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처럼 쩌억 입을 벌렸다가 닫으면서 란슬롯은 당장 새가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얼빠진 생각을 했다. 귓가에서 왱알대는 목소리는 패러데이 법칙을 운운하며 무언가 전기적인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듯했는데 영 귀담아 듣고 있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를 테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하는 중이었다. 패러데이가 코일을 몇 번이나 감았단 말이야? 란슬롯은 이제 얼굴도 모르는 패러데이라는 남자가 날아가던 새를 붙잡아서 코일을 칭칭 감는 상상을 했다.

란슬롯이 팔자에도 없던 전기공학 강의를 듣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애초에 대학의 문턱을 밟아본 지도 10년은 더 된 그가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이번 일에 관해 브리핑을 하던 멀린의 표정도 떨떠름했으니 본인은 오죽했으랴. 란슬롯은 다만 저편 강의실에 있을 또다른 중생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이 한 명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적잖은 안심이 되었다. 고통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했으니 고통도 인수분해가 가능... 젠장. 란슬롯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제 강의가 끝날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내일 마저 하지요."

렉쳐러(lecturer)의 마지막 말에 학생들이 곧장 짐을 싸느라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란슬롯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낙서나 끄적이던 공책과 만년필을 갈무리 하고 얼른 강의실을 나와 렉쳐러를 찾았다. 렉쳐러는 그의 뒤를 따라잡은 란슬롯을 확인하고는 사람좋게 웃어보였다.

"들어줄만 했습니까, 녹스 씨?"
"잭이라고 해주세요. 지금 하고 계신 실험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부분이 흥미롭더군요. 비록 전자기 유도에 관해서 배웠던 건 까마득해서 공식이나 겨우 떠올렸지만 그걸 응용한다는 것은 참신한 발상이었어요."
"같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이 낸 아이디어였는데 똑똑한 친구입니다. 압둘 알자디라는 학생인데 질문을 많이 하죠. 앞으로 종종 볼 겁니다, 잭."
"그렇군요."
"아, 실험실에 잠시 들러야겠어요. 원하신다면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연구실에 가서 아직 들여다봐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감사합니다만 실험실에는 다음에 들르죠."

렉쳐러는 고개를 약간 까닥이며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돌아설 때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란슬롯은 이내 한숨을 폭 쉬었다. 킹스맨에 몸 담은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는데 대학교에 위장임무를 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강의를 듣고 있다가 나오는 고역을 치르는 것은 이제 끝났지만 앞으로 더 큰 고역을 치러야할 터였다. 최근들어 국내에서 종종 테러를 일으키는 이슬람 무장과격단체가 대학에서도 조직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킹스맨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파이로 일하던 사람이 대학의 강단에 서는 것은 아무리 임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것이 혼자가 아닌 둘이라 그나마 다행인 것인지 불행인 것인지. 란슬롯은 연구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옆 강의동으로 향했다.

유리로 둘러싸인 건물은 시각적으로 아주 보안이 취약했다. 아직 강의가 계속되고 있는 몇몇 강의실은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란슬롯은 그 몇몇 강의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걸었다. 2층의 세 번째 강의실에 그가 찾던 사람이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퍼시벌이었다. 세상에 퍼시벌이 하는 강의라니, 놓칠 수 없어. 퍼시벌이 맡은 강의는 두 시간 짜리였으므로 아직 끝나려면 한 시간가량이 남아있었다. 란슬롯은 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란슬롯과 함께 이 유례없는 임무를 하게 된 퍼시벌은 미술사학을 맡았는데 킹스맨 내에서도 그는 알아주는 수집가였다. 휴가가 나오면 그는 빠짐없이 전시회를 찾거나 경매장을 기웃거렸다. 수집을 하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미술사에 대해 말하자면 갤러해드를 이겨먹을 수도 있었다. 란슬롯은 퍼시벌의 집 벽면을 장식한 몇 점의 그림과 장식대에 놓인 조각들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그가 퍼시벌 몰래 집에 들어가 이벤트랍시고 일을 벌이던 중에 숨을 곳을 찾다가 우연히 수집품이 가득한 장소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정말이지 그때 보물창고를 발견한 줄 알았다.

퍼시벌은 종종 란슬롯에게 각 작품의 미술사학적인 가치를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해주는 미술사학 강의라니 이 얼마나 진기한 강의인가 말이다. 란슬롯은 슬그머니 뒷문을 열고 강의실에 잠입했다. 이런데 쓰라고 배운 기술이 아니었지만 그는 몰래 소리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 착석했다. 퍼시벌은 예상외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학생들 대부분이 잘 집중하고 있었다. 란슬롯은 칠판 앞에 서있는 퍼시벌을 보았다. 퍼시벌은 종종 란슬롯에게 했던 것처럼 묘하게 열정을 띤 눈빛과 목소리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절제할 줄 알기에 감추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열정을 보이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보물과 이 분야에 열정을 보일 때마다 란슬롯은 그에게 애정이 샘솟았다. 물론 그에게 가장 많은 애정이 샘솟을 때는 침대 위에서였다. 퍼시벌은 침대 위에서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니까.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란슬롯은 멍하니 퍼시벌을 보았다. 늘 갑갑하게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던 차림이 아니라 목을 감싸는 폴라 티셔츠에 평범한 정장을 걸친 퍼시벌은 진짜 직업이 렉쳐러인 것 같았다. 란슬롯은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스파이가 아니라 정말로 렉쳐러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자신도 스파이를 그만뒀을 것이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퍼시벌이 그를 쳐다본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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