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귀로

2015. 12. 5. 17:07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어서 밝은 햇빛은 볼 수가 없었고 자연히 공기도 서늘하였다. 뺨에 닿는 축축한 대기에 익숙지 않은 호흡기가 어쩐지 평소보다 산소를 받아들이는 일을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퍼시벌은 물 분자가 많아진 공기를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에 집중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시야에 저 멀리 까만 점 같이 보이는 것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줌을 한껏 끌어당긴 안경은 그것이 검은 색의 자동차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상당히 어렵게 찾았어. 그쪽에서 일처리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애를 먹긴 했던 모양이야. 그 덕에 우리도 고생했고."

퍼시벌은 멀린을 힐끗 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멀린 외에도 이 자리에는 킹스맨의 주요 인사들이 다 모여있었다. 물론 빠진 인물들도 몇 있었으나, 퍼시벌은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오는 차에 더 관심이 많았다.

까만색의 차는 블랙 캡은 아니었다. 그 차는 꽤 세련된 고급형 세단이었고 킹스맨 소속이자 킹스맨 소속이 아니기도 한 차였다. 킹스맨의 주요한 인물들이 모두 나와있다는 것은 바로 그 까만 세단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했다. 더 정확히는 그 차에 탄 인물이었다. 퍼시벌은 멀리까지 우중충하게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보고 다시 달려오는 차를 보았다. 차에 타고 있는 인물은 모르긴 몰라도 날을 한참 잘못 골랐다. 이렇게 안 좋은 날씨에 런던을 벗어난 외곽지역까지 오는 인물이라니. 퍼시벌은 실소를 참으면서 부러 목을 가다듬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차가 지나는 길의 양 옆으로는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에 지상의 모든 색상이 따라서 짙어졌음에도 잔디는 푸른 색을 마음껏 뽐내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예쁜 색을 가졌는지 봐달라는 듯한 잔디를 보면서 퍼시벌은 벌써 흐릿해진 얼굴을 하나 떠올렸다. 그 얼굴은 쉽게 잊혀질 수 없게 생겼지만 희한하게도 날이 갈수록 점차 흐릿하게 형체가 뭉그러져 가고 있었다. 퍼시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또렷한 인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써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꽤나 가까이에 다가온 검은 자동차에 다시 집중해야 함을 깨닫고 그것을 주시했다.

"멀린."

퍼시벌은 세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멀린을 불렀다. 멀린은 퍼시벌을 힐끔 보았다.

"사진이 남아 있겠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퍼시벌은 자신의 콧잔등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빗방울 같았는데 그는 자신에 착각을 한 건지 아니면 진짜 빗방울인지 헷갈렸다.

"그렇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검정 세단은 차량 번호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와있었다. 멀린은 자세를 조금 고쳐서 똑바로 섰다. 또 다시 작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퍼시벌은 드디어 차에서 눈을 뗐다. 그의 시선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허공을 맴돌다가 저 앞의 땅에 박혔다.

"이상하게도 너무 빠르게 희미해져서 온전하게 기억할 수가..."

멀린은 속력을 줄이며 그들의 앞에 당도한 자동차를 보았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거울처럼 사물을 비추던 검은 표면에 물방울이 조금씩 묻어났다. 멀린은 퍼시벌이 말을 흐리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앞에 멈춰 선 자동차 앞으로 다가갔다. 퍼시벌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멀린은 차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묵념하는 그와 다른 이들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점점 많이 쏟아져내렸다.

전대 란슬롯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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