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


나폴레옹은 눈을 번쩍 뜨고 온몸을 파드득거리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거칠게 호흡하는 꼴이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 같았다. 폐부에 곧장 들어오는 공기가 날카롭게 잘 벼린 칼날 같아서 기도가 아린 느낌까지 들어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모든 것이 깜깜한 암흑인 것을 깨닫고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해도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꼭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금방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과도 같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양손으로 눈을 마구 비비며 뒤죽박죽인 머릿속도 한참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문득 두 손을 내려놓은 그는 손끝에 닿은 차가운 바닥에 흠칫 몸을 떨고서야 한층 진정된 숨소리를 냈다. 부산스럽던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도 빠르게 정리되었다. 가스 유출 사고 소식이 실려 있던 신문에서부터 피닉스의 연구소에 들어와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모든 상황이 영사기를 돌린 것처럼 금세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폴레옹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 몸싸움 중에 가죽 장갑이 몽땅 벗겨진 두 손에는 미지근한 뺨이 닿았다. 자비로운 공격자가 그를 살려둔 것도 모자라 방독면까지 벗겨 둔 것이었다. 그는 한숨이 폭 나오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강한 힘으로 압박되었던 목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 아픈 것이 보지 않아도 목 주변에 멍이 들고 부어 있을 것이 뻔했다. 침을 삼킬 때도 목이 조금 깔깔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보아도 한심하게 보일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지만, 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것으로 밀려오는 각종 감정들을 다스려서 갈무리했다.


적어도 살아 있는 게 중요하지.


나폴레옹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평소보다 낮고 이상한 자신의 목소리에 목까지 감싼 검은색 티셔츠 위로 아픈 부위를 살짝 건드려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손으로 옷 위를 누르자 다친 부위가 어릿거린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목에서 손을 떼고는 옆으로 더듬어서 단단한 철제 책상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비가 걱정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를 공격한 침입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그는 가비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이 연구실에서 뭔가를 더 알아내기도 힘들었다. 나폴레옹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카우보이.


그리고 그가 문을 향해 한 걸음을 떼었을 때 연구실 안쪽에서 갑자기 환한 불빛이 켜지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폴레옹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목소리가 흘러나온 쪽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이 부시지 않도록 배려라도 하는 양 옆으로 빗겨 가서 벽을 향해 퍼지는 둥근 빛이 그의 푸른색 눈동자 속 동공을 좁히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조그만 손전등 주위로 퍼지는 빛에 길쭉한 몸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몸을 따라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음영이 진 얼굴에 다다랐다.


일리야?


나폴레옹의 입에서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운데 음절의 끝이 조금 이상하게 비틀린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일리야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여긴 어떻게…?


나폴레옹은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럽고 또 기쁘기도 하여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일리야를 쳐다보다 보며 속삭이듯이 질문했다. 하지만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맞받기만 했다. 아래에서부터 비스듬하게 비치는 불빛에 그의 눈동자가 잿빛을 띠었다. 그 유리알 같은 눈을 보면서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인지, 저를 어떻게 찾은 건지 하는 온갖 질문들이 우후죽순처럼 마구잡이로 제 머릿속을 순식간에 장악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무엇부터 질문해야 하는 것인지 정하기가 어려울 지경에 다다를 동안에 일리야는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눈동자만 바삐 움직여서 나폴레옹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괜찮나?


일리야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나폴레옹은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얼른 저만치 밀어 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목이 좀 아프긴 하지만.


여전히 조금 부어 있는 그의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오자 곧장 일리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 곧 나을 텐데.

멍이 금방 빠지진 않을 거다.

그거야 어쩔 수 없….


나폴레옹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이번에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목이 아픈 것은 그가 방금 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에 멍이 들었다거나 왜 목이 아픈지에 대해서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페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일리야를 보았다. 다시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질문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을 집어냈다. 바로 일리야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뒤늦게 엉클의 임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도 웨이벌리가 나폴레옹과 가비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일리야가 KGB의 요원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라면 조금 더 말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말이 되고도 남았다. 나폴레옹이 괴한에게 당하고 쓰러진 것을 일리야가 나중에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연구실에 잠입해 있다가 나폴레옹을 맞닥뜨리고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면?


나폴레옹은 무의식적으로 까만 천에 감싸인 제 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어느새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는 일리야를 다시 불렀다.


일리야.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둥근 뺨 위로 턱 근육이 살짝 도드라지며 얼굴에 생긴 그림자가 조금 달라졌다. 그걸 보며 나폴레옹은 그가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스가 누출됐다는 것이 다 쇼에 불과할 줄 몰랐지. 방독면 같은 걸 쓰고 있자니 답답하긴 하더군.


나폴레옹이 짐짓 가볍게 말해도 일리야는 그를 한 번 힐끔 보기만 하고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겁에 질린 것 같아서 나폴레옹은 할 말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흔치는 않아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저를 타이르는 말에 일리야는 대꾸를 하려다가 말고 아래로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따라 아래로 시선을 내린 나폴레옹은 손전등을 잡고 있는 일리야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에 벽에 비치는 밝은 빛이 경박스럽게 춤을 추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으로 일리야가 손을 떨었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으나 그게 언제였는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아는 한, 일리야는 꽤 한참 전부터 손을 떨지 않았었다. 나폴레옹은 아마도 일리야가 꽤 안정을 찾아서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겉으로도 일리야는 예전에 비해서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안정되어 보였다. 본디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해도 굳이 그것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삶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나폴레옹도 그걸 알기에 일리야의 트라우마를 구태여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순간에 그 노력이 날아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일리야는 오랜만에 겪는 일에 당황하고 말았다. 전에는 떨림을 멈추려고 어떻게 했었는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일단 무작정 손에 힘을 주었더니 오히려 팔 근육 전체가 파르르 떨리면서 손전등이 더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는 완전히 표정을 굳힌 채로 떨리는 자신의 팔을 남의 것처럼 멍하니 보았다.


일류샤.


일리야가 홀로 당황하여 고군분투하는 것을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층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애칭을 불렀다.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나폴레옹은 천천히 발음하면서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그가 바로 코앞까지 가까이 붙어서 서도 일리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나폴레옹은 어찌 할지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오른손으로 일리야의 왼뺨을 감쌌다. 그리하여도 굳어 있던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손에 약간 힘을 주어 고개를 들게 하자 다행히도 순순히 손길을 따랐다. 드디어 둘의 시선이 아주 가까이에서 맞닿고, 나폴레옹은 미소를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만을 눈에 오롯이 담고 있었다.


두 달 만이네.

미안하다.


일리야는 약간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나폴레옹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말 더 이상은 하게 하지 말았으면 해. 여긴 어둡고,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 서로 여기서 마주칠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도 못 했었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어쨌든 나는 멀쩡히 살아 있잖아. 베를린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나? 꼭 그때가 떠오르던데.


나폴레옹이 일부러 곰살궂게 하는 말에도 일리야는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얼굴을 좀체 풀지 못했다. 그의 손도 계속해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목숨의 위협 정도야 그들의 일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자, 상대가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리야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가 차마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것은 오직 그와 나폴레옹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아직 장갑이 벗겨지지 않은 왼손으로 바르르 떠는 일리야의 오른손을 더듬어서 잡았다. 매끈한 가죽이 차가운 손에 닿자 움찔거리는 일리야를 나폴레옹은 아이를 어르듯이 쉬쉬 소리를 내며 달랬다. 그래도 얼음장 같이 차고 길쭉한 손가락들이 금방 체온을 되찾지 못하자, 그는 결국 일리야가 여태 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빼서 뒤쪽의 실험대 위에 대충 올려 두고는 자신의 왼손에서 장갑까지 벗고 온전히 자신의 체온으로 일리야의 양손을 데우기 시작했다.


임무가 있어.

알아.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있겠지.


스무 개의 손가락들이 서로 얽혀서 꼼지락거리다가 곧 깍지를 끼며 단단히 맞물렸다. 일리야는 아직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멎을 것이 분명했다. 나폴레옹은 엄지를 좌우로 움직여서 맞잡은 손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나 역시 그렇고. 이미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솔로, 나는….

긴 대화는 이따가 하기로 하지.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던 것을 그만두고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보고 싶었어.


볼록하게 튀어나온 턱 위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나폴레옹이 작게 속삭였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살결을 간지럽게 스치고 지나가고, 일리야는 몸을 살짝 떨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틈새만 남기고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 두 쌍에 같은 감정이 차오르고, 그 순간이 일리야는 너무 견디기 벅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눈을 감아 버린 그의 입술 위로 나폴레옹의 입술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