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급격하게 추워져만 갔다. 12월이 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보스턴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쏟을 것처럼 맑은 부분을 찾을 수 없이 우중충했다. 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는 위도가 높은 것에 비해 기온이 높은 편이어서 눈으로 덮이는 일이 잘 없었다. 그 대신에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칼날로 살을 저미는 것처럼 날카로워서 거리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무색하게도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간혹 거리를 걷는 이들은 갑옷처럼 두꺼운 외투를 입고 앞섶을 꼭 여민 채였고 표정도 잔뜩 굳어 있었다.


겨울의 밤공기는 유난히도 더 추운 법이기에 가비는 밝은 황토색의 털이 잔뜩 달린 모피를 몸에 칭칭 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보스턴의 겨울 날씨가 보기보다 온화하다고는 해도 그녀는 거의 평생을 살았던 독일에서도 새로운 거처가 된 영국에서도 이렇게 추운 날씨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털 뭉치처럼 처박혀 있는 차 안은 불행히도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히터가 고장 난 덕분에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바깥과 기온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비는 짜증스럽게 이미 잘 여민 앞섶을 장갑을 낀 손으로 붙들어 다시 여미고는 허리를 약간 숙여서 유리창으로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폴레옹이 어둠에 스며들 것처럼 까만 작업복을 입고 피닉스의 연구소로 들어간 지 벌써 30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자선 행사 이후에 제레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자마자 가비가 가짜 사업 관련 서류들을 모아서 피닉스에 전달했지만, 행사가 끝나고 근 일주일이 다 될 때까지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폴레옹이 제레미에게 연락했을 때에도 유난히 싹싹한 목소리의 비서가 그는 너무 바빠 따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답변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래도 가비와 나폴레옹은 제레미가 그들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유보했다. 아무래도 제레미의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저베즈 라벨이라는 여자의 존재가 이 일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직은 알 수 없었기에 신중해야 했다. 가비와 나폴레옹은 상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그리던 오늘 아침에 드디어 보스턴 글로브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펠레티에, 미모의 여인과의 스캔들


굵게 포인트를 준 제목 아래에 점점이 인쇄된 사진 속에는 자동차에 함께 타고 있는 제레미와 저베즈가 있었다. 가비는 그것을 보고 눈을 굴렸다. 기사 내용은 갑자기 나타난 프랑스 출신이라고 알려진 여성과 제레미가 최근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에 더해서 두 사람이 사업 파트너가 될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덧붙어 있었다. 너무나 전형적인 수였다.


하지만 가비가 그 기사를 보여주었을 때 나폴레옹은 전혀 다른 기사에 반응했다. 스캔들 기사 아래에 조그맣게 실린 소식은 어젯밤에 피닉스의 연구소에서 가스가 유출되는 작은 사고가 있었으며 그 사고로 인해 연구원 한 명이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외상이 없어 금방 귀가했다는 내용이었다. 가비의 의아한 표정에 수트케이스를 열어서 작업복과 장난감들을 늘어놓던 나폴레옹이 그녀를 힐끔 보면서 말했다.


유리 아포닌의 주 연구 분야가 가스였다고 했지. 피닉스의 연구소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고.

그럼 아포닌이 저 연구소에서 일종의 가스 실험이라도 했을 거라는 말이야?

글쎄, 그가 저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스 유출 사고야. 까딱하면 아주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고. 아무리 연구원 한 명으로 끝났다고는 해도 말이지.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폴레옹의 말에 가비가 다시 신문 기사를 빠르게 훑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연구원도 이상해. 정신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으나 외상이 없어 금방 귀가했다.고 하는 이 구절. 이 사람 혼자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건가? 이런 데서? 무기 회사의 연구소에서 혼자 가스 연구를 한다? 무기 회사의 연구소에서 가스를? 혹시 그들이 가스를 무기화 하려는 건가?


가비가 거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나폴레옹은 대답하지 않고 돌돌 말린 가죽 안에 싸인 장비들을 확인하고 다시 정리한 다음에 옆에 내놓은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연구소에 가 봐야지.

 

∴∵∴

 

피닉스의 연구소는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넓었다. 축구장 하나가 다 들어갈 것처럼 넓은 연구소는 실험 목적에 따라 철저하게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구비되어 있는 장비들만 해도 가히 엄청 났다. 실험실마다 필요한 실험 도구들이 빠짐없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무엇이든 연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건물의 입구 바깥에서부터 삼중으로 된 보안 시설을 통과해야 했고, 수시로 건물 주위를 돌아다니는 경비원을 피해 입구까지 무사히 가더라도 은행의 금고처럼 단단히 잠긴 문을 열어야 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몇 가지 재료만 구하면 누구든지 만들 수 있는 소형 폭탄에서부터 첨단기술을 집약하여 만든 대량 살상 무기까지 제조하는 피닉스에서 가장 철저한 보안을 자랑하는 곳다웠다. 그럼에도 천하의 나폴레옹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없었다. 그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은밀하고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만으로 손쉽게 연구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구소 건물 내에는 최소한의 불이 밝혀져 있었다. 지난밤 가스 유출 사고가 있었던 연구실은 건물 지하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연구소 전체의 환기 시설이 여전히 가동 중이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도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 아주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구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괜히 공기가 텁텁한 듯하여 나폴레옹은 얼른 방독면을 찾아서 썼다. 그리고 희미한 전깃불에 의지하여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정체 모를 어떤 가스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김장감에 방독면을 거치는 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게 들렸다. 그것이 나폴레옹 스스로도 조금 거슬렸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연구소 지하는 온통 깜깜해서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손전등을 꺼내 들고 좌우로 빛을 비추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유난히 넓어 보이던 위층에 비해 지하 공간은 그리 넓지 않은 듯했다. 건물 전체에 보안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지상에서보다 지하에서 더 은밀한 연구가 가능한 탓에 더 많은 장비와 실험도구들로 가득한 연구실이 길게 뻗은 복도가 좁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탓이었다. 조그만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이는 실험실 안의 진열장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다양한 크기의 비커와 플라스크 같은 것들 외에도 포르말린에 담긴 생물체 표본이 많았다. 어딘가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찍찍대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실험용으로 쓰이는 쥐들도 보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어릴 때에도 이런 짓을 하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꼭 학교마다 떠도는 무서운 전설을 직접 확인해보겠답시고 밤중에 몰래 학교에 숨어든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복도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선 똑같이 생긴 문들이 교실의 미닫이 문처럼 징그럽게 느껴질 즈음이 되어서야 마침내 나폴레옹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작은 유리창이 달린 문을 앞에 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손전등의 동그란 불빛을 손잡이에 비추며 그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철제 손잡이를 잡고 밀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온 연구소를 비워두고 환기 시설까지 가동한 것이 우습게도 정작 가스 유출이 일어난 작은 공간은 박제하듯이 문을 닫아걸어 놓은 것이었다.


가스 유출 사고는 그냥 쇼였나?


나폴레옹은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손전등으로 문에 난 유리창을 통해 연구실 안을 비추어 보았다. 별로 크지 않은 연구실 내부에는 가운데에 놓인 책상 위에 실험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동그란 의자가 하나 넘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무언가 일이 벌어졌던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문이 닫혀서 잠겨 있기까지 한 것은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폴레옹은 깜깜한 복도로 불빛을 비추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 끝 천장에 감시카메라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는데, 감시카메라는 작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연구실 문을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며 철제 문손잡이를 노려보았다. 어쨌거나 뭐든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문을 열어야 했다.


한숨을 쉬듯이 길게 숨을 내뱉은 나폴레옹은 곧 결심하고 장난감 뭉치에서 얇고 긴 도구 두 개를 꺼내어 순식간에 잠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우선 가운데에 놓인 책상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러자 책상 위에 늘어선 크고 작은 비커 두세 개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액이 담긴 시험관 몇 개가 손전등의 불빛에 반짝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시선을 끈 것은 유리병들 옆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종이 몇 장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종이들 중 한 장을 집어서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종이에는 인쇄된 활자들 위로 누군가가 손으로 쓴 메모들이 여백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연구 자료임에 틀림없었다. 잠시 자료를 읽어 보던 나폴레옹은 자료의 저자가 어떤 가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불현듯 느껴진 인기척에 옆으로 재빨리 돌아서며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부터 잠깐 동안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뇌에 과부하라도 걸린 것처럼 이미 한 박자 늦게 겨우 대강의 상황을 알아채는 것이 다였다. 일단 그는 뭔가 커다란 것이 달려들며 자신의 손에서 손전등을 쳐내고 몸을 뒤로 넘어뜨렸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뒤로 쓰러지면서 유리로 된 실험 도구들 몇 개가 바닥에 함께 떨어졌는지 깨지는 소리를 확실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등과 머리를 세게 부딪친 나폴레옹이 반사적으로 팔을 약간 허우적대며 뭐라도 손에 잡히기를 바랐지만, 요란하게 구겨지는 소리를 내는 종잇장만이 손에 닿았다. 그가 다리를 거세게 움직여서 공격자를 걷어차려는 시도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공격자는 이미 그의 몸 위에 올라타서 상체를 잔뜩 짓누르고 있었다. 뒤늦게 나폴레옹이 온몸을 버둥거려 보았지만, 이미 그의 목을 조르는 단단한 팔은 그의 숨통을 단단히 죄었다. 나폴레옹이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제 목 주위를 둘러싼 팔을 주먹으로 겨우 몇 번 툭툭 치는 게 다였다. 그런 그의 미약한 반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격자는 이내 좀 더 팔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방독면을 쓰고 있는 나폴레옹의 숨소리가 금세 가빠져서 짧게 끊어졌다. 이러다가는 금세 정신을 잃을 테고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일단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금세 그의 손에 갸름한 얼굴이 닿았다. 공격자는 방독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가스 유출은 역시 그냥 함정이었나?


이제 컥컥거리는 소리까지 내는 나폴레옹은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손바닥에 닿은 얼굴을 밀어내려고 애쓰며 그렇게 생각했다. 연구실의 문이 잠겨 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일부러 파놓은 함정이었을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나폴레옹은 가물가물한 눈을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윤곽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얼굴을 밀어내려고 하던 그의 손에서 어느새 힘이 빠져나가면서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거의 한계였다. 거의 감기려고 하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던 나폴레옹의 머릿속에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랑비가 내리던 날, 베를린의 한 공원 화장실에서 일리야가 지금처럼 그의 목을 되는대로 조른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전날에 가비를 두고 대적하던 두 사람이 그 협소한 공간에서 딱 마주쳤으니 서로를 죽일 기세로 달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스르륵 눈을 감으면서도 여전히 선연하게 볼 수 있는 얼굴을 떠올렸다. 점점 모든 감각들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눈꺼풀 속에 붙박인 것처럼 그 둥근 얼굴은 매우 선명했다.


…일, 리야….


그는 바람이 쉭쉭거리면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눈앞에 보이는 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나폴레옹의 기도를 정확하게 압박하고 있던 팔이 황급히 치워졌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은 그것을 알아채기엔 무의식의 세계로 너무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