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콜 교류전 윙티에 나올 원고 미리보기 1







다이애나는 포트의 뚜껑을 열어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지금쯤 찻잎이 적당히 우러났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마 포트에 손바닥을 대어보지 않아도 물의 온도 역시 적절할 터였다. 지난 번에 그녀의 깐깐한 상사마저 마시던 홍차를 그대로 여왕에게 진상해도 것이라 극찬을 했으니, 이제 찻물을 따라도 되겠다는 그녀의 결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언가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고상한 몸짓으로 까만 정장 재킷 소매를 당겨 옷매무새를 바로 후에 포트의 둥근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매끄럽게 윤이 나는 흰색의 도자기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임을 증명하듯 푸른색 염료를 채운 꽃과 이파리들로 덮여 있었다. 젊은 여왕이 젊었던 27세였을 때 갓 취임한 MI5 국장에게 직접 골라 선물한 것 치고 티 포트는 단아하고도 고풍스러웠고, 그녀 나이의 두 배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신임 국장은 그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리처드 화이트가 현 MI6 부장으로 직함을 바꾸게 되면서도 새로 받은 선물들을 제쳐 두고 8년째 고집스레 곁에 비단 포트뿐만이 아니었다. 다이애나 역시 그가 MI5 있던 시절부터 함께 했다. 그녀가 이토록 완벽하게 홍차를 있는 그런 다년 간의 경험 덕이었다. 물론 집무실 안의 고급 가죽 소파에 앉은 그녀의 상사와 손님이 은밀하고 복잡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에 비하면야 그녀의 역할은 변변찮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마저 그렇게 여겨선 되었다. 다이애나는 늙은 경비견처럼 과묵하면서도 눈치가 빨랐다. , 그녀의 차를 맛볼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밖으로 내용이 염려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 겁니까?”


묵직한 쟁반을 익숙하게 손으로 다이애나가 안으로 들어섰을 , 로버트 런던 지부장이 책상 위에 질문 하나를 불쑥 던졌다. 그는 대체로 신중한 편이었지만 차가 끓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만큼 성미가 급하기도 했다. 질문에 무어라고 덧붙이려 하던 로버트는 다이애나를 발견하자 도로 입을 다물고 앞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리처드는 그가 서류를 무슨 벌레처럼 쳐다본다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문가에서 멈칫한 다이애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를 읽은 다음에야 다가와 포트와 함께 쌍을 이루는 찻잔을 하나씩 사람 앞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다이애나.”


계속 종이만 노려보던 로버트는 홍차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인사했다. 그러자 대신 리처드가 다이애나에게 유감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이애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색출해야겠지.”

그런 뜻이 아닌 알잖아요.”


로버트는 딱딱하게 말하면서 둥근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서류는 미국에서 넘겨준 편지로, 발신인이 익명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편지를 사람이 라비니아임을 알았다. 지정된 사람만 열람이 가능함을 알리는 표식이 일반 정보원의 편지에 찍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라비니아는 작년 초부터 CIA 꾸준히 익명으로 폴란드와 소련의 기밀을 편지로 보내오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계급이 높은 KGB 요원이라고 추측되는 그는 항상 아무 특징 없는 종이에 타자기로 직접 편지를 보냈다. 여러 도시를 돌아온 봉투의 4분의 1 소인으로 뒤덮여서 미국 대사관에 전달되었는데 처음엔 모두가 잘못 배달된 것으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라비니아가 편지를 보내는 횟수가 점차 늘었고 내용 KGB 내부자가 아니면 모를 만한 특급 기밀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에서 관심을 갖고 정보원을 스나이퍼라고 명명한 이후 가장 먼저 편지의 혜택을 뜻밖에도 영국의 보안정보국, MI5였다. 4월 라비니아는 CIA 포틀랜드 해군 기지에 소련 스파이가 있다는 경고장을 보내왔다. 그것을 전해 받은 보안정보국이 반신반의하며 시행한 조사 결과 경고장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다. 포틀랜드 해군 기지에 근무하는 남녀와 그들의 주변 인물들 몇이 KGB닿아 있었다. 아직 검거 작전은 진행 중이지만, MI5 고마운 익명의 정보원에게 진작 라비니아라는 별명을 붙임으로써 그를 인정했다.


리즈의 .”


로버트가 검지로 허벅지 위를 톡톡 치면서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리처드는 동의를 표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홍차를 모금 마셨다. 완벽히 우러난 차가 안으로 퍼지자 그가 작게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반면 로버트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자기 몫의 찻잔을 노려보면서 문장으로 라비니아의 편지를 곱씹었다.


리즈의 충직한 개들 마리가 그녀의 손을 물었다.’


다분히 은유법으로 점철된 문장임에도 의미를 알아채는 로버트나 리처드 같은 이들에게 식은 먹기였다. 본래 충실하고 듬직한 개는 주인의 손을 물지 않는다. 그런데 개가 그만 주인의 손을 물었다는 이상 그에게 주인은 주인이 아니란 소리였다. 라비니아가 MI5에 그랬듯 이번엔 MI6 내부에 배신자가 있음을 알려 것이었다.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이 정보를 가지고 알력을 하는 이때에 이중 스파이는 어쩌면 필연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상대 진영의 정보기관에 정체가 탄로나 협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라비니아처럼 자발적으로 먼저 기밀을 넘겨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이중 스파이가 자들은 짧게는 개월에서부터 동안이나 정체를 잘도 숨겼다. 가이 베켓과 랄프 오브라이언 들키기 직전 돌연 소련으로 도망갔다는 사실은 무려 5 후에나 밝혀졌다. 그들 외에도 여태껏 정보부 내에서 색출된 두더지의 수를 세기에 이미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만큼 이중 스파이는 꽤 만연한 골칫덩이였다.


반항하는 개는 항상 있었지만 이것만 보고 온통 뒤집을 없습니다. 그냥 이게 다입니까?”

독수리가 귀띔을 하기로는 명단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

명단? 무슨 명단이요?”


로버트는 화가 사람처럼 벌컥 되묻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침착하게 다시 입을 뗐다.


명단 같은 없습니다. 미국인들도 그건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래, 없지.”


리처드는 동의를 표하기보단 아이를 달래는 같은 투로 말했다. 그러자 로버트가 한숨을 쉬었다. 특정 작전에 참가했거나 특정 지역에 있는 요원들에 대한 명단이 있다는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그러나 소문이란 것이 대체로 뜬구름 잡는 소리인 만큼 정보부 문서실에 보관된 수많은 문서들 그런 명단은 없었다. 간혹 이중 스파이들이 적국에 넘길 목적으로 명단을 만들어 가능성은 있었지만, 정보부에서 공식적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명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 저는 터무니없는 소문 같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로버트는 리처드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길 바랐다. 리처드는 가진 패를 쉽사리 보여 주려 하지 않는 묘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동시에 그는 확신이 없으면 섣불리 일을 진행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그가 로버트를 따로 만나는 데에는 뭔가 있는 분명했다. 아무리 라비니아가 믿을 만한 정보원이라고 해도 단순히 두더지가 있다는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한참 뜸을 들였다. 로버트는 그제야 자신의 찻잔에서 풍기는 차분한 차향을 맡으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자 리처드가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편지를 받은 후에 떠오른 이야기야. 전에 파웰이 런던에 들러서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는 정확한 날짜를 기억해 내느라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가 9 3일 토요일이었을 걸세. 그가 전날 밤에 C블록을 나서다 누군가가 동료에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다른 같으면 그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하는 말은 크게 울리는 법이잖나. 그래서 어쩔 없이 엿듣게 내용이었지. 직원은 우리 쪽에서 KGB 요원으로부터 가로챈 서류 내용을 번역하던 중이었는데, 이상한 문서 하나가 중간에 끼어 있었다 하더라고.”

이상한 문서라니요?”

문서의 내용이 앞뒤 문서와 완전히 달랐어. 직원은 다른 마이크로도트와 잘못 섞인 같다고 자기가 중요한 서류를 제대로 다루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며 상사에게 혼날 거라 걱정했다지. 파웰이 말한 그게 다였네.”


리처드가 말을 마치고 홍차로 목을 축였다. 로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문서가 그물이 되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어딘가 어린 아이의 순수한 질문과 닮아 있어 리처드는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린 미소를 지었다.


글쎄, 파웰에게 문서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결국 찾지 했어. 여기 보관실에도 그런 없었지. 원본도 복사본도 모두 사라졌네.”

벌써 처리한 거군요. 다른 케임브리지 스파이일까요?”


로버트는 허탈함을 숨기듯 침을 크게 삼키고 대꾸했다.


“그건 모를 일이지만, 보통 놈은 아니야. 오클리와 브로드웨이의 문서를 건드렸다고. 이번 두더지 사냥은 극도로 조심해야 . 믿을 만한 자는 있나? 우리가 직접 움직일 없어. 케임브리지 놈들처럼 도망치게 둬선 .”


리처드는 강한 의지를 담아 회색 눈을 빛냈다. 주름진 얼굴에서 엿보이는 그의 나이가 눈빛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거기에 감화되는 느낌을 받으며 머릿속에 당장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실력만 따지면 이름의 주인도 진작에 지부장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겠지만 이스트 엔드에서 굴렀던 그의 출신과 자리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 탓에 중동까지 밀려난 자였다. 그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변방으로 인물은 부류였다. 여전히 본국에 충성스럽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행히도 로버트가 아는 사람은 전자에 속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표가 필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