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폴레옹 솔로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운명이라니. 이 얼마나 그럴 듯하게 잔인한 이름인가. 뭐든지 운명이라는 말이 붙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도 그런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날 때부터 몸 한 구석에 운명을 타고나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매우 당연한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에이드리언의 말마따나 반골기질이 다분한 나폴레옹에게는 그만큼 답답한 것이 없었다. 나치가 수탈한 고가의 예술품들을 암시장에 팔아넘긴다거나 손버릇 나쁘게 굴었던 과거도 모두 그의 반골기질에서 가지를 뻗어 나온 것이었으니 그는 그야말로 인생을 사는 방식을 통해 온몸으로 운명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도 꽤나 지독했다. 서류철을 펼쳐든 나폴레옹은 벌써 몇 분 째 한 남자의 프로파일 첫 줄에서 더 이상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들의 첫 만남은 강렬했더랬다. 달리는 자동차의 트렁크를 필사적으로 잡고 매달렸던 장신의 러시아인을 떠올리면서 그는 아까부터 헛웃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길을 막아버린 것 같았다. 꼭 뒤통수가 얼얼한 것 같기도 했다.

 

일리야 쿠리야킨.”

 

나폴레옹은 익숙하면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혀를 굴리게 만드는 이름을 탄식하듯이 내뱉으면서 드디어 서류에서 눈을 뗐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에 그는 몸에서 힘을 쭉 빼고 소파에 늘어졌다. 소파의 푹신한 등받이 위로 머리를 기댄 그는 한 손을 들어서 눈꺼풀 위를 문질렀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내던 얼굴은 짧은 시간 안에 완벽하게 그의 머릿속에 틀어박혀서 굳이 프로파일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그는 일리야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시대상황만 생각해보아도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건만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이름의 주인공이 이렇게 달갑지 않은 방식으로 제 앞에 나타날 줄이야. 공기를 들이쉬었다가 내뱉는 나폴레옹의 한숨이 깊었다.

 

 

2

그 후로 어깨에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 같은 느낌은 내내 나폴레옹을 따라다녔다. 제 몸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과 반드시 섹스를 해야 한다거나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법은 분명히 없었다공산주의 세계에는 있는지 몰라도. 이름으로 이어진 관계에 반드시 책임을 질 필요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폴레옹은 시간이 갈수록 그 빌어먹을 책임감에 짓눌려가는 것 같았다.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 먹혀들지는 않고 오히려 떠먹이듯이 상대를 앞에 떡하니 갖다놓은 지경이니 더 이상 외면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운명의 상대는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데, 심지어 서베를린의 공원 화장실에서 그는 정말로 나폴레옹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이러니 나폴레옹이 혼자 무언가를 짊어진 것에 대한 심통이 날 만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필요치 않은 여유를 부렸다. 그가 물에 빠졌을 거라고 굳게 믿고 도망갈 생각보다는 그를 찾으려는 모양인지 보트를 타고 한 자리만 맴맴 돌고 있는 일리야를 보면서도 자신의 생존여부를 알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옹졸한 짓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폴레옹은 일부러 라디오의 볼륨을 크게 높이고 조수석에 놓인 바구니나 뒤적거렸다. 필시 손에 걸려드는 술병에 그는 눈썹을 까딱하곤 망설임 없이 병뚜껑을 땄다.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오는 것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Che vuole questa musica stasera?

Che mi riporta un poco del pasato

La luna ci teneva compagnia

Io ti sentivo mia

Soltanto mia

Soltanto mia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 상황에 썩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본디 아이러니에 끌리는 족속들이 아니었던가. 나폴레옹은 좁은 트럭 안을 채우는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작은 바구니 안으로 다시 손을 뻗어 바스락대는 종이에 싸인 두툼한 샌드위치를 꺼냈다. 신선한 야채와 치즈가 속을 채운 샌드위치를 한 입 가득 베어 문 나폴레옹은 문득 이 작은 바구니의 주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더 정확하게는 운명에 종속된 자들에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에 맞지 않는 감상이 갑자기 만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소박맞은 여인네를 흉내 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차라리 정말로 소박맞은 여인네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선바이저를 열자마자 허벅지 위로 툭 떨어진 열쇠는 너무나도 식상했다. 창밖으로 불길이 솟아오른 보트 역시 식상하여 나폴레옹은 조금 기운이 빠진 표정을 했다. 아닌 척이란 아닌 척은 다 하더니 쓸데없이 잔정이 많은 모양새인지라 피곤해지고 만 것이었다. 어째서 저런 이가 그의 앞에 뚝 떨어졌는지. 나폴레옹은 시동을 걸어 얼른 악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어차피 전략적 제휴라는 이름하에 임시로 팀을 결성하긴 했어도 그들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운명이었다. 운명 앞에는 충분히 그런 수식어가 붙을 수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3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네게 빚을 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나폴레옹은 하마터면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던 것을 삼키고 일리야를 보았다. 일리야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또 나폴레옹은 속이 조금 뒤틀리는 것 같았으나,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는 것으로 속을 달랬다.

 

빚 갚으라고 한 적도 없어. 그럴 생각도 없었고. 고맙다는 뜻이었다면 괜찮다고 해두지.”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하곤 등을 돌렸다. 그는 이미 가비가 몸에 달고 갈 발신기와 짝을 이루는 수신기의 점검을 마쳤음에도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척 했다. 일리야가 어젯밤 고민 끝에 저를 구해준 일마저 쳐내려고 하니 그로써도 방어적인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심통을 부렸다고 돌아오는 결과마저 이리 허망하다니.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내려서 왼쪽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문질러댔다. 그렇게 문지르면 그곳에 새겨진 이름이 닳아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헛된 생각과 함께.

 

잠시 그러고 있다 보니 나폴레옹은 다시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단지 사상이나 이념 같이 속에 든 것이 다를 뿐이지 겉으로는 다 똑같은 인간일진대 일리야는 어째서 전혀 이름에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 말이었다. 당장에 그와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가비만 하더라도 일리야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그녀는 오른쪽 팔뚝 안쪽에 이름을 갖고 있었다한데도 그는 때때로 가비에게 진심이 담긴 눈빛을 하곤 했다. 물론 나폴레옹도 이름에 상관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닌 전적을 따지면 화려하긴 했지만 정작 일리야를 앞에 두고 다른 이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날 자신을 찾아온 빅토리아와 뒹굴 때에도 그는 일리야 생각을 머릿속 어느 한 구석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나폴레옹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런 의문을 떠올렸다.

 

과연 저 일리야 쿠리야킨은 나폴레옹의 이름을 갖고 있는가? 아니, 누군가의 이름을 갖고 있기는 한가?

 

공산주의자들도 몸에 이름을 타고나긴 하나?”

?”

 

일리야는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전히 허벅지 위를 문지르고 있던 나폴레옹은 만지작거리던 수신기를 내려놓고 다시 일리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일리야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종래에는 불쾌함을 여과 없이 내비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 설마 빨갱이는 몸에 새겨진 이름도 없는 건 아닐 거 아닌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지?”

 

일리야는 말을 짓씹는 것처럼 내뱉었다. 그의 근육들도 덩달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이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비는 네 상대가 아니거든. 너희 그 잘난 연방에서는 이름을 서로 타고난 사람들끼리 무조건 삶의 동반자로 살아야 한다는 법 같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가비는 꽤 보기 쉬운 부분에 이름을 갖고 있지. 그녀의 상대는 당연하게도 네가 아니란 말이야.”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충고라면, 카우보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어.”

아니, 내 질문을 분명하게 들었잖아? 이름이 뭔지 말해달라는 게 아냐.”

 

나폴레옹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씨근덕거리는 일리야의 앞에 다가가 똑바로 섰다. 웬만큼 큰 키를 가진 그보다도 더 커서 조금 고개를 들어서 봐야 하는 일리야의 푸른 눈은 왜인지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일리야는 다소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어.”

?”

 

이번에는 나폴레옹의 입에서 황당한 소리가 나왔다. 이름이 없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운명의 상대가 서로의 이름을 타고나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그 누구의 이름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가 예외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몸 한 구석에 아로새긴 채로 태어나는 세상이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그 정도로 거짓말에 형편없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다.

 

이름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아.”

그럴 리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일리야는 계속 씨근덕대면서 한 음절마다 힘겹게 내뱉는 것 같았다. 나폴레옹은 눈을 느리게 깜빡대면서 말하는 일리야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폴레옹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에 일리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러고는 눈을 뜨고 왼손으로 오른팔의 가죽재킷과 터틀넥 티셔츠의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나폴레옹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 일리야는 오른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나폴레옹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내민 오른손의 손목에는 길게 화상흉터가 있었다. 마치 인두로 일부러 지져서 생긴 흉터 같았다. 일리야는 그 흉터 위에 왼손 검지를 가져다댔다.

 

여기에 있었어. KGB에서는 이름을 제거하길 원했지. 이름을 갖고 있는 요원들이 대다수였고 반드시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따라야만 했어. 지금은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옛날 일이니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아.”

 

엄청난 것이 일리야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폴레옹은 말끔하게 이름을 덮어버린 화상자국에서 물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이 일리야의 푸른 눈을 감췄다가 보였다가 했다. 그가 덧붙인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 분명히 착잡함 같은 감정이 숨어있었던 것 같은데 나폴레옹은 그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 꼭 어깨 위에 얹어진 것이 또 한 번 무게를 더해가는 것만 같았다.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힘을 빼고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그러자 일리야도 덩달아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나폴레옹은 헛웃음을 참아야 했다.

 

빌어먹을 공산당. 그렇게 생각하며 나폴레옹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인과응보라는 게 이런 것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그가 피하기 바빴던 운명은 이제 꼬일 대로 꼬여서 잔뜩 엉킨 털 뭉치가 되어있었다. 일리야가 볼 수 없게 등을 돌린 채로 한숨을 푹 쉰 나폴레옹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많이 엉켜서 도저히 풀 수 없는 털실은 어쩔 수 없이 잘라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리고 남은 멀쩡한 털실로 다시 직물을 짜야 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제 앞에 놓인 이 털실을 싹둑 잘라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 우두커니 선 거대한 털 뭉치를 잘라내기에는 손실이 너무 컸다. 앞으로 쓸 수 있는 부분보다 버리는 부분이 더 많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왼쪽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마구 비벼댔다. 혼자만 갖고 있는 이름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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