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는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까맣게 옻칠이 된 문 뒤로 숨기고 있던 토카레프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와 나폴레옹을 소파에 앉히기는 하였으나, 그를 대하는 일리야의 태도는 영 어수선했다. 나폴레옹은 휑하니 정말로 필요한 가구만 있는 공간을 둘러보고는 어정쩡하게 선 채로 있는 일리야를 보았다.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일리야는 아까 문 밖의 나폴레옹을 보았을 때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또 도망가는 자신을 너무 쉽게 잡아서? 나폴레옹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추궁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침착하게 질문들을 내리누르는 편을 택했다.

 

계속 서 있을 참인가 봐.”

 

나폴레옹의 말에도 일리야는 잠시 그 자리에서 꾸물거리며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내 나폴레옹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은 그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나폴레옹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켜서 혼나기 직전이 된 어린 애의 모습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무슨 짓을 하다가 들킨 거지? 나폴레옹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똑딱이는 것을 보았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일리야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지는 천천히 알아 가면 될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침착하게 할 말을 골랐다.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진 않고?”

위치추적기, 위치추적기가 있었겠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대답한 일리야는 자신이 진작 위치추적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잊은 채로 혹시 모를 추적을 따돌리겠답시고 이리저리 빙빙 돌아다녔다니 완전히 바보 같은 짓을 한 셈이었다. 괜히 날을 세우긴 했어도 안심이 되어 풀어졌던 모양이었다. KGB에서 그들을 쫓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잔뜩 풀어지다니, 일리야는 자신이 확실히 요원 생활과 멀어진 지 오래되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만약에 KGB가 위치추적기를 남겨둔 것이었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기와 그레이엄부부까지 모두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한 기운이 일리야의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지킬 것이 적은 그와 같은 사람은 뭐든지 실수가 없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나마 갖고 있는 것마저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덩달아 미간을 찌푸린 나폴레옹은 가볍게 던진 질문을 일리야가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그는 일리야가 방금 무엇에 대해 생각한 건지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저를 놓친 KGB의 추적을 걱정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헐렁해진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를 입은 일리야의 마른 어깨를 감싸고 더 이상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엔 그들 사이에 꽤나 많은 질문이 놓여있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아래로 내리깐 푸른 눈을 보았다. 그는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도 차근차근히 다 풀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리야.”

 

일리야는 말없이 시선을 올려서 나폴레옹을 보았다. 나폴레옹은 그와 눈을 맞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추궁하거나 심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다고 궁금한 게 없다는 뜻은 아니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시간은 많아. 다른 걸 걱정할 필요도 없고.”

.”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만 일리야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는 나폴레옹이 진실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아는 나폴레옹 솔로라면 진실을 알고 다시는 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저를 쫓아올 거라는 것도 그는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방 안에 두 사람의 아이가 잠들어 있고, 여태껏 그가 기꺼이 사방의 눈을 피하려고 발버둥 쳤던 것도 모두 그 아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밝힌단 말인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일리야는 다시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상기시켜야만 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걸리는 것도 그는 애써 무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과연 무슨 말을 해주어야 나폴레옹이 납득한단 말인가. 일리야는 단어들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물에 걸리는 고기떼처럼 턱턱 걸리고 있다고 느꼈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은 그 두 가지를 파악하는 일에도 능했다. 이는 요원이라면 응당 훈련받는 기술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기술적인 면보다는 개인의 재능에 달린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리야에게는 불행하게도 나폴레옹은 거기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게다가 진실을 갈구하고 있는 현재의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더더욱 촉각을 곤두세울 것임이 틀림없었다. 일리야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위치추적기의 존재를 진작에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더 탓해야만 했다. 그의 마음이 점점 더 초조해져갔다.

 

일리야.”

나는, 나는 아직 말 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긴 손가락들이 피아노 건반이라도 두드리는 것처럼 탁자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일리야가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 예전그대로였다. 나폴레옹은 잠시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는 오른손을 뻗어서 탁자 위를 두드리는 일리야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손보다 좀 더 크고 긴 손이 살짝 움찔거리더니 금세 힘을 빼고 얌전히 잡혀들었다. 하지만 일리야는 여전히 약간 인상을 쓰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폴레옹을 보았다.

 

시간은 많다고 했잖아.”

하지만.”

 

나폴레옹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도 말을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뒷말을 삼킨 일리야는 한숨을 내뱉는 대신에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깨어나 울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끝까지 숨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단지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디 나폴레옹이 용서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아이가 전혀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아이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일리야는 평생을 숨어살면서 전전긍긍한다고 해도 그건 모두 제몫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나 나폴레옹이 짊어지게 할 수 없는, 오롯이 일리야 쿠리야킨의 몫. 그에게는 그리 힘든 것도 아니었다. 조각난 시간 이후부터 그는 계속 그렇게 살아왔지 않았던가.

 

일리야는 나폴레옹에게 잡혀있던 손을 슬며시 뺐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일리야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아무것도 없는 탁자 위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쓸데없이 이리저리 튀던 단어들이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사라져갔다. 기나긴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것처럼 일리야는 이번에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참이었다. 설사 나폴레옹이 이전에 가비의 삼촌 루디가 그에게 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한다고 해도 그는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이다. 굳게 다짐하고 나니 개운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엉클 활동을 하면서 많은 방면에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지.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고. 나도 모르게 거기에 동화되어 갔다. 특히나너를 만나고서는 더더욱.”

 

일리야는 말을 덧붙이면서 시선을 들어 나폴레옹을 쳐다보았다.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손이 빠져나가고 허전해진 손을 손목시계 위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한 쪽에 밀어뒀어. 상관에게 보고하는 서류에도 차츰 한두 가지씩 생략되는 것들이 늘어갔지. 다행히도 올렉은 나를 의심하지 않았고, 나는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영원히 갈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그렇지 않나?”

 

나폴레옹은 얼굴을 굳혔다. 그는 일리야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좀 전까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던 일리야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짓을 벌였다고? 일리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 내가 거짓으로 이렇게까지 꾸며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카우보이, 그건 착각이야.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나는 거짓말에 그다지 소질이 없거든.”

세상에, 일리야!”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네가 KGB에서 그렇게까지 고문을 당했던 건 대체 뭐야? 젠장, 일리야,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대체 왜!”

이게 사실이라니까!”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악보에서 크레센도를 만난 것 마냥 점점 커져갔다.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던 나폴레옹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일리야가 하는 말이 진실일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견고하게 쌓은 성벽을 주변에 두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심산임에 분명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대체 무에가 있기에 그러는지 모를 답답한 심정에 나폴레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어.”

믿어야 해.”

믿을 수 있어야 믿지 않겠어?”

믿을 수 있어. 그래야만 하고.”

아니, 그럴 수 없ㅇ…. 빌어먹을젠장!”

 

욕지거리가 나폴레옹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 일리야는 인상을 썼다. 이렇게 시끄럽게 언쟁을 했다간 달갑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폴레옹, 부탁인데 조용히 말해.”

, 조용하란 말이.”

시끄럽잖아. 이건 대화가 아냐.”

, 잠시만. 이게 무슨 소리지?”

 

입술 앞에 검지를 갖다 대는 나폴레옹을 보고 반사적으로 일리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기 울음소리잖아.”

 

나폴레옹의 말과 동시에 일리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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