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KINGSMAN

[퍼랜] 02

2015. 7. 28. 02:10

퍼시벌은 나중에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야 멀린으로부터 란슬롯이 체첸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눈두덩을 문지르면서 소파에 앉았다. 전용기 내부에 있는 고급가죽소파는 키예프의 낡은 호텔방에 있던 것과는 달리 앉으면 푹 꺼지지도 않았고 가죽이 부대끼는 소리만 약간 났다. 멀린은 란슬롯의 목적지 외에 맡은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까지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요원들 간에 임무와 관련된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신뢰성의 문제가 아니라 충성도의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 계속해서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항상 그 충성심을 시험받는 것과도 같았다.


문득 퍼시벌은 피식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편안한 소파에 기댄 채로 충성심을 운운하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지 않나. 그는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 위에서 치렀던 조잡한 시험을 떠올렸다. 퍼시벌의 이름을 갖기 전의 그는 그 시험을 어떻게 치렀고, 란슬롯의 이름을 갖기 전의 제임스는 그 시험을 어떻게 치렀던가. 퍼시벌은 철로가 진동하던 감각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던 철로는 여전히 그들 아래에 있었다.



 

 

체첸에서의 일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란슬롯은 범인을 특정한 것 외에 별다른 성과 없이 집단학살의 장면만을 보고 돌아왔다. 체첸의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 돌연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FSB의 데이터를 해킹하여 얻어낸 영상을 통해 본 그들은 실로 광기에 휩싸여서 완전히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같은 편을 공격했다. 사건은 하룻밤사이에 일어났는데 무장한 분리주의자들은 세 시간도 채 안 되어서 85%정도가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죽었거나 곧 죽을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뜻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므로 민간인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희생자가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사건현장은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란슬롯이 킹스맨에 몸담고부터 끔찍한 장면들을 많이 보아왔다고는 해도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는 시신들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완전히 멀쩡할 수는 없었다. 그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장면에 이질감을 느꼈고, 곧이어 약간의 현기증도 느꼈다.


그럼에도 란슬롯은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사건현장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혈액을 비롯한 몇 가지 샘플들을 챙겨 품에 고이 모셔왔다. 그는 다른 때보다 이 샘플을 챙기는 일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이번 일은 작년에 우간다에서 있었던 사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우간다 사건은 한 게릴라 부대가 집단으로 심각한 정신적 질환을 보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사소한 것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보이며 상대가 죽을 때까지 구타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먹을 것이 있음에도 시체를 먹어치우는 등의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당시에는 국제구호기구를 제외하고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게릴라 부대가 약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부터였다. 누군가가 게릴라 부대의 식수공급 시스템에 합성 카티논을 대량으로 풀었던 것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 국제구호기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우간다의 수사기관보다는 제3국의 정보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건이 붙었다. 내전 중인 우간다에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첩보활동은 훗날을 위해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선뜻 나서는 정보기관이 없어서 국제구호기구마저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는 동안에 비슷한 사건은 소말리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처럼 내전을 겪고 있는 다른 국가에서도 벌어졌다. 킹스맨이 움직인 것은 그쯤에서였다. 비슷한 패턴의 사건들이 빈발하는데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데다가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점이 충분히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킹스맨에서 뒤늦게 조사를 시작하고, 용의자가 어느 정도 추려졌을 때는 이미 범인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범인이 이번엔 체첸에 나타나서 오랜만에 일을 벌인 것이었다.


사실 이번 체첸의 경우에는 언뜻 보면 FSB의 소행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키예프의 시위가 반러시아, 친유럽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심기가 불편한 상황에서 체첸의 무장분리주의단체까지 말썽을 부리면 FSB로서는 큰 골칫덩이를 껴안게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FSB는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사건 관련 데이터를 모두 수거하고 없애버린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이는 즉,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뜻이었다. FSB의 데이터에는 진범이라는 단어가 쓰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진범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요원 하나가 어느 용병대와 접촉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용병대는 공교롭게도 우간다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들 중에 하나였다. 용병대와 FSB의 요원은 다양한 루트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로즈니시외에서 접선했다. 그리고 약 1주 후에 분리주의단체 사건이 벌어졌고, 용병대와 접선했던 FSB 요원은 그 일을 덮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란슬롯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간다에서부터 체첸까지 이어진 사건들의 범인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병대원들의 정체가 뭔지, 용병대를 움직이는 배후는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FSB의 데이터를 그 이상 깊게 파고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그가 데이터를 좀 더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거기에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미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만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의 모험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란슬롯은 용병대가 목표대상을 살해한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그가 용병대의 방식에 주목한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도 이상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우간다에서부터 체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목표대상을 직접적으로 살해하지 않았다. 대신에 합성 카티논과 같은 약물을 이용하여 대상이 약물에 중독되도록 하였고 약물에 중독된 이들이 서서히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같은 편을 공격하여 죽였다. 용병대는 손도 대지 않고 대상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껏 목표대상이 된 단체가 전멸한 경우는 없었다. 또한, 사용된 약물의 양은 계속해서 차이를 보였다. 도대체 용병대는 무엇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일까? 고민하면서 자료를 살피던 란슬롯은 약물 양의 변화와 사상자비율을 나타낸 도표에 주목했다. 그래프는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약물을 복용한 후에 사상자를 내기까지 걸린 시간도 사건마다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란슬롯은 그래프를 몇 번이나 더 확인해보고는 퍼즐조각이 드디어 다 맞춰진 느낌에 작게 탄성을 냈다.


실험이라고?”


멀린은 느긋하게 밀크티를 마시는 란슬롯을 보았다. 손가락을 세 개만 사용해서 찻잔을 든 채로 란슬롯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먼저 우간다의 경우를 보면 용병대가 굳이 합성 카티논을 식수공급 시스템에 풀어놓을 이유가 없어요. 생각해봐요. 게릴라 부대를 없애려고 약을 풀어놓는다면 마약성 물질이 아니라 치사량에 달하는 독을 풀어서 죽이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긴 하지만 굳이 식수에 약을 풀어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우간다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에 있었던 사건들에 쓰인 약물의 양과 사상자의 수를 그래프로 표현해보면 놀라우리만치 특정한 수치 변화를 보이고 있어요. 이번에 체첸에서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 사건들과 패턴이 99%이상 일치하는 동일범의 소행이에요. 아프리카대륙에서 자리를 옮긴 것뿐이죠.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이 같은 약물을 이용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상자비율이 87%이상으로 비약적으로 높아졌어요. 처음 우간다에서 54%정도의 비율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아진 거죠. 비슷한 사건이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곳이 앙골라였는데 그때도 68%에 그쳤어요. 게다가 체첸에서는 반응시간도 훨씬 단축됐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더 강력한 약물을 썼을지도 몰라요. 결과는 가져온 샘플이 말해줄 거고.”


란슬롯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각설탕이 든 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각설탕을 꺼내지 않고 잠시 망설이며 손가락만 움찔거렸다.


러시아는 여전히 까칠하게 굴어요. 용병대가 자취를 지우고 떠나는 것까지 도와주고는 끝까지 오리발이더군요. 덕분에 데이터를 다 뒤지고 다녀야했으니.”

까딱하면 큰일이라도 날 뻔했단 소리로 들리는데.”


빙고. 란슬롯은 결국 각설탕 하나를 퐁당 소리가 나게 찻잔에 떨어뜨렸다. 그는 티스푼으로 밀크티를 휘저으면서 멀린을 보았다. 멀린은 눈썹 끝만 꿈틀거렸다.


얼른 마시고 가서 쉬기나 해. 그리고 말해준 사항을 참고하여 좀 더 조사해보도록 하지.”


란슬롯은 돌아서는 멀린의 뒷모습을 힐끔 보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더 편하게 기대었다. 밀크티는 여전히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찻잔의 절반이 넘게 남아있었다. 양 손으로 컵을 감싸서 마시자, 조금 더 단맛이 강해진 밀크티는 부드럽게 입 안을 적시고 위장으로 흘러내려갔다. 이것도 쉬는 것에 속하지, . 속을 따뜻하게 적시는 액체에 란슬롯은 여기서 조금 더 티타임을 즐기는 사치를 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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