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부터 단단하게 땅에서 올라온 한기에 위를 덮은 새하얀 눈이 녹지 않는 땅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이 여럿 있었다. 해가 지면 불꽃을 절대로 꺼뜨려선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에서부터 동토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대한 해괴한 이야기까지 추운 지역에서 힘겹게 사는 이들의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수많은 곁가지가 뻗어 본래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없었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의 맥락은 본디 같기 마련이라 추위 속의 이질적인 존재를 항상 조심하라.’라는 것이 주된 교훈이었다. 그러나 이질적인 존재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특히 현대의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나 미신 따위를 이상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이질적인 존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수긍하곤 했다. 북반구에 겨울이 찾아올 때면 섭씨 영하 20도는 따뜻하다고 여기는 지역에서 추위는 익숙하면서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잃으면 점차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말도 마치 생물처럼 태어나고 죽었다. 사람들이 이상 믿지 않게 동토의 전설은 거의 사장되고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생명의 불씨를 힘겹게 지펴 주고 있는 이는 추위를 벗삼아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는 동요의 가사는 놀랍게도 원형에서 거의 변형되지 않고 지금껏 이어졌다.

 

칼날 같은 바람이 모든 것을 할퀼 것처럼 부는 밤에는 구름을 헤치고 나온 푸른 달빛 아래의 그림자를 경계하라. 속에서 깨어난 땅의 망령들이 너희를 쫓는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의 수호자를 곁에 두어라. 어둠이 너희의 영혼을 삼키기 전에.

 

***

 

.”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가비는 문득 오른편에서 들려온 코웃음을 치는 소리에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정도 자리에 소년이 다리를 책상 밑으로 뻗고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서 불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그는 보기에도 길쭉길쭉하여 성인 남자 만큼이나 몸과는 달리 여전히 앳된 티가 나는 턱을 동그랗게 만들 정도로 입술을 다문 채였다. 가비는 샐쭉하니 눈을 가늘게 떴다. 보나마나 그의 시선 끝에는 구불거리는 까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아주 창백한 피부의 다른 소년이 있을 뻔했다. 실제로도 아까부터 앞에서 들려오는 시시덕거리는 소리에 변성기가 거의 지나서 매끄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가비는 작은 손에 연필을 고쳐 잡으며 다시 문제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해가 .”

그녀가 수식을 마저 풀어 나가면서 말했다. 계속 앞만 쳐다보던 소년은 그제야 가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각대는 연필 소리가 진작에 묻힐 만큼 주위가 시끄러운 데도 그녀의 풀이는 막힘이 없었다.

뭐가?”

나폴레옹 솔로 말이야. 그리고 .”

가비가 뭉툭한 연필 끝으로 나폴레옹과 소년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하자, 소년이 마른 풀색깔을 닮은 금발을 손으로 흩뜨리며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야, 대체 그래? 둘이 대화해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싫어하는데?”

그건 놈이.”

일리야는 말을 하다 말고 여전히 다른 아이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는 나폴레옹을 힐끔 보았다. 나폴레옹이 전교생이 20명도 되는 학교로 전학을 이제 겨우 달이 지났는데, 그는 마을의 유명인사였다. 사람이 있는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하는 이곳까지 외지인이 이사를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가족은 러시아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미국 출신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이 범죄자는 아닌가 모두들 의심하였으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가족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경계가 호감으로 바뀌기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보석을 빼다 박은 파란 눈을 예쁘게 빛내며 금세 전교생의 마음을 녹였고, 그에게 미모를 그대로 물려준 부모도 빼어난 사교성으로 이웃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누군가가 그냥 마음에 수는 있지. 그래도 그러면 된다고.”

가벼운 말투로 조언을 가비는 다음 문제로 넘어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리야는 한숨을 쉬고 책상 위로 팔을 모아 엎드렸다. 가비는 그가 나폴레옹을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일리야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다만 함부로 타인에게 말할 없을 뿐이었다.

가비.”

.”

뱀파이어 같은 믿어?”

책상에 가로막힌 일리야의 목소리가 낮게 웅웅 울렸다. 가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제를 푸는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가 잠시 후에 일리야가 엎드린 채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빼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니. , 뱀파이어니 늑대인간이니 하는 요즘 인기가 많긴 하더라.”

일리야는 가비의 말에 수긍하듯이 고개를 두어 끄덕이더니 상체를 일으켜서 똑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어느새 자리로 돌아간 나폴레옹의 까만 뒤통수를 보면서 가비에게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마을의 전설처럼 뱀파이어도 허구의 존재에 불과했다. 설령 뱀파이어가 정말로 실재한다고 해도 다수가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그게 사실이었다. 거기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지만, 일리야는 안이 조금 씁쓸하다고 느꼈다. 그도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같은 괴물을 믿지 않았다. 단지 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괴물의 존재와 스스로를 떼려야 없을 뿐이었다. 어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유쾌하지 못했지만, 일리야가 있는 일은 없었다. 역시 평생을 침묵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쓴맛이 나는 침을 억지로 모아서 삼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전 내내 펑펑 내리던 눈이 잔뜩 쌓인 세상이 온통 하얬다.

처음부터 일리야는 본능적으로 있었다. 햇빛 아래의 눈처럼 희고 차가운 피부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불로불사의 존재.

나폴레옹 솔로는 뱀파이어였다.

 

***

 

겨울이면 발생하는 백야 현상에 지금 시간이면 본래 불을 밝혔어야 집들은 아직 밝은 하늘 아래에 놓여 있었다. 드문드문 떨어진 집들 때문에 생각보다 넓은 마을은 거대한 타이가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퍼져 있었는데, 숲으로 가는 길목에는 별장처럼 크면서도 전혀 화려하지 않은 채가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었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건물 주위에는 담장이라고 하기엔 키가 낮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여닫이문으로 입구는 컸다. 그러나 벽에 붙은 조그만 창문들 모두 하나같이 커튼으로 가려져서 안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홀로 다른 집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집은 죽은 듯이 고요하여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곳을 향해서 일리야는 눈길 위를 빠르게 걸었다. 가끔 차가운 바람이 거대한 침엽수림을 뒤흔들며 숲에서부터 불어와 살을 에듯이 할퀴고 지나가도 그는 검은색 코트의 앞섶을 여밀 생각도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금방 저택의 커다란 출입구에 다다랐다. 그가 손을 뒤로 뻗어서 있으나 마나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추위에 뻣뻣해진 경첩이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듯이 쇳소리를 냈다. 그러자 소리가 초인종이라도 굳게 닫혀 있던 건물의 현관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어깨에 넓은 숄을 두른 여인이 나왔다. 온통 하얗게 쌓인 눈만큼이나 피부를 가진 그녀의 짧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일리야의 금발과 거의 비슷한 색을 띄었다.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다.”

일리야가 얼른 여인에게로 가자 마자 그녀가 따뜻한 공기로 가득한 안으로 그를 들이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그녀의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은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응접실로 가는 복도를 따라 앞장서서 걷기만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은 복도의 끝에 있는 유리로 미닫이문을 열면 나오는 공간이었다. 응접실의 넓은 공간을 둘러싼 벽지는 밝은 톤의 무늬가 들어가서 화사했고, 곳곳에 놓인 고풍스러운 가구와 장식품들은 어우러졌다. 한가운데에 길게 놓인 소파 뒤쪽에 보이는 커다란 벽난로에는 장작이 타오르며 공기를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일리야는 숄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 소파에 앉는 여인을 따라 옆에 털썩 앉았다. 여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숲에서 동물들이 죽은 채로 발견됐어.”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베리아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 타이가에는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순록이나 들개 같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숲속에서 생태계를 이루어 살아가던 그들이 반년 전부터 하나둘씩 피투성이가 채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일어나던 일이었기에 천적에게 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점점 사건이 자주 발생하면서 다들 사람이 짓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된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동물들의 시체에 남겨진 날카로운 손톱자국과 같은 크기의 구멍 개였다.

이번에도 그들짓이겠죠.”

일리야는 표정을 잔뜩 굳혔다. 그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숲에 들어갔다가 토끼와 순록의 몸에 피가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아서 시체가 눈밭에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소문으로 듣던 사건의 현장을 직접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몸집이 작은 토끼보다 순록의 시체에 손톱자국과 개의 구멍이 선명하게 있었다. 손톱에 긁힌 자국은 죽은 순록의 몸통에 길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다지 깊지는 않았고, 작은 구멍 개가 깊숙이 순록의 단단한 살갗을 파고들어 있었다. 그때 일리야는 순록이 몸통에 상처로 죽은 것이 아니라 깊이 패인 구멍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순록이 죽은 지는 겨우 여섯 시간도 되지 않았었는데, 사람은 절대로 동물의 시신에서 그렇게 단기간에 피를 모조리 빼낼 없었다.

아직 가족들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들은 뱀파이어예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니? 너무 그들을 배척하진 말아라. 이미 우리 땅에 이상 관대하게 받아들여야지. 잘잘못이 가려지면 그때 조치를 취하는 것도 늦지 않다.”

엄마, 하지만.”

일리야.”

일리야는 어머니의 단호한 제재에 대꾸하지 못하고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대신에 오늘 밤부터는 너도 함께 매일 순찰을 돌도록 하렴. 벌써 여덟 번째 생일이 달도 남지 않았구나.”

정말요?”

그래. 이제는 너도 곧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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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고 계셔서 올리는데 아직... 뒤에 372843628만큼 더 써야 하니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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