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는 모피 코트에 목까지 푹 파묻은 채로 자동차의 앞 유리창 너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털에 둘러싸여 눈빛만 형형하게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몸을 크게 부풀려 천적을 위협하는 동물과 비슷했으나, 차창밖에는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과 희미하게 길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 외에는 쥐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밤색 눈동자를 저 앞의 길모퉁이에 한참 붙박아 두고 있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코트에 파묻었던 왼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라던 나폴레옹이 가비에게 약속한 시간은 10분이었고, 가비가 기다린 시간은 지금 막 반시간이 넘었다. 그녀가 미국인 동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것이 약 20분 전이었지만 알량한 희망이라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늦지?


그녀는 미련이 남은 눈길을 시계에서 차마 떼지 못하고 손가락만 까딱이면서 잠시 고민했다. 나폴레옹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에 반드시 10분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것이고, 가비는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이상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란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홀로 나폴레옹을 구할 수 있다면 그를 구출하고, 그러지 못할 때에는 본부에 상황을 알리고 동료 구출을 훗날로 미루는 것이었다. 일단 연구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으며 나폴레옹이 침입한 이후로 다른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온 적이 없었다. , 모든 일은 연구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비는 연구소 건물을 차창 너머로 힐끔 보고는 짧게 숨을 내쉬며 조수석 앞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발터 PPK와 여분의 탄창을 꺼내는 그 순간, 철컥 소리가 났다. 너무 깜짝 놀란 그녀는 미처 발터 권총을 제대로 치켜들지도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솔로.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비는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긴장에 덩달아 눈을 크게 뜨고서 눈썹을 까딱이던 나폴레옹은 그제야 조수석의 등받이를 앞으로 접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능청을 부렸다.


택시를 타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러도록 진작에 그냥 갈 걸 그랬지. 대체 뭘 하다가 늦은 거야?

나 때문이다.


가비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목소리에 목을 빼고 나폴레옹의 뒤쪽을 살폈다.


일리야?


가비의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조형물인 양 우두커니 서 있던 일리야가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비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됐어. 나도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고.


가비가 룸미러를 통해 나폴레옹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태연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넘기며 답했다.


내가 괜히 히터도 고장 난 차에서 덜덜 떨며 기다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말하자면 길….

일단 가면서 얘기하지.


가비의 날카로운 눈빛을 어영부영 넘기려던 나폴레옹의 말을 일리야가 단호하게 잘랐다. 가비는 룸미러로 뒷좌석의 두 남자를 갈마보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폭 쉬고 운전대에 꽂힌 열쇠를 돌렸다.


차 안에는 금세 침묵이 깔렸다. 가비와 나폴레옹이 간간이 룸미러 속에서 시선을 마주치기는 했으나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은 지금의 상황이 꼭 동베를린에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잠든 텅 빈 새벽의 도로를 채우는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의 불빛을 제외하면 그때 세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감이 지금 되살아난 듯했다. 마침 가비의 손가락이 운전대 위를 톡톡 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일리야를 힐끔거렸다. 장식용 전구의 노랗고 빨간 빛이 울렁이면서 창을 통해 쏟아질 때마다 생각에 잠긴 일리야의 얼굴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했다. 나폴레옹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웨이벌리의 연락이 늦게 닿은 모양이지?


일리야는 눈동자만 굴려서 나폴레옹을 바라보았다.


난 엉클의 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야.

집안일인가? 그렇다면 대단한 우연인데.


나폴레옹은 빈정대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은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게 구부정하게 앉은 그는 잠시 할 말을 정리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폴레옹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일리야가 허벅지 옆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긴 손가락들을 살며시 잡았다. 일리야는 손을 움찔거렸지만 빼지 않았다.


웨이벌리가 엉클 임무를 소집했다는 것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알았다. 그가 여러 번 연락을 취한 것 같은데 나는 아예 연락을 받을 수 조차 없었거든.


일리야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두 번째 문장을 끝마칠 즈음에 나폴레옹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았다. 그러자 일리야가 고개를 돌려 나폴레옹을 보며 말을 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솔로, 네가 떠나고 나도 곧장 러시아로 돌아가려고 했었다. 짐을 싸고 있었는데 미트로비차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어. 트레프차 광산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신원을 알 수 없어서 바로 보고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더군. 뒤늦게 알고 보니 벌써 몇 달 전에 실종된 소련인 과학자였는데 시신이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마침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내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는 거였지.


잠자코 일리야의 말을 듣던 나폴레옹이 트레프차 광산 이야기에 눈썹을 움찔거렸다.


트레프차 광산이라면, 죽었다는 그 과학자가 혹시 미치광이처럼 공포에 떨다 죽은 남자를 말하는 건가?

맞아.


일리야가 눈을 약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폴레옹의 입에서는 한숨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랭글리에서부터 한동안 그를 괴롭히던 문제는 듬성듬성 고리가 끊어져 있었다. 심지어 그 사건을 내준 에이드리언이 필연적으로 일리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교묘한 질문까지 하는 통에 나폴레옹은 어느 부분이 빠졌는지 알아내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복잡한 의도를 담아서 신뢰성 따위를 운운했는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질문을 한 것에 불과했는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일리야로 귀결되는 사고의 흐름을 나폴레옹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상사가 노린 것이 바로 그 지점인지도 몰랐다. 나폴레옹이 일리야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는 게 CIA측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나폴레옹을 의심하는 것이라면, 이미 일리야와 나폴레옹의 사이가 예사로운 것이 아님을 그가 최소한 짐작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엉클에서 그 일을 조사하고 있는 거였나?


일리야의 질문에 나폴레옹은 어깨를 움찔하며 룸미러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가비는 앞에 펼쳐진 도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 CIA가 영 쓸모없는 기관은 아니거든.


나폴레옹은 말을 마치며 일리야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일리야가 얼른 빠져나가는 손을 붙잡아 꽉 쥐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저 앞만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광산에서 죽은 과학자가 2차 대전 중에 연구했던 물질이 있어. 어떤 기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게 없거든. 죽은 과학자도 물질이 너무 불안정해서 몇 번 작은 사고를 겪은 뒤에는 더 이상 연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접었다더군. 하지만 그는 늘 연구 자료를 들고 다니면서 언젠가 다시 그 물질에 대해 연구하려고 했고, 결국 실종되기 전에 연구를 재개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가 실종되었다가 몇 달 후에 광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그의 연구 자료는 모조리 사라졌다.

그러면 그 과학자는 실종되었던 게 아니고 납치되었던 거네. 연구 자료를 노린 누군가에게.


붉은 신호에 작은 비틀을 멈춰 세운 가비가 룸미러로 일리야를 보면서 말했다. 일리야는 거울 속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시신을 가져간 자가 처음에 그를 납치한 자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어. 그래서 광산에서부터 거꾸로 범인을 쫓고 있었지. 하지만 시신을 가져간 자를 겨우 찾아냈을 때 이미 자료는 그의 손을 벗어나고 없었어. 그 놈도 그저 고용된 꼬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잠깐, 그렇다면 피닉스가 거기에 관련이 있단 소리야?


가비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도 어딘가 흥미진진한 말투로 질문했다. 일리야는 한쪽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들썩였다.


내가 괜히 온 게 아니라면.

그럼, 실험실에서 뭔가 찾았나? 나도 뭔가를 알아보러 갔었는데 얻은 게 없거든. 예상치 못하게 자네를 만났으니까.


나폴레옹이 악의 없이 덧붙인 마지막 말에 아까 어두운 실험실에서 그를 죽이려 들었던 것을 떠올린 일리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한 일이라곤 해도 일리야가 정말로 나폴레옹을 죽이기 직전까지 그를 몰아세웠던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베를린의 공중 화장실에서 거나하게 몸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을 올렉이 말리지 않았다면 일리야는 나폴레옹을 완전히 질식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첫 합작 임무가 완전히 끝나고 나폴레옹을 만나러 가던 날, 품에 숨긴 마카로프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지금도 일리야는 똑똑히 기억했다. KGB의 최고 요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그가 목표한 인물을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까지 망설이는 건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나폴레옹에게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었다. 이미 그가 세운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린 이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은 넓은 바다에 물을 한 방울 더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러니 연구실이 어두웠고 방독면에 가려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는 이유들도 일리야에게는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일리야는 몇 초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폴레옹이 말없이 손을 꼭 맞잡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일리야는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가장하려 애쓰며 천천히 답했다.


자료를 찾았지만, 자료의 전부는 거기에 없었어.

전부는?

그래, 전부는. 극히 일부가 남아 있었지. 급하게 정리하다가 흘린 게 분명한 종이 세 장뿐이었거든. 그나마도 사본이었어. 아마 원본은 과학자를 죽이고 자료를 가져오라고 사주한 놈이 갖고 있겠지. 실험실에 널려 있던 다른 종이들은 관련 없는 보고서들이었어. 그리고 어제 일어난 사고는 죽은 과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다가 발생한 것이 맞을 거다.


일리야는 자유로운 손으로 재킷의 앞섶을 벌려 안주머니에서 두어 번 접힌 종이를 꺼내어 슬쩍 보여주고는 금방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료를 가진 사람이 누군데?

파비안 마르티네.

처음 들어.


녹색 불에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가비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KGB와 엉클이 쫓는 범인이 굉장히 유사하단 생각이 들어. 나는 트레프차 광산에서 죽었다는 사람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거기서 죽은 남자도 실종된 러시아의 과학자였다면서. 제니퍼의 아버지도 러시아 출신의 화학자잖아. 가스 유출 사고도 그래. 신문에서는 피해자가 한 명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물리적 외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했어. 솔로가 연구실로 간 이유는 그게 이상해서였지. 가스 유출 사고가 어떤 실험의 일환이었다면…. 어쩌면 펠레티에가 직접 탐정을 고용해서 제니퍼를 감시하도록 한 게 맞을지도 몰라.

일리는 있네.


나폴레옹은 가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일리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제니퍼의 아버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 그러고 보니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 했겠네. 짧게 설명하지. 제니퍼 카터라는 여자가 있어. 그녀의 아버지는 소련의 화학자로 몇 달 전에 폴란드에서 실종되었고, 제니퍼가 꽤 열성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다녔지만 아직까지 그를 찾지 못 했어.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감시하던 사립 탐정이 있었고, 그 탐정의 고용인이 바로 피닉스의 최고경영자인 제레미 펠레티에였지. 우리는 펠레티에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보고 그걸 캐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얼마 전에 파티에서 펠레티에에게 처음 접근했는데, 그때 나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고 생각했어. 솔로도 그렇고. 우린 그가 결백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저베즈 라벨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뒤부터는 뭔가 이상해. 사업상 거래를 하자는 명목으로 계속 펠레티에와 연락을 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연락을 받지 않거든. 처음엔 기업인들이 으레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가비는 저베즈의 이름을 말하면서 표정을 약간 찡그렸다.


저베즈 라벨이 펠레티에와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몰라. 그녀의 아버지가 몇 년 전에 죽은 프랑스의 장관이었다는 것과 그녀의 애인이 SDECE의 요원이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것도 없거든.

하지만 그 여자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났지. 페릴, 혹시 그 여자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나?

내가 아는 한, 이 일에 관련된 프랑스인은 파비안 마르티네뿐이야. 저베즈 라벨은 모르겠군.


일리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베즈의 이름을 말할 때 특유의 발음으로 혀를 독특하게 굴렸다.


펠레티에라는 자가 화학자의 실종이나 가스 유출 사고가 일어난 연구실에서 하던 실험에 관련이 있다고?

, 그렇게 보는 셈이지.


나폴레옹의 대답을 듣고 일리야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가비와 나폴레옹은 룸미러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트레프차에서 죽은 그 남자도 폴란드에서 실종되었다. 파비안 마르티네가 여기로 온 것이나 피닉스의 연구소에서 사고가 난 것을 보면 우연이 너무 많이 겹쳐.

같은 사람의 소행이란 거야?


그 질문에 일리야가 드디어 나폴레옹을 똑바로 보았다.


유리 아포닌.

?

광산에서 죽은 자의 이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일리야는 나폴레옹의 반응에 놀랍지도 않은 듯이 담담했지만, 나폴레옹은 망연자실하여 가비를 보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할 말을 찾던 가비는 한참 후에 겨우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냈다. 결국 KGB와 엉클이 똑같은 사건에 서로 다른 작전을 펼치고 있던 셈이었다. 중구난방으로 보였던 여러 개의 선들이 알고 보니 폴란드에서 보스턴까지 거의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제니퍼가 몇 달에 걸쳐 여러 장소를 떠돌고, 나폴레옹이 며칠 밤을 시달리면서 고민하고, 일리야가 홀로 풀어 나가던 것이 사실은 모두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이마에 길게 주름을 만들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황당할 데가 있나.


서로 배타적인 정보기관에서 같은 사건을 각각 따로 맡았다가 부딪치는 경우는 종종 발생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를 다 가지고도 연결점을 찾지 못했던 것은 실수였다. 가비는 트레프차 사건을 몰랐겠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원치 않았던 고민을 자꾸 하는 바람에 가비에게 벌써 여러 번 지적을 받지 않았던가. 그는 이제야 전체적인 판이 보여 기쁘기보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좀 더 빨리 눈치를 챘더라면 에이드리언의 수수께끼에 마음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일리야의 길쭉한 손을 옭아매듯이 잡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별 일이 다 있네. 같은 일을 맡고선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니.

이렇게 된 이상 함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나아. 러시아에 연락을 넣어야겠어.


나폴레옹이 한탄하듯 중얼거리자, 일리야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웨이벌리가 할 말이 없어지는 걸 볼 수 있겠어. 그가 자네가 이번 임무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거창한 이유를 댔는지 알아? 세상에! 그의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니, 자네도 대단해.

그거 칭찬인가?

글쎄, 아닐 걸.


농담조에 일리야는 약간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엄지로 제 손을 꽉 잡은 나폴레옹의 손등을 깔짝거렸다. 그게 어설프나마 위로하는 행동임을 알아챈 나폴레옹은 일리야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때 계속 룸미러를 흘끔거리며 두 남자를 지켜보던 가비가 퉁명스레 질문했다.


따로 방을 잡는 게 어때?

?


일리야는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나폴레옹의 손을 홱 뿌리치며 되물었다. 거기에 덩달아 놀란 나폴레옹도 가비를 쳐다보자, 가비가 천연덕스레 어깨를 들썩이며 창밖을 가리켰다.


그냥 따로 방을 잡는 건 어떤지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놀라? 방금 전에 나랑 솔로가 머무는 호텔에 도착했거든. 설마 숙소가 우리와 같지는 않을 텐데.


그녀의 말에 나폴레옹이 맞장구를 치듯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얄밉게 들린 일리야가 나폴레옹을 휙 노려보곤 뒤늦게 주변을 살펴보니 그들이 탄 조그만 비틀이 커다란 건물 옆에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왼편의 좁은 인도를 따라 조금만 앞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아직도 환하게 불이 밝혀진 호텔의 입구가 보였다. 노란빛 조명은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호텔 입구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위쪽의 간판까지 고급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마침 옆 방이 오늘 비었던데, 운이 좋으면 그 방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 겨울에 보스턴으로 놀러 오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 남서부로 가면 몰라도.

다른 곳에 이미 짐을 풀었다. 여기서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 걸어가겠어.


나폴레옹이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가장한 제안을 일리야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단호히 거절하고는 가로등 빛에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비추어 보았다. 시곗바늘이 거의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리야는 급격하게 피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시간도 많이 늦었군.


일리야의 말에 예상보다 늦었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나폴레옹은 금세 알아챘다. 하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로 했다.


새벽 공기는 많이 찰 텐데.

잊었나? 나는 러시아 사람이야.

그래도 사람이라면 추위는 느끼겠지.


일리야는 계속 꼬박꼬박 반박을 하는 나폴레옹에게 마침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폴레옹이 왜 굳이 자신을 붙들려고 하는지 일리야도 대충 이해는 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나폴레옹은 임무가 완료되자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다소 지쳐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재빨리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 일리야가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먼 사이인 두 사람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엉클의 임무를 하기 직전과 직후뿐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시간을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일리야는 당연히 나폴레옹이 후회했을 거라고 믿었다. 연구소에서 소동이 벌어진 다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이 보고 싶었다고 한 것은 일리야의 생각을 반증했다.


하지만 일리야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했다. 그와 나폴레옹 사이의 회포를 풀려면 일단 당장 코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게다가 아까 나폴레옹을 거의 죽음 직전으로 몰아갔던 사실에 일리야의 마음은 아직도 무겁고 불편했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실랑이할 거야?


가비가 마침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걸어 휘휘 돌리면서 룸미러로 나폴레옹과 일리야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졸리고 피곤해. 누구를 기다리느라 요 고물딱지 속에 들어앉아서 추위에 한참 떨어야 했거든. 난 먼저 갈 테니까 결정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하길 바라. 따로 방을 잡든지 여기서 자든지.


가비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문을 반쯤 열고 있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커다란 털 코트에 목을 파묻은 채 호텔로 걸어가고 문이 뒤늦게 탁 소리를 내며 닫히자, 두 남자만이 남은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일리야는 입을 꾹 다물고 나폴레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양 손을 들어 보였다.


네 마음대로 해. 이렇게 된 거 나는 그냥 얌전히 따를 테니까.


그 말에 일리야가 대답없이 곧장 조수석의 등받이를 앞으로 젖혔다. 그러더니 커다란 몸을 웅크리며 차에서 내린 그는 허리를 굽히고 차 안에 남은 나폴레옹을 들여다보았다. 나폴레옹은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한기에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일리야를 쳐다봤다.


안 갈 건가?

진심이야?


나폴레옹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일리야는 또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더니 문을 닫고 이만 가려고 하는 시늉을 했다. 거의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나폴레옹은 다급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잠깐만!


그는 재빨리 앞으로 젖혀진 좌석의 등받이 위로 다리를 뻗더니 미끄러지듯이 차에서 내렸다. 혼자 가는 시늉을 하던 일리야는 어느새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나폴레옹을 기다리며 공중에 하얗게 날숨을 퍼뜨렸다.


숙소로 갈 건가?


나폴레옹은 숨을 고르다가 한숨을 폭 내쉰 다음에 질문했다. 일리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폴레옹은 또 한 번 한숨을 푹 쉬었다. 그의 입술 바로 앞에서부터 연기처럼 김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좋아.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반쯤 체념하여 중얼거리는 나폴레옹의 말에도 일리야는 여전히 단호한 입매를 풀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나폴레옹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옆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얼른 입을 열었다.


이건 그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일리야가 멈칫하며 돌아보자, 나폴레옹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곧장 받는 일리야의 눈동자는 시린 겨울날에 잘 어울리는 파란 빛을 띠었다. 아침 햇살처럼 노란 머리카락과 흰 피부에 딱 맞게도 밝은 하늘색을 띤 그의 눈은 마치 그가 추운 나라에서 나고 자랐음을 강력히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잠시 동안 사위가 고요하고 대기가 차갑게 가라앉은 이곳, 보스턴 역시 일리야에게는 추운 나라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길 바라.


나폴레옹의 낮은 목소리에는 사뭇 걱정이 어렸다. 일리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폴레옹은 가끔 일리야에게만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게 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지만 계산적일 때도 있었다. 일리야는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상황에 갇힐 때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몰라서 폭력적인 행동을 곧잘 했고, 때때로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일리야가 유리조각이 박힌 제 손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물건을 마구 부수기도 했다. 상처가 크게 벌어져서 피가 손끝으로 줄줄 흐르는 것을 목격한 나폴레옹은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용케 구급상자를 찾아 가져왔다. 응급처치를 하는 내내 그는 화가 나서 입을 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의 눈치를 보던 일리야 역시 아무 말도 감히 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어떤 일 때문이든 다치지 않길 바랐다. 일리야가 나폴레옹이 다치지 않길 바라듯이. 그래서 나폴레옹이 택한 방법이 일리야를 혼자 두지 않는 것이었다.


일리야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나폴레옹의 목 언저리를 힐금 보았다. 까만 옷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의 목에는 퍼런 멍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일리야.


일리야는 망설이면서 나폴레옹과 시선을 맞추었다. 나폴레옹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에 물들어서 까맣게 침잠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이끌리듯이 일리야가 나폴레옹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나폴레옹의 뒷목을 감싸고 고개를 살짝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폴레옹이 일리야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뜨거운 체온이 곧장 서로에게 전해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뺨에 코가 짓눌리도록 끈적하게 혀를 섞었다. 시간이 억겁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떨어지기가 아쉬워서 둘은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머뭇거렸다. 천천히 눈을 뜨는 일리야의 긴 속눈썹에 가로등의 불빛이 하얗게 비쳤다.


쓸데없는 걱정은 마라.

그래. 믿어.


나폴레옹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말대로 공기가 차. 얼른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일리야는 호텔 쪽으로 턱짓을 하고는 돌아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재빨리 일리야의 손을 붙잡았다. 차 안에서 맞잡고 있느라 따뜻해졌던 손이 벌써 차가웠다. 나폴레옹은 의아하게 자신을 보는 일리야의 손을 잡아당겨 품에 한가득 끌어안았다.


가비가 기다릴 거야.


일리야의 목소리가 맞닿은 몸을 통해 울리며 더 낮게 들렸다. 일리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팔을 나폴레옹의 등 뒤로 둘러 마주 껴안았다. 나폴레옹은 목 주위가 욱신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조금 더 일리야의 몸을 꽉 안고서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자 옅은 땀냄새와 함께 옷에서 나는 오래된 가죽 냄새가 느껴졌다. 그는 일리야가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신경도 안 쓸 걸?


여전히 일리야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나폴레옹은 웅얼거리면서도 금세 팔에 힘을 풀고 떨어져 나왔다. 그에 맞춰 일리야도 뒤로 물러서는데, 나폴레옹이 일리야의 오른뺨 위에 얼른 짧게 입을 맞추었다. 작게 입맞추는 소리에 일리야가 눈썹을 크게 움찔거렸지만, 나폴레옹이 먼저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일 보자고, 페릴.


가로등이 빛을 비추는 범위를 벗어난 나폴레옹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기는 걸 보면서 일리야는 암호를 확인하듯 천천히 답했다.


그래, 내일. 카우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