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00

2015. 7. 21. 20:25

피로가 몰려왔다. 오랜 시간 잠을 자지 못해서 눈꺼풀이 더 이상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하여 자꾸만 시야가 점멸했다. 눈물이 말라버렸는지 뻑뻑한 눈은 손으로 문지르지 않아도 이미 벌겋게 핏발이 서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도 안구를 충분히 적셔줄 만큼의 눈물이 나오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면 날숨과 함께 그나마 남은 기력도 모두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축 처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퍼시벌은 허리를 곧게 폈다. 모두가 곁눈질로 그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타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자의로 그러기를 원하기도 했으므로 퍼시벌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에도 몇 없는 조문객들이 주인 없는 관에 흰 꽃을 내려놓는 지난한 과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퍼시벌은 작은 예배당의 뒤편에 꼿꼿하게 서서 관 앞의 줄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제 줄을 선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고, 하얀 수선화 다발은 여전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줄어드는 사람들의 행렬과는 반대로 관 속에 쌓여가는 하얀 꽃들이 자신에게 지독한 피로감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그가 흰 수선화들을 등 뒤로 감추고 있는 것도 조금이나마 피로를 덜어보려는 자기방어적인 행동이었다. 부질없는 짓을. 퍼시벌은 자조를 삼켰다.


행렬의 맨 끝에 있던 가웨인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원래는 관 속에 있어야 할 이의 모습을 그려보기라도 하듯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의 시선은 뚜껑이 열린 관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이정표가 없어서 헤매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던 가웨인이 돌아서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장례식 참석자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나면서 퍼시벌을 힐끔 보았다. 이제 퍼시벌만이 손에 꽃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퍼시벌은 가웨인이 관 앞을 떠나고도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약간은 발을 질질 끄는 모양새였다. 검은색 옥스퍼드가 붉은 카펫을 스치면서 내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울려서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이목이 집중되자 퍼시벌은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꽃다발을 든 손에 조금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러자 하얀 종이가 힘없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냈다.


주인 없는 관 앞에 다다랐을 때, 퍼시벌은 고개를 살짝 숙여 관 속을 보았다. 텅 비어있던 관은 이제 흰색 일색의 꽃들로 채워져 있어 마치 관의 주인이 꽃인 것 같았다.


꽃의 시신, 꽃의 관, 꽃의 무덤.


흰 꽃들이 이룬 산을 보던 퍼시벌은 허리를 숙여서 흰 수선화 다발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위로 올려놓았다. 수선화의 달콤하면서도 박하향이 섞인 독특한 향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너울거렸다. 그 향에 퍼시벌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으나 꼴사납게 비틀거리지 않도록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어서 정신을 맑게 하려고 애쓰며 다시 똑바로 관 앞에 섰다. 그는 다시 뻑뻑한 눈을 억지로 여러 번 깜빡였다. 단단한 마호가니로 된 관과 그 속의 흰 국화더미 위에 놓인 흰 수선화 다발, 그 모두가 그에게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 피로감의 근원이 정말 그의 눈앞에 있는 것들인지 퍼시벌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을 뻗어서 백수선화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꽃에 파묻힌 어떤 형상 하나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퍼시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피로감을 안겨주는 진짜 근원.


잠깐 그 형상을 바라보던 퍼시벌은 꽃의 산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손을 거두고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돌아섰다. 갑자기 무언가가 그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짓누르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는 토악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면서 참았다. 그런 그를 멀린이 축 쳐진 눈썹을 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서 갤러해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쌍의 눈알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퍼시벌은 그들의 시선을 최대한 무시하며 그대로 무거운 문을 밀어젖히고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장례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도저히 이 장소에 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퍼시벌이 레퀴엠도 울리지 않는 성당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그가 탄 차가 건물들 사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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