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의 얇은 커튼은 빛을 그대로 투과시켜 방 안을 비추었다. 작은 먼지가 그 빛 아래에서 즐거운 듯이 춤을 추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꽤나 차분하고 묵직하여 빛이 있음에도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퍼시벌은 문이 열린 옷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 앞에 서서 옷장 문에 걸려있는 비슷비슷한 색과 무늬의 타이들을 보고 있었다. 어둡고 짙은 색이 대부분인 십 수 개의 타이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밝은 색이어서 눈에 띄는 색을 가진 것이 두어 개 섞여있었다. 퍼시벌은 밝은 색의 타이를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가 그 옆의 새까만 타이를 집어 들었다. 검정색의 타이는 실크로 만들었는지 퍽 부드러운 감촉을 지녔다. 퍼시벌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침대 위에 올려둔 흰색의 셔츠 위에 놓았다. 그 셔츠 아래에는 역시 아무런 무늬도 들어가지 않은 검은색의 정장 한 벌이 잘 개켜져있었다.

 

옷장의 문을 닫으면서, 퍼시벌은 지금 이 상황이 우습게도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침대 위의 옷이었다. 형광물질이라도 첨가한 것처럼 새하얀 셔츠, 검은색 일색의 정장 한 벌과 역시 검은색인 타이라니. 그는 다소 차가운 것 같은 방 안의 공기에 부르르 떠는 것처럼 잠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답지 않게 폭소를 터뜨릴 것 같아서였다.

 

킹스맨의 기사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정장을 입곤 했다. 유니폼이 정해져있는 학교의 학생들도 아니고 그들에게 지정된 드레스 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옷을 통해 유대감이라도 표하는 것처럼 다들 거의 똑같은 색과 패턴으로 만들어진 정장을 입었다. 퍼시벌은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딱히 그것을 문제로 삼아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조금 다른 옷을 입고 다니던 자가 있었다. 회의를 할 때 퍼시벌의 왼쪽 자리가 지정석인 란슬롯이었다. 다들 맞춘 것처럼 옷을 입을 때 혼자만 다른 옷을 입던 그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퍼시벌은 그가 자신의 맞은편 자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답답하게들 구시네.”

 

아마 처음으로 퍼시벌이 그의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때였을 것이다.

 

란슬롯?”

 

아서는 회의의 흐름을 끊은 란슬롯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그의 코드네임을 불렀다. 란슬롯은 퍽 시니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퍼시벌은 조금 놀랐던 것 같기도 했다.

 

아서, 2주 전에 제가 텔아비브에는 왜 갔다 왔는지 아십니까?”

이란에서 탈출하여 망명을 요청한 물리학자 때문이었지.”

그리고 모사드의 오해로 그들과 때 아닌 전쟁을 벌이고 돌아온 제가 받은 대가는요?”

수배령이라면 멀린이 힘써주지 않았나.”

 

란슬롯은 그 지점에서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미소를 활짝 지어보였다가 금세 무표정해졌다. 그는 꽤나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이 만찬장에서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는 란슬롯이 가장 나이가 어린 기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고 생각했었다.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서, 저는 오히려 그걸 역이용하여 이번 문제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이후에도 란슬롯은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했다. 퍼시벌은 회의가 끝난 이후에야 란슬롯이 우스꽝스럽게도 명도가 높은 파란색의 미국식 정장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퍼시벌은 흰색의 커튼 앞으로 다가섰다. 그때의 회의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후부터 그는 란슬롯에게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퍼시벌은 커튼의 틈새로 보이는 창밖을 보았다. 과거형의 서술이 갖는 무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퍼시벌은 커튼 사이의 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도록 양쪽의 커튼을 최대한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는 다시 침대가로 와서 옷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옥죄어오는 것처럼 목이 답답했다. 그는 타이를 조금 풀어헤치고 셔츠의 단추를 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흰 셔츠 위의 검은색 타이와 검은색 정장.

 

12시간 뒤, 퍼시벌은 미련이 남는 모든 수식어와 호칭을 떼어버리고 오롯이 진짜 이름만 남은 이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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