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가 눈을 뜨고 본 것은 새벽의 푸른빛과 나폴레옹의 까만 머리칼이었다. 어스름한 빛을 받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일리야의 손끝에서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악몽을 꿨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무의식으로 넘어가버린 기억들은 의식으로 넘어오지 않으려는 듯이 자꾸 뒤로 숨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해내려 노력하기를 포기했다. 그 대신에 불편하게 침대 위에 웅크린 채로 잠든 나폴레옹을 보아하니 무언가 나쁜 꿈을 꾸었겠지 하고 짐작만 하고 마는 것이었다. 일리야는 손가락 위로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르게 숨을 쉬며 깊이 잠든 나폴레옹은 아마도 밤새 뒤척이는 저를 달랬을 터였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서 조심스럽게 빗질하던 일리야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평화롭게 누워본 일이 언제였는지 아주 까마득했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었다는 문장 하나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도망자 생활은 녹록치 못했었다. 나폴레옹 솔로를 평생 못 볼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슬픔은 마치 사치와도 같았다. 다만 언젠가는 그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을 마음 한 구석에 남겨둘 뿐이었다. 그래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념 간 전쟁으로부터 지키고 싶고 지켜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가 뱃속에서 태동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마다 당기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그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아이만큼은 꼭 지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에게 남은 건 그 조그만 생명뿐이었기에. 일리야는 벌써부터 나폴레옹만큼이나 선명했던 파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KGB에서는 그를 고문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빗질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떴다.

 

 

*

 

 

아직 아주 이른 시간이었고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해서 일리야는 평소 중력의 두 배는 더 받는 것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며칠간 계속 이어진 고문을 겨우 견디고 나니 편안한 침대에서도 오래 푹 잘 수 없게 된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리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이 피로에 뻑뻑해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한기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도 행여나 누가 볼세라 빠르게 걷는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이를 숨겨둔 집에 가는 것밖에 없었다. 혹시 미행이 붙었을까봐 몇 번이나 길을 돌고 돌아서 먼 곳에 차를 주차해둔 다음에도 또 돌고 돌아 걸어가는 길이 멀다는 사실만이 그저 안타까웠다.

 

프라하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휘적거리면서 걷던 일리야는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보이진 않았지만, 아까보다 하늘은 훨씬 밝아져있었다. 슬슬 사람들이 깨어나서 창문의 커튼을 걷어낼 때였다. 일리야는 지금쯤이면 나폴레옹이 자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빈 침대와 손목에 차고 있는 자신이 남겨둔 시계를 번갈아보면서 황망하게 서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서 일리야는 부르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안전가옥을 나서기 전에 그는 언질이라도 남겨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나폴레옹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엉클은 결국 양 진영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만들어진 합작품일 뿐이었다. 일리야와 나폴레옹을 포함하여 가비와 웨이벌리, 그 모두가 단순한 말에 불과했다. 일리야나 나폴레옹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두 사람이 만나서 애까지 낳았다고 한다면 어떤 제재가 가해질지 알 수 없었다. 일리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일리야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주 최선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단지 그는 1순위를 아이로 두고 그 다음을 나폴레옹 솔로로, 맨 마지막을 자신으로 두고 선택했을 뿐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면서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알아낼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에게는 분명히 알 권리가 있었고, 일리야도 그에게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가 굳이 알아내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겁게 한숨을 내쉰 일리야는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뚝 멈추면서 생각도 멈추었다.

 

길 건너편에 서있는 주황색으로 칠해진 건물에는 층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일리야가 일러준 대로 따랐다는 전제하에 아이를 봐주는 부부는 이 건물의 2층으로 잠시 옮겨와 있을 터였다. 그들 역시 각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온 이들이었다. 천에 꽁꽁 싸맨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들을 찾아온 일리야가 많은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다. 중년의 부부는 차분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가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던 것도 모두 그들이 자신과 비슷한 노선을 이미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일리야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들에게만큼은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꽤 드문 일이었다.

 

일리야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주황색 건물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두 건물은 지하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건물에 사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과 문을 통과하고 또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일리야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피로가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올라 금방 2층에 도착했다. 층계참에서 복도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아무 장식 없이 검게 옻칠이 된 문이 있었다. 그 앞에 선 일리야는 문을 두드리려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가 손바닥에 땀이 바작바작 나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손바닥에 난 땀을 대충 외투 위에 문질러 닦았다. 빠르게 세 번, 잠시 쉬었다가 또 빠르게 두 번. 그는 미리 약속했던 대로 문을 두드렸다. 문은 금방 열리었다.

 

무사하여 다행이오.”

 

문을 연 이는 부부 중에서 남편인 그레이엄이었다. 그는 얼른 일리야를 안으로 들이고 말했다. 일리야보다 한참 작은 그레이엄은 따뜻한 호박색 눈에 걱정을 담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리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엄은 필요한 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탈리아는?”

아내는 안에서 아이와 함께 있소. 어린 것이 제 부모가 올 것을 어떻게 안 모양인지 새벽 일찍부터 고 큰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지. 들어가 봐요.”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레이엄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제일 안쪽의 방에 그의 아이가 있었다. 드디어 해가 뜬 모양인지 열린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환했다.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면서 일리야는 낮게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괜히 목이 답답하고 손바닥에서 다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거의 일주일이나 보지 못하고 애틋한 마음만 키웠기 때문인가. 금방 축축해진 손바닥을 다시 옷 위로 문지른 그는 문 앞에서 조금 떨어져 서서 목을 감싼 천을 손가락으로 당기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큼 방 앞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방 안에 해가 떠있기라도 한 것처럼 밝은 햇살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그 빛 속에는 웃고 있는 나탈리아를 향해 쪼끄만 손발을 꼬물거리고 있는 그의 아이가 요람에 누워있었다.

 

그제야 일리야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것을 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인기척에 돌아본 나탈리아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그는 그녀가 미소로 화답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자마자 곧장 성큼성큼 요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오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이는 오랜만에 보는 그를 알아본 모양인지 양 팔을 꼬물댔다. 여전히 작고 연약한 아기였지만, 못 본 새에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조금 더 자라고 크기도 큰 것 같았다. 일리야는 아이가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두 기억과 대조할 모양인지 한참을 들여다보고만 있을 기세였다. 그러나 낑낑대는 소리를 내면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안아달라고 하는 것 같은 모양새에 그는 차가운 손을 비빌 시간도 없이 얼른 아기를 안아들었다. 아기의 따끈한 체온이 일리야에게 전해졌다. 그는 눈을 꾹 감았다.

 

Я тебя люблю. Спасибо. Спасибо. Я тебя люблю. Спасибо….”

 

일리야는 품에 안은 아기의 뺨 위로 연신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기도처럼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이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얌전히 안겨서 그와 눈만 마주하고 있었다. 일리야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느 샌가 잠든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는 그에게 나탈리아가 손수건을 내밀었을 때였다.

 

 

*

 

 

그레이엄은 짐 가방 두 개를 들고 일리야를 올려다보았다. 그 옆에 서있는 그레이엄보다 키가 큰 나탈리아는 막 머리에 샤프카를 쓴 참이었다. 이제 그레이엄과 나탈리아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의 삶을 살 때였다.

 

그럼, 앞으로 볼 일은 없는 거요?”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상황이 나쁠 때 만났고, 상황이 좋아지니 헤어지게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상황이 안 좋다는 뜻이 될 터였다. 그러니 그들이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일임에 분명했다.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작별인사로 하게 되는군. 우리 다시 만나지 않도록 하십시다.”

 

일리야는 악수를 청하며 내민 그레이엄의 손을 맞잡고 여러 번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했다. 그리고 그는 나탈리아와 러시아식 인사로 서로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Удачи. 나탈리아는 그를 위해 행운을 빌어주었다. 불행이 무엇인지 잘 아는 그들로서는 그 인사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리야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눈을 차례로 마주보고 그들을 배웅했다. 그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그들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진심으로 바랐다. 다시 우리가 만날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당신들의 삶에 다시는 내가 끼어들 일이 없기를.

 

그러고서 일리야는 다시 잠든 아기를 눕혀놓은 요람이 있는 방으로 갔다. 쌔근대는 숨소리를 내는 아기는 입을 아주 살짝 벌리고 자고 있었다. 꼭 나폴레옹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의 모습과 비슷해서 일리야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기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닮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세포 속에 다 각인되어 있는 걸까. 일리야는 아이의 덩치에 맞게 작은 이불을 다시 한 번 잘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리야는 얼른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레이엄이나 나탈리아가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노크 암호는 없었다. 언제나 찾아가는 쪽은 일리야이기 때문이었다. 일리야는 재빨리 거실의 서랍장으로 다가가서 두 번째 서랍을 열고 밑판을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토카레프 권총과 소음기가 들어있었다. 일리야는 그것들을 꺼내서 소음기를 총구에 장착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안에서 답이 없자 방금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레이엄? 나탈리아?”

 

일리야는 일부러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일리야는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똑바로 자세를 잡고 서서 총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두 번 두드린 간격이 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대는 그 수가 많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럴수록 더더욱 정확하고 신속하게 상대를 처리해야 했다. 일리야는 조금 긴장한 채로 문손잡이를 돌렸다.

 

뭔가 두고 간 게 있는.”

안녕, 일리야.”

 

일리야는 문을 열다말고 그대로 굳었다. 문 앞에는 나폴레옹 솔로가 서있었다.







+

Я тебя люблю: 사랑해(I love you)

Спасибо: 고마워(Thank you)

Удачи: 행운을 빌어요(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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