종의 거부감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 말에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난 기억들이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현실을 압도하고 그의 정신을 유린한 기간이 자그마치 반 년이었다. 그리고 그가 결국 포기하고 굴복하는 법을 배웠을 때쯤에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만큼 그녀의 상대는 자주 바뀌었고, 그녀는 또다시 괴로워했다.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내린 이는 일리야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가 지독하게 분개해 보았자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억!”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헛숨을 들이킨 일리야가 눈을 크게 홉뜨더니 심하게 몸을 벌벌 떨었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임에도 그는 과거 한겨울의 시베리아 벌판에서 헐벗은 채로 노역을 하던 때에나 느꼈던 살을 에는 한기를 느끼고 될 수 있는 한 몸을 둥글게 말고 전신의 근육을 잘게 떨었다.

이런 꼴이란.”

올렉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바닥에서 웅크리고 떠는 일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고문에 버티고 버티다가 쓰러져 버린 일리야에게 끼얹은 얼음물이 퍽 차가웠는데도 퍼뜩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전기충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른 몸을 파들파들 떨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련해 보이기는 했다. 그래서 얼음물을 다시 끼얹으려고 하는 이들을 제지한 올렉이 친히 제 구둣발로 일리야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지만, 일리야는 뱃속의 태아처럼 긴 몸을 한껏 접어서 더 웅크리기만 했다. 올렉은 혀를 찼다. 그가 여태껏 보아 온 이들 중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굳게 입을 다물고 끝까지 버티던 자는 수없이 많았다. 그들이 그렇게 버티는 이유는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 중 몇몇은 제 목숨을 잃어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몇몇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는데 그래서 입을 연 자들이 살았는가 하면 절대로 아니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배신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인정하고 아는 대로 말한 다음 최대한 빨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배신자들에게는 최적의 선택지였다.

미련하긴.”

허옇게 질린 일리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올렉이 중얼거렸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폐포 하나하나에 담배연기를 모두 채우려는 것처럼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곧 하얀 연기를 내뿜고는 일리야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흰 연기가 그의 머리 위에 매달린 전등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솔직히 올렉은 일리야가 이런 꼴이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수용소에서 데려온 날부터 그가 일리야를 마치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을 위해 굴러가는 잘 제련된 태엽 하나쯤으로 여기긴 했으나, 반쯤 정신이 나간 창녀가 된 어미와 스탈린의 계략으로 누명을 뒤집어쓴 아비를 생각하면 일리야에게는 그 정도 취급도 과분한 것이었다. 올렉,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수용소에서 굴러먹던 어린 남자애를 데려와 KGB의 최고 요원으로 키운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시궁창에 빠진 일리야를 구해준 구원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구실을 할 기회를 준 일종의 독지가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리야가 무슨 이유로 지난 몇 달을 숨어서 살았는지 올렉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품은 순간부터 일리야는 올렉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니콜라이 쿠리야킨처럼.

올렉은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고는 무릎을 굽혀 일리야의 머리맡에 엉거주춤하게 섰다. 그러고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일리야의 물에 젖어 창백한 뺨을 세게 내려쳤다. 그러나 일리야가 얼른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철썩하는 소리가 여러 번 더 공간을 울렸다.

일리야는 추위에 질렸던 뺨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화끈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몸을 벌벌 떨던 것을 멈추고 축 늘어지더니 곧 천천히 눈을 떴다. 경련하는 눈꺼풀을 억지로 움직여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자신이 고문을 받다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전에 멍하니 자기가 어디에 있고 지금이 몇 시일지 생각했다. 20년을 스파이로 살면서 본능처럼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지만 곧 흐릿했던 시야가 조금씩 맑아지고 뺨에서 홧홧한 통증이 느껴지자 그는 지금 자신이 그런 스파이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드디어, 쿠리야킨.”

일리야는 올렉의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머리 위에서 비치는 빛을 가리고 일리야를 내려다보느라 올렉의 얼굴은 그림자가 짙게 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리야는 이상하게 올렉이 한쪽 눈만 찡그리며 비릿하게 웃고 있다는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올렉이 그런 식으로 웃을 때면 항상 좋지 않은 일이 따랐다. 그리고 일리야는 제게 닥칠 더 나쁜 상황이 한 가지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지.”

 

 

❄❄❄

 

 

가비가 전해준 웨이벌리의 정보는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모든 증거가 무서울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지며 일리야가 프라하에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했다. 갑자기 프라하로 행차했다는 올렉은 근 나흘 간 지켜본 결과 KGB의 지부 건물에서 하루 평균 6시간 이상을 보내면서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 인물에게 부착한 도청기로 엿들은 결과 KGB에서 일리야를 생포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번 제보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라하 외곽에 있는 작은 여관의 주인도 일리야의 사진을 보고 실종된 투숙객이 맞다고 증언했다. 그 외에도 채 지워지지 않은 일리야의 흔적이 프라하 시내의 몇몇 장소에서 발견되면서 이번에도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일리야가 마침내 가까이에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매번 일리야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만 쫓다가 드디어 그 실체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조금 멍한 기분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긴장돼?”

나폴레옹은 대답하지 않고 가비를 돌아보았다. 가비는 침대 위에 길쭉한 트렁크를 올려놓고 자신의 몸만큼이나 긴 저격용 소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걱정 마. 잘 될 거니까.”

그래.”

나폴레옹은 약간 힘이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가비가 소총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그리고 나 저격에 꽤 소질 있거든.”

가비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 나름대로 나폴레옹을 위로하며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자 가비도 미소를 지었다.

그거 돌려줘야지. 웃으면서.”

나폴레옹은 가비가 가리키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일리야가 남겨두고 간 손목시계는 고장이 나는 법도 없이 지난 수 개월 동안 야속하게도 흘러만 가는 시간을 따라 째깍거렸다. 나폴레옹의 시간은 일리야가 떠난 그날부터 멈춰 있었음에도.

그래야지.”

솔로.”

시계의 둥근 유리알을 쓰다듬던 나폴레옹이 가비의 부름에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가비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비장함마저 서린 것 같은 가비의 목소리에 나폴레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다가 운이 나쁘게도 KGB에 잡혀 버린 일리야나 그를 구하기 위해 모인 나폴레옹과 가비에게도 다시는 지금과 같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일리야가 러시아로 송환된 이후에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거의 0에 수렴했다. 애초에 올렉보다 엉클 측이 먼저 일리야의 소재를 파악했더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가정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으며 그저 단순한 후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장 최선의 방법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고마워.”

나폴레옹이 조금 망설이다가 내뱉은 말에 가비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더니 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소총이 든 트렁크 옆에 놓인 다른 트렁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감사 인사에 오히려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나폴레옹도 덩달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비?”

가비는 트렁크를 뒤지던 것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아니, 굳이 하지 않아도 돼. 벌써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말끝을 흐린 가비가 다시 나폴레옹을 돌아보았다.

일리야는 내 동료이기도 하니까. 당신이 내 동료인 것처럼.”






+쩜오온에 나올 솔로일리야 On the ice 책 원고 퇴고본 일부

'ARCHIVE > THE MAN FROM UNC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솔리야] The THRUSH Affair 8  (0) 2016.10.04
[솔리야] 미스터 갈라테이아 1  (0) 2016.09.05
[솔리야] Before he comes  (0) 2016.07.01
[솔리야] On the ice 2 퇴고본  (0) 2016.06.29
[솔리야] On the Ice 1 퇴고본  (0) 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