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안 풍으로 꾸며진 방 안은 똑딱거리는 시계소리가 조금 거슬릴 정도로 조용했다. 다소 딱딱한 소파에 불편해보일 정도로 정자세로 앉아있던 일리야는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은 채로 웨이벌리를 보고 있었다. 호로록 하는 소리와 함께 적당히 따끈한 밀크티를 들이마신 웨이벌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요. 거부권이 없지 않습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늘은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

 

일리야는 건조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정리되어 나오는 말이 없어서 그는 입 안에서 혀만 조금 굴렸다. 그러다가 그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서류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일지는 아직 알지 못했음에도 그는 자신이 지금 시험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방의 자본주의 국가로 전향한 옛 러시아인을 상대로 정보를 빼오는 것은 적어도 일리야에게만큼은 말만 쉬운 일이었다. 그가 이전에 소련인을 상대로 공작을 펼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엉클이, 그것도 일리야가 맡기에는 지나치지 않은가. 일리야는 당장에 입을 열었다가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거절의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웨이벌리는 입을 조금 우물거리다가 마는 일리야를 힐끔 보았다. 일리야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웨이벌리는 그가 결국엔 이 일을 하고야 말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일리야는 곧 누런 서류봉투를 조심스럽게 집었다. 그는 마치 그 안에 봐서는 안 될 것이 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봉투 윗부분을 꾹 눌러 접고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인사말도 없이 꾸벅 고개만 숙이고 방을 나갔다. 달칵 하고 닫히는 문을 보고 웨이벌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엉클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는 일리야가 제발 이번 일을 성공시키길 바랐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엉클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세계를 반으로 갈라놓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이 조직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웨이벌리는 생각보다 엉클을 위해 할 일이 많은 것을 금세 깨닫고 가비, 나폴레옹, 일리야 세 사람을 뺑뺑이 돌리듯이 여기저기로 보내 닥치는 대로 필요한 정보를 다 모아야만 했다. 알력싸움의 바깥에 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때로 세 사람을 한 팀이 아닌 개개의 말로 굴려야 할 때도 있었고, 심지어 웨이벌리가 직접 나서야 할 때도 꽤 많았다. 껄끄러운 일도 마다치 않아야 했는데 가장 걸릴 것이 많은 일리야가 이번만큼은 나서주어야만 했다. 아마 올렉에게 이 일이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도 모두 일리야가 일을 성공시켜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일리야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봉투를 노려보았다. 웨이벌리는 옛 소련인이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 정보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거기까지 알 필요가 없기에 그런 것이겠지. 일리야는 나름대로 웨이벌리가 뒷일을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리야의 입장은 이 임무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난처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내려다본 자신의 왼손이 허벅지 위에서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고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갑자기 그는 나폴레옹 솔로가 보고 싶어졌다. 가비와 함께 이미 임무를 나간 나폴레옹을 볼 시간은 당분간 없을 터였다. 일리야는 입이 쓴지 입맛을 다셨다.

 

 

*

 

 

일리야는 생각보다 일을 잘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는 서류봉투에 자세하게 쓰인 지시사항을 그대로 잘 따르면서 목표대상의 빈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옛 소련인의 경계는 높아서 벌써 사흘째 일리야는 별 소득 없이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최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시간만 보내다가는 임무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기한은 딱 나흘이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끔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6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결단을 해야 했다.

 

유리잔을 톡톡 두드리면서 펍의 한 구석에 서 있던 일리야는 잔에 조금 남아있던 위스키를 몽땅 들이켰다. 행동하기로 한 것이었다. 옛 소련인은 곧 집에서 나와 늘 가던 하우스에서 포커를 두어 시간쯤 치고 술을 한두 잔 걸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간의 관찰결과를 떠올리며 이리저리 시간을 계산해보던 일리야는 팁으로 줄 동전 몇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대충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금고를 따는 것은 그의 전문영역이 아니었지만, 뭐라도 건지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술이 묻은 입술을 소매로 훔치면서 펍을 나왔다.

 

일리야가 옛 소련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의 예상대로 집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뒷문으로 가서 나폴레옹에게 배운 간단한 문 따기 기술을 써먹었다. 잠겨있던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처음으로 나폴레옹과 함께 잠입했던 공장에서 일리야는 자신이 문을 열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어두운 집 안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들어서는 지금 나폴레옹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그때와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 안의 거실은 꽤나 넓었다. 도청기를 설치하느라 이미 들어왔던 곳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다시 보니 새로웠다. 넓은 거실을 재빨리 둘러본 그는 그곳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연결된 부엌 옆의 계단으로 향했다. 카펫이 깔린 계단은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대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온 일리야는 네 개의 문들 중에서 화장실임이 분명한 맨 왼쪽 방 바로 옆의 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흰색의 나무문을 열어보니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서재가 나왔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이 얼른 일리야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책상 위는 강박적일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책장에 꽂힌 책들도 그 높이가 일정했다. 책장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심지어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지난 3일간 봐왔던 옛 소련인은 이 정도의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에 무언가 있구나. 일리야는 서재의 가운데로 와서 섰다. 이 공간에 그가 찾고 있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리야는 무작정 그 서재 안의 무언가를 뒤져보기가 꺼려졌다. 어차피 그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다면 옛 소련인은 자신의 서재를 엉망으로 뒤져본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일리야를 감싸오기 시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또 왼손으로 허벅지 위를 툭툭 두드렸다. 침착하자. 일리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임무를 하면서 이성을 잃어서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남겨진 흉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건지 여전히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머리가 차가워지곤 했다.

 

곧 일리야는 눈을 뜨고 다시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는 책등을 빠르게 맨 위부터 아래까지 눈으로 훑었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책들이 마지막까지 제대로 정렬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깨졌다. 하지만 일리야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얼른 옆의 책상으로 옮겨갔다. 깨끗한 책상 위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손을 뻗어 책상 밑을 더듬었다. 책상의 안쪽까지 더듬어보니 그의 손에 작은 편지봉투가 걸려들었다. 일리야는 얼른 그것을 떼어내고 몸을 바로 했다.

 

꼼짝 마시지.”

 

옛 소련인의 목소리였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리야는 침을 삼켰다. 이런 질문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돌아서라는 투박한 영어가 한 번 더 들렸다. 일리야는 작은 편지봉투를 든 채로 양 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왔지? CIA? KGB? , , 아무래도 상관없어.”

 

형형한 눈빛을 내는 옛 소련인과 눈이 마주친 일리야는 그가 늘 이런 상황을 대비해왔음을 알아챘다. 그가 들고 있는 마카로프 권총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리야는 자신이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따지기를 이미 포기했다.

 

그것을 이리 내. 그리고 무릎을 꿇어.”

 

일리야는 순순히 들고 있던 흰색의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옛 소련인은 그것을 홱 낚아채갔다.

 

이게 마지막이 될 줄은 네놈도 몰랐겠지.”

 

옛 소련인은 카펫 위로 무릎을 꿇고 앉은 일리야의 미간 사이를 정확하게 겨누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일리야는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하지만 이런 결말도 그런대로 말은 되었다. 일리야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의 마지막이 이것이라면 오히려 그에게는 나은 결말일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옛 소련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몇 초도 되지 않아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그는 죽을 것이다. 일리야는 다시 나폴레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보고 왔어야 했는데. 그것 하나만 조금 미련이 남았다.

 

푸슉.

 

소음기를 단 총에서 총탄이 발사될 때의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는 마카로프에 소음기가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직 그는 사고라는 것이 가능했다. 내가 죽지 않았단 말이야? 그는 조금 멍청해진 기분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나, 빨갱이(red peril)?”

 

일리야는 나폴레옹 솔로가 그의 눈앞에 서 있음에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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