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때때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부닥치는 일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말에 다다랐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각자 다른 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대체로 분류하기를 좋아하기 마련이므로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나폴레옹 솔로와 일리야 쿠리야킨이 대체로 반대되는 성향을 대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반드시 시작부터 달랐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작점은 거의 비슷했다. 국적이나 이념 같이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의 삶에 끼어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들의 삶은 대체로 비슷한 노선을 띠고 있었고, 다만 급격하게 하강하며 삐걱거리는 롤러코스터에 누가 먼저 탑승했는가의 여부만이 달랐을 뿐이었다.

 

일리야는 가끔 평화롭게 굴었다. 이는 대체로 그가 매우 신경질적으로 군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막 다시 위로 솟구치기 시작한 롤러코스터에서 혼자만 내동댕이쳐져서 바닥으로 추락하여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그다지 남을 배려할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불만을 모두 표출할 셈인지 매우 자주 화를 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이해했다. 그는 일리야가 어떤 기분일지 이해했다. 그저 어떤 기분일지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일리야.”

 

나폴레옹은 미간을 좁히고 눈썹 끝을 아래로 약간 늘어뜨린 표정을 하고 제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일리야를 불렀다. 전보다 조금 마른 뒷모습을 한 일리야는 아주 살짝 얼굴을 측면으로 튼 것이 다였다. 나폴레옹은 뱃속에서 꿀럭꿀럭 올라오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깨진 유리가 널려있고, 탁자와 의자는 아무렇게나 쓰러져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포도주가 쏟아져서 검붉은 얼룩이 카펫 위를 온통 뒤덮고 있기도 했다. 일리야와 나폴레옹이 발을 딛고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한 구석이 없는 공간이었다. 다시 한숨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히려 한숨이 쏙 들어간 표정을 했다. 그는 셔츠의 소매를 하나씩 걷어 올리고 허리를 숙여서 바로 앞에 떨어진 큰 유리조각들을 몇 개 주웠다. 그것을 손에 조심스럽게 쥐고 그는 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또 허리를 숙여 앞에 떨어진 것을 주워가면서 천천히 길을 만들어나갔다. 그 길이 향한 곳은 단연 그 난장판 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고고한 존재였다. 나폴레옹은 부러진 의자의 다리를 발로 살짝 밀어 옆으로 굴려내면서 자신이 무슨 성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처음으로 개척하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감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손에 주워든 깨진 유리조각들과 깨지지 않고 멀쩡한 빈 술병을 옆쪽에 비스듬하게 서있는 의자 위에 올려놓은 나폴레옹은 일리야의 뒤에 섰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공간에서 꽤 가까이 붙어선 두 사람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일리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나폴레옹도 그를 굳이 돌려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방향을 보고 일렬로 서서 운동장에 집합한 미숙한 학생들 같았다.

 

나폴레옹은 눈앞에 보이는 조금 각이 진 어깨를 보았다. 어깨에서부터 이어지는 목선은 확실히 전보다 가녀려졌다. 일리야가 목이 드러나는 옷보다는 목을 가리는 터틀넥 티셔츠를 많이 입었던 것을 떠올린 나폴레옹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머릿속에서부터 언어를 뭉쳐서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말았다. 그는 최근에 확실히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다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일리야 앞에서만큼은 유독 더 말을 아끼게 된 것뿐이었다.

 

일리야.”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꽤 길어서 잘라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폴레옹은 많은 뜻이 함축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우뚝 서 있던 일리야는 느릿하게 뒤로 돌아섰다. 복잡한 것을 좋아할 것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이런 것에는 반드시 반응하고야 마는 그에게 나폴레옹은 아주 약간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리야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다리를 절뚝이느라 왼쪽 어깨를 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돌아서서 무표정하게 나폴레옹을 보기만 했다. 그러면 나폴레옹은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저녁은?”

 

3자가 보기에는 전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여상스러운 투였다. 일리야는 미세하게 한쪽 입 꼬리를 꿈틀거렸다.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일반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상황에 맞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식으로 일리야에게 그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주려는 것처럼 굴었다.

 

안 먹었다면 같이 먹을까? 하긴, 토네이도가 쓸고 지나간 것 같으니 무언가를 먹었을 리가 만무하겠어.”

 

나폴레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덧붙여놓고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말을 아끼다보면 엉뚱한데서 아꼈던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곤 했다. 그것은 마치 꾹 눌러 담은 것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순간과도 같았다. 그리고 일리야는 그런 것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용수철이 달린 삐에로가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도망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모두 롤러코스터에서 억지로 끌어내려진 후유증이겠지만, 나폴레옹은 가끔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아서 상자 앞에 놔두고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 삐에로를 튀어나오게 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그것이 일리야를 더 공포로 몰아가는 것임을 잘 알기에 생각에만 그치고 마는 것이 어쩔 때는 아까웠다. 그럴 때마다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롤러코스터에서 추락한 직후의 모습이 어땠는가를 떠올렸다. 그러면 그는 그렇게 끔찍한 꼴은 전쟁 때에나 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했다.

 

그 당시에 일리야는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는데 심한 것은 당장의 응급처치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혹독한 신체고문의 결과였다. 제일 심한 것은 뒤틀린 왼쪽 다리였다. 반항이 심해서 그랬는지 아예 처음부터 반항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일리야의 왼쪽 다리는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뼈가 부러져서 뒤틀려있었다. 그를 구출하여 짊어지고 나와야 했던 나폴레옹은 그 다리 때문에 그를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도 감을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었다. 나폴레옹을 더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그런 꼴을 하고도 일리야의 정신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육체만큼이나 망가지고 부서진 채로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정신은 나폴레옹이 엉클의 접선지점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이후에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암전되었다.

 

내키지 않으면.”

 

일리야는 절뚝거리면서 나폴레옹의 말을 끊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약간 치고 지나갔다. 그는 왼쪽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용케도 바닥 위의 파편들을 다 피해서 걸어갔다. 나폴레옹은 어깨를 치였어도 거의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서서 일리야가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일리야는 카펫 위로 붉은 액체를 이미 한 차례 내쏟은 짙은 초록색의 병 앞으로 걸어가서 섰다. 그러고는 왼쪽 다리를 들어 뒤로 약간 뻗고 오른쪽 다리로만 체중을 견디면서 몸을 숙여 병을 주워들었다. 그는 주운 병을 눈높이까지 들어서 남은 양을 가늠해보더니 병을 조금 흔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이어져서 나폴레옹은 하던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고 지켜보았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들이 지금의 일리야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것들일지도 몰랐다적어도 나폴레옹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보모 같은 게 필요한 어린 애가 아냐.”

 

와인 병의 주둥이를 입에 대고 몇 모금 삼킨 일리야는 입가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가 뒤돌아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그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상상했다. 일리야의 표정 중에서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고, 일리야가 최근에 가장 많이 하는 얼굴표정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너에게 보모를 붙여준 적은 없는걸.”

감시하는 것처럼 붙어있는 네가 보모라고 말하는 거다.”

 

카우보이라는 단어는 말끝에 붙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 단어는 일리야의 입에서 튀어나온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드디어 자신을 향해 돌아선 일리야의 표정이 생각했던 대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어쩐지 이 모든 게 식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일리야는 예측하기가 너무나도 쉬워졌다. 속에 들어있는 것을 훤히 내보여주는 유리로 된 장식장과도 같았다. 나폴레옹은 일리야를 향해 조금 다가갔다. 그래도 여전히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네가 내 옆에 굳이 붙어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더 이상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다른 정보기관에 입을 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큰 오산이라고 말해두지. 나에게 접근해올 정보기관 같은 건 없어. 버려진 소련의 개를 누가 가지려고 한단 말이지?”

 

나폴레옹은 일리야가 버려진 소련의 개와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스스로를 깎아먹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이제는 별로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나폴레옹은 잔뜩 찌푸린 일리야의 얼굴을 멀찍이 떨어져 선 채로 보았다. 일리야는 전혀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폴레옹은 조금 늘어지는 표정을 했다. 실망과도 가까운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런 게 아니야. 단지.”

 

나폴레옹은 고개를 약간 젓고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일리야의 푸른 눈이 나폴레옹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일리야의 눈에서는 읽을 것이 많지만 읽을 것이 없었고, 나폴레옹의 눈에서는 읽을 것이 없지만 읽을 것이 많았다. 그들은 잠시 서서 서로를 보았다.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자신을 보는 눈빛에서 적잖은 실망감을 읽었다. 나폴레옹의 조금 지친 것 같은 표정은 실망감 외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자 왠지 일리야는 어딘가로 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모두 지금 나폴레옹의 얼굴 속에 다 들어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야, 됐어. 쉬도록 해.”

 

먼저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는 나폴레옹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리야는 뼈마디가 불거진 양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세게 잡았다. 다시금 그는 주변의 것들을 모두 부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미 깨질 대로 다 깨져버린 것들이 모든 공간 위에 비명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들을 부수고 싶었다. 나폴레옹의 지친 얼굴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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