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뭐든지 시작이 어려운 법이라고들 말하지만, 글쎄, 퍼시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 꼭 감고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무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정작 더 어려운 일은 따로 있었다. 퍼시벌은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깜빡였다. 그는 매끈한 검은색의 만년필을 손에 쥐고 굴리는 것이 맞은편에 앉은 상대를 거슬리게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더 어려운 일이란 것은 말로 하자면 매우 간단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봐, 트리스탄, 내가 언제까지고 그쪽의 날선 투정을 받아주는 보모가 아니란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날이 선 건 그쪽이 아니라 자네라는 말을 그냥 뒤로 삼킨 트리스탄은 잔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는 일부러 퍼시벌이 손 안에서 굴리고 있는 만년필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퍼시벌의 정장 단추만 보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얇은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음이 틀림없겠지만 이곳의 날씨에 빳빳하게 다린 정장을 모두 갖춰 입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지 않은가 싶었다. 트리스탄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하와이안 셔츠가 방탄기능이 있던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꾹꾹 눌렀다.

 

투자자라곤 해도 외부인이 아니겠나. 외부인에게 공장의 사정을 자세하게 오픈하는 것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어. 소위 V-day라고 부르는 그날 이후로 이들은 최대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방침을 세웠어. 나는 다행히도 그 이전부터 이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다 헛걸음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면 해. ‘공장을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도 잊지 말고.”

나라고 이런 날씨 속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 아냐.”

 

트리스탄은 말을 마치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뜨거운 햇볕이 가득 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살갗을 다 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는 다소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트리스탄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퍼시벌은 보기만 해도 더운 풍경에 저도 모르게 단정하게 매고 있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건을 끝내기가 이렇게 어려워질 줄이야.”

 

트리스탄의 한탄하는 투에 퍼시벌은 그를 힐끔 보았다. 그의 말에는 끝내는 것이 처음부터 쉬웠다가 어려워졌다는 숨은 뜻이 있었다. 퍼시벌은 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끝내는 것이 처음부터 쉬웠던 적이 있었나?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그것을 끝내지 못하는 그에게는 그저 시작만 있었고, 그 시작은 끝내는 것보다 언제나 쉬울 수밖에 없었다.

 

퍼시벌은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말없이 보면서 감상적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트리스탄에게서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고, 퍼시벌 자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건너편의 화장품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보기만 할 뿐이었다.

 

 

 

2

퍼시벌은 며칠을 더 무의미하게 보내야만 했다. ‘공장의 사람들은 그에게 문을 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고, 트리스탄도 눈에 띄게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시간만 자꾸 가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길어질 임무도 아니었건만. 퍼시벌은 눈을 뜬 직후부터 오늘도 별다른 성과가 없을 거라고 지레 짐작이나 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슬 더운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동네를 한 바퀴 뛰고 있는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휘휘 저은 그는 팔을 살짝 들어서 반팔 티셔츠의 소맷자락에 얼굴을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공장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장은 발렌타인의 마수가 뻗친 거의 말단부에 불과하였기에 그곳의 사람들이 V-day에 큰 공헌을 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발렌타인의 유지가 거기에 남아있기라도 하듯이 불법적인 생체실험을 동반한 약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약들이 팔려나가는 곳은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으므로 지금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고 해서 막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재앙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바로 이 지점에서 퍼시벌은 마치 인류애 같은 것이 희미하게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그 출처도 모를 인류애를 느끼는 스스로를 마음껏 자조했다.

 

 

 

3

사실 퍼시벌은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날 때부터 감정적인 면을 있는 힘껏 숨기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무슨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감정이 메말랐다고 함부로 정의하고 멋대로 힐난을 해대곤 했는데 퍼시벌은 거기에 마저 약간의 한심함을 표할 뿐 별로 감정적으로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정말로 그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그들이 자네를 향해 돌아서고 있어.”

 

트리스탄은 약간의 기쁨을 담아 말했다. 퍼시벌은 그의 위로 살짝 올라간 입 꼬리를 힐끔 보고는 눈썹 끝을 살짝 꿈틀대기만 할 뿐이었다. 싱거운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트리스탄은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간부들 중 하나를 붙잡고 내내 설득한 보람이 있는 것 같군.”

고맙단 말이라면 됐네.”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몇 번이나 얘기한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줬으면 해.”

 

퍼시벌은 트리스탄이 한숨을 푹 쉬는 것을 보고 예의상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줬다. 트리스탄은 가끔 그들이 동료로 지낸 지 벌써 20년이나 훌쩍 지난 사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곤 했다. 그것이 그렇게 대단히 여길 일이었던가. 퍼시벌은 탐탁지 않은 마음을 습관적으로 숨기면서 창밖을 보았다. 트리스탄이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 같았지만 그는 벌써 듣고 있지 않았다.

 

먼지가 낀 것처럼 뿌옇게 되어 조금 더러워 보이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일전에 트리스탄과 접선했을 때 보았던 바깥풍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에 덩치가 작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어린애들 한 무리가 사람들을 향해 구걸을 하고 있는 풍경은 적도와 가까운 이 가난한 섬나라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장이 이 섬나라와 주변 국가들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앞에서 보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이 광경은 적어도 트리스탄의 지루한 이야기보다 생동감 있었다. 퍼시벌은 이런 것이 가 말하던 덜 지루한 것들에 속하는 것임을 요즘에야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 란스, 아니, 그가 제출했던 보고서에서.”

트리스탄.”

 

트리스탄은 갑자기 퍼시벌이 자신의 말을 끊자 숨을 내쉬면서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퍼시벌 앞에서 이런 말실수를 하면 안 되었는데 하고 후회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트리스탄은 그의 꽉 막힌 것 같은 눈동자가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는 것을 힐끔 보고는 짐짓 양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얼굴근육의 모든 힘을 뺐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래, 그렇군.”

 

트리스탄은 자신의 표정이 퍼시벌에게 그다지 먹혀들지 않은 것을 금방 받아들였다. 이제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퍼시벌이 아주 예민하게 군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트리스탄은 그를 이해했다. 그들은 모두 살아오는 동안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잃는 일이라면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 그래서 트리스탄은 퍼시벌이 잠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도 더 이상 잡지 않았다.

 

가게를 나서는 퍼시벌의 걸음은 약간 휘적거리는 모양새였다. 언뜻 보면 그렇게 이상해보이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V-day의 후유증이 남은 탓이었다. 그나마도 아침에 조깅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나아진 것이어서 퍼시벌은 자신의 걸음걸이가 아주 조금 휘적거리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걸었다.

 

그러다보니 햇빛이 강렬하게 땅으로 내리꽂히는 속에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것에 그는 약간 심취해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어느새 사람들 속에 갇혀서 시내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탈 것들의 소리가 뒤섞여서 고막을 때렸다. 그의 주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같았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퍼시벌은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도 같아서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러다가 퍼시벌은 그를 본 것 같았다. 꼭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 색이 바랜 갈색 머리카락이 인산인해를 이룬 거리 위로 쑥 솟았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것 같아서 퍼시벌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이미 죽은 사람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최근 한창 유행하는 좀비 같은 괴물이 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시체가 걸어 다닐 리도 없지 않은가. 물론, 퍼시벌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의 시체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미 땅에 묻힌 지 오래 된 관 속에는 시체가 틀림없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그 머리통이 보였을 때 퍼시벌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전신의 근육이 뻣뻣하게 긴장하여 그는 박제당한 것처럼 우뚝 선 채로 굳어버렸다. 그의 뒷목을 스치는 섬뜩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은 0에 수렴하는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남는 것, 바로 그것만이 진실이라던 소설 속 탐정의 말이 현실로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퍼시벌은 그 머리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저릿하게 뒷목을 아리게 만드는 그 순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퍼시벌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주쳤다. 퍼시벌은 헛숨을 들이켰다. 시선이 마주쳤던 그 찰나의 순간에 그의 주위를 둘러싼 시공간마저 잠시 멈추었었다. 그와 그저 조금 닮은 사람의 수준이 아니었다. 퍼시벌은 천천히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그는 분명히.

 

제임스.”

 

그였다. 그가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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