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꿈을 꾸는 날이 있다. 뭔가 아주 애쓰면서 도망을 하거나 싸우느라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꿈.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대개 머릿속을 지우개로 대충 지운 것 마냥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을 꾼 것은 맞는데 무슨 꿈을 꿈 건지는 알 수 없어서 머리가 멍한 기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명확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꿈의 본질이 아니던가.

누군가가 어깨를 살짝 흔든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번쩍 뜬 퍼시벌은 고개를 휙휙 돌려서 허망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한 침실에는 아침햇살이 들어올 틈이 없이 암막 같은 커튼이 벽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밝은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행위가 반박할 여지 없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상실감에 퍼시벌은 방금 꾼 꿈도 함께 잊어버렸다. 요즘 그는 자꾸 무언가를 잃기만 하고 있었다.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 않고 대충 걸친 퍼시벌은 커튼 앞에 섰다. 두껍고 거의 까맣게 보일 정도로 색이 어두운 커튼은 제 앞에 선 그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이에 질린 표정을 한 퍼시벌은 양 손으로 커튼자락이 맞물린 부분을 잡고 양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침범해온 한 무더기의 빛에 그의 동공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환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금세 어둠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을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하얀 먼지가 그 속에서 피어올라 공중에서 마구 춤을 추었다. 퍼시벌은 미간을 찌푸렸다. 빛과 어둠이 싸운다는 것이 언제부터 성립할 수 있는 명제였는지에 대해 토론을 벌일 가치는 없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약간 열어둔 퍼시벌은 침실 밖을 나가지 않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불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자신을 깨워준ㅡ실제로 누군가 그를 깨웠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ㅡ누군가를 생각했다. 사진처럼 선명하진 않아도 아직은 머릿속에 그의 이목구비를 그려낼 수 있었기에 퍼시벌은 잠시 들이쉰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꿈도 습관일까. 아니면 그리움 같은 것이 그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일 때 드러난 것일까. 퍼시벌은 잔상을 일부러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집안 전체에 깔려있는 카펫은 발소리를 모두 흡수했다. 그러니 퍼시벌은 마치 유령처럼 집을 떠도는 것 같았다. 그가 놓아주지 못하는 허상도 그와 함께 떠돌았다. 여전히 집안 곳곳에는 한 사람 분이 더 많아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컵에 꽂힌 색깔이 다른 칫솔 두 개, 2인분의 식기들, 거울 위에 붙은 서로 다른 글씨체의 메모지 몇 장. 퍼시벌은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척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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