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03

2015. 8. 15. 19:59

퍼시벌이 집으로 찾아온 란슬롯을 맞아주었을 때는 꽤 늦은 시각이었다. 란슬롯은 키예프에서 헤어질 때 입었던 것과 똑같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짙은 밤색의 코트 위에 붙은 이슬비가 현관의 불빛에 반짝였다. 이슬비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 위에도 붙어있었다.


설탕 좀 빌릴 수 있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란슬롯은 씩 웃었다. 퍼시벌은 대꾸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면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난로나 라디에이터를 틀지 않았는데도 훈훈한 공기가 풍겨났다. 기분 좋은 온도를 느끼면서 란슬롯은 제 집인 양 성큼성큼 거실로 갔다. 누런 불빛이 비치는 거실 가운데에는 천으로 된 소파가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책이 서너 권 쌓여있었다.


해리 포터 같은 책도 읽는다고?”

못 읽을 이유는 없잖아.”


란슬롯은 맨 위에 있던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를 집어 들었다. 읽던 곳을 표시하기 위해서 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접혀있었다. 퍼시벌은 한 번도 책갈피를 쓰는 법이 없었다.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도록 깨끗하게 책을 읽는 란슬롯은 책이 접힌 자국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러고는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를 펼쳐서 접힌 자국을 검지로 문지르며 소파에 앉았다. 펼친 페이지에는 해리가 혼혈왕자가 만든 주문을 외는 장면이 나왔다. 섹튬셈프라. 이런 마법을 정말로 쓸 수 있으면 좀 편할 텐데. 란슬롯은 허공에 가상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맞은편에 선 퍼시벌은 지팡이 끝이 자신을 향한 것을 보았다.


그러면 우리도 이런 일을 업으로 하지 않았겠지.”

마법사 세계에는 오러라고 하는 훌륭한 직업이 있는데도? 해리가 오러가 되고 싶다고 하는 대목은 이미 읽지 않았어?”

마법사가 되어도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못 할 것도 없잖아.”


란슬롯은 눈썹을 한 번 들썩였다. 그리고는 접힌 자국 그대로 다시 책장 모서리를 접고 책을 덮었다. 책장을 접으면서 그의 미간은 또 살짝 찌푸려졌다가 두꺼운 책을 탁자 위에 다시 올릴 때 펴졌다. 책이 영원히 새것처럼 유지되는 마법은 없으려나. 란슬롯이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퍼시벌은 란슬롯이 아직 벗지 않은 코트의 어깨부분이 젖어서 더 짙은 색을 띄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갈색의 머리카락도 젖어서 까딱하면 풀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란슬롯은 그런 것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살피던 퍼시벌과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미소나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퍼시벌은 충동적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도 란슬롯은 순순히 입술을 조금 벌려주었다. 퍼시벌이 그를 뒤로 밀어도 그는 소파에 완전히 몸을 기대면서 밀려주었다. 혀가 얽히고 입술끼리 부딪으며 나는 소리가 질척하게 들렸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키스를 하다가 떨어졌다. 퍼시벌은 밝은 전등 아래에서 란슬롯의 입술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란슬롯은 입술을 휴지 같은 것으로 닦아내는 대신에 혀를 내밀어 핥았다. 그리고 그는 퍼시벌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비취와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맑아보여도 속을 읽어내기 쉽지 않은 눈은 순간적으로 열기를 띠었다가 곧바로 잠잠해졌다.


지금 생각보다 피곤하진 않아.”


란슬롯이 여태 입고 있던 코트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또 애매하게 말했다. 하지만 퍼시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임무 중 목표인물에 접근할 때도 이런 식으로 섹스어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퍼시벌은 임무의 목표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란슬롯의 손가락이 꼼지락대는 것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란슬롯은 거절당했음에도 별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자고 가는 건?”

그러려고 온 거잖아.”

집주인 허락은 받아야지.”

가서 씻고 오기나 해.”


욕실을 가리키는 퍼시벌이 뭐가 그리 웃긴지 란슬롯은 실실 웃었다. 욕실 정도는 그렇게 가리켜주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란슬롯은 이미 퍼시벌의 집이라면 눈을 감고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1년 중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한 번 집에 있는 기간은 기껏 길어야 2주일도 안 됐다. 그런데 퍼시벌이 자신의 집에 있을 때는 란슬롯도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거의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는데 퍼시벌은 철저히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란슬롯은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덧붙여서, 사실 그는 진짜 자기 집의 구조는 아직도 헷갈려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란슬롯은 드디어 단추를 풀고 코트를 벗었다. 짙푸른 색깔의 쓰리피스 정장과 적갈색 타이까지 모든 게 그들이 헤어질 때 그대로였다. 퍼시벌은 내심 안도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막연하게 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을 하게 된 지 벌써 20년은 족히 되었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비관적인 감정에 무뎌진 지가 그 정도로 오래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요즘 그의 생각은 좋지 않은 쪽으로만 흘러갔다. 1초 후에 죽는다고 해도 낙관적인 생각을 해보라던 란슬롯의 말이 머릿속을 부유했지만 퍼시벌은 그것을 잡아서 묶어둘 수가 없었다. 둥둥 떠다니는 생각은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그저 막연한 불안감뿐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채로 그는 란슬롯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안감은 그 기다란 뒷모습으로 가서 찰싹 달라붙었다.


퍼랜 퍼시벌랜슬롯 퍼시발랜슬롯 퍼시벌란슬롯 퍼시발란슬롯

'ARCHIVE > KINGS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랜] Life goes on 1  (0) 2015.11.06
[퍼랜] Atonement  (0) 2015.10.04
[퍼랜] 02  (0) 2015.07.28
[퍼랜] 01  (0) 2015.07.22
[퍼랜] 00  (0) 2015.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