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01

2015. 7. 22. 07:16

며칠 째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괜히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뒤틀던 란슬롯은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은 영국에서 사는 사람이 이 정도가 무슨 대수라고. 퍼시벌은 힐끔 란슬롯을 쳐다보고는 다시 단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몸이 근질근질하면 나가서 시위대에 참여라도 해.”

러시아에 찍힐 위험이 없다면 고려할게. 충고해줘서 고마워.”


란슬롯은 전혀 고마워하는 기색 없이 지극히도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퍼시벌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금세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란슬롯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물병을 들고 컵에 쪼르륵 물을 따랐다. 밖에서는 희미하게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왔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시위대가 근처를 지나가면서 소음이 대단했는데 벌써 소리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키예프에서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영하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규모가 커지면서 우크라이나 당국의 진압도 점점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면 시위대도 한층 더 폭력적으로 대항했다. 유로마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시위의 상황은 각종 매체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런 키예프에서 란슬롯과 퍼시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우크라이나로 온 것은 친 러시아계 인사들을 겨냥한 테러를 막기 위해서였지, 유로마이단에 공작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친 러시아계 인사들은 두 사람의 보호가 필요 없었다. 테러위협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벌써 사흘째 키예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위장신분 때문이었다. 그러게 추운 나라에 올 때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신중해야 한다고 했는데. 란슬롯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워냈다.


내일 전용기가 오는 건 확실하겠지?”


퍼시벌은 란슬롯을 힐끔 보고는 손질하던 단도를 둥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단도 옆에는 이미 손질이 끝난 토카레프 TT-33의 총신과 탄창 두 개가 있었다.


보채지마. 멀린은 확실히 비행기를 띄우겠다고 했으니까.”


이제는 안경을 벗어서 안경알까지 닦는 퍼시벌의 대답에 란슬롯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전용기를 타려면 적어도 내일 오후는 되어야 할 테고 그때까지는 백수마냥 빈둥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란슬롯은 축 쳐진 어깨를 했다. 그리고 너무 화려해서 싸구려처럼 보이는 자수가 잔뜩 들어간 쿠션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퍼시벌은 안경을 다시 쓰고 란슬롯의 옆모습을 보았다. 애꿎은 쿠션의 닳아빠진 귀퉁이나 손가락으로 만지작대는 꼴이 퍽 가련해보였다.


란슬롯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무는 것에 소질이 없었다. 예전부터 그는 가만히 있으면 엉덩이에 못이라도 박이는 것처럼 어디로라도 떠나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멀린과 아서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장기임무를 종종 맡겼는데 그가 해내기는 또 곧잘 해냈다. 언젠가 퍼시벌이 그 점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란슬롯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으니까 장기임무로 한 자리에 눌러앉아있는 것도 생각보다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퍼시벌에게 웃어 보였다. 퍼시벌은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가 란슬롯이란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날이 오긴 할까. 퍼시벌은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 중에 하나에 속했다.



 

 

적당히 우러난 원두커피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퍼시벌이 눈을 비비고 침실 밖으로 나왔을 때, 란슬롯은 셔츠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기운이 빠져서 늘어지듯이 앉아있는 그의 손가락 두 개에는 찻잔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찻잔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커피 별로 안 좋아하잖아?”

누구처럼 다기세트를 챙겨서 들고 다니는 진성 영국인은 못 되어서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퍼시벌이 다가가자 란슬롯은 하얀 민무늬의 찻잔을 좀 더 단단히 쥐고 자세를 바꾸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의 움직임에 커피가 조금 출렁이면서 향을 내뿜었다. 퍼시벌은 그 향을 따라 소파에 앉았는데, 소파가 지나치게 푹신하여 앉자마자 몸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이 도통 좋지 못했다. 불쾌감에 퍼시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보고 란슬롯은 피식 웃었다. 웃지 마. 퍼시벌은 잔을 뺏어들고 따뜻한 커피를 조금 들이켰다. 쌉싸래한 맛과 향이 입 안과 콧속을 가득 채웠다.


, 이따 비행기에 타는 건 한 사람이야.”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던 퍼시벌이 란슬롯을 보았다. 란슬롯은 갑자기 즐거운 생각이 떠오른 아이처럼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앞섶을 풀어놓았던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잠가나갔다. 퍼시벌은 그제야 란슬롯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한쪽으로 넘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린은 날 잘 알잖아. 우리 퍼시벌보다는 못하겠지만.”


첨언 끝에 웃음기가 붙어있었다. 란슬롯은 곧 단추를 모두 잠그고 셔츠의 끝자락을 잡아당겨 펴고는 퍼시벌을 보았다. 퍼시벌은 잔을 유리로 된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란슬롯의 두 눈이 생기를 되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는 더 이상 어제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소파에 멍하니 앉아만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란슬롯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의자 위에 한쪽 발을 턱 올리고 셔츠 끝자락에 매달려있던 셔츠 스테이를 양말의 끝부분에 연결했다. 헐렁한 속옷과 허연 다리 위로 검은색의 셔츠 스테이가 교차되어 길게 늘어났다. 그 선을 따라서 퍼시벌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란슬롯은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방으로 들어가 얼른 말끔하게 옷을 다 차려입었다. 퍼시벌은 그새 식은 커피를 그대로 두고 침실의 문가에 기대어서 거울을 보고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가며 머리모양을 다시 살피고 있는 란슬롯을 보았다.


어디로 가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네.”


란슬롯이 거울을 통해서 퍼시벌을 보았다.


추운 나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다, 뭔가 있으니까 가보라는 거겠지.”


란슬롯은 애매하게 말했다. 그는 절대로 정확하고 자세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었다. 퍼시벌은 대꾸하지 않고 갈색의 뒤통수를 보았다. 란슬롯은 적갈색의 타이를 잡고 위치를 똑바로 조정한 다음에 정장 재킷의 밑단을 잡아당겨 옷을 펴고는 돌아섰다. 그러고는 양 팔을 좌우로 약간 벌렸다. 하지만 퍼시벌은 움직이지 않았고, 란슬롯은 양 팔을 조금 휘적거리는 것으로 그를 재촉했다. 그제야 퍼시벌은 란슬롯에게 다가가서 그를 껴안았다. 어린 애도 아니고. 퍼시벌이 귓가에 대고 작게 툴툴거렸다. 그러자 란슬롯은 양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고는 킥킥대며 웃더니 퍼시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 냄새가 그의 폐 속까지 스며들었다.


곧 팔에 힘을 풀고 떨어져나간 란슬롯은 옷걸이에 걸려있던 두꺼운 코트를 입었다. 짙은 밤색의 코트는 무겁게 그의 몸을 감쌌다. 그가 코트의 앞을 여미고 고개를 들었을 때, 퍼시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란슬롯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인사말을 하지 않고 숙소를 빠져나갔다. 나중에 다시 보자는 인사는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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