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가 높은 빛이 눈을 감고 있어도 꾸역꾸역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서 눈앞에 붉은 잔상을 남기며 동공을 마구 찔러댔다. 아무리 미간을 찌푸려보았자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일리야는 고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침착하지만 긴장을 놓지 않은 채로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앞서 한 무리의 남자들로부터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다음에 강제로 옷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일리야는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화려하게 달고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가끔씩 바닥에 연결되어 쩔그렁대는 무거운 족쇄가 발목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신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일리야는 그럴 때마다 입 안의 터진 상처 위를 혀로 핥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희망을 꿈꿔보기가 무섭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KGB에 다시 잡혀온 일리야는 좌절감에 휩싸인 것과는 별개로 얌전하게, 다만 조금은 꼿꼿하게 굴었다.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그를 멀찍이 서서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힐끔 본 올렉은 그에게 마치 고고한 척하는 창녀처럼 군다고 한 마디 했던 것도 같았다. 일리야는 올렉의 말이 자신의 어머니까지 겨냥한 것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가운데에 일리야를 놔두고 양쪽에서 누를 셈이었던 것이다. 신체적인 폭력에 정신적인 폭력까지 더해지면 상대를 보다 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일리야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심문과정은 예측이 가능한 수에 불과했다. 전직 KGB요원을 다루는 KGB의 솜씨는 여태까지 단 한 치도 그의 예측을 빗나가지 않았다. 여태껏 그들이 잡아온 적국의 스파이들에게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일리야에게 묘한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도 가져다주었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생각과 똑같이 흘러갈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리야는 머릿속에서 아이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부터 그는 조그만 손을 꼬물대는 아기만 생각하고 움직여왔다. 올렉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까만 두건을 덮어쓴 채로 얌전히 잡혀온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한시도 아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혹시나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아이를 돌봐주던 부부에게 미리 지시사항을 읊어놓기는 했지만, KGB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이 알려준 대로 했을 거라고 믿으려 노력했다. 여기에서 그가 탈출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기의 안전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라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억지로 몸을 열어주면서도 자신을 향해서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걱정 마라, 일류샤. 너는 괜찮을 거야. 적어도 너만은, 너만은 괜찮을 거란다.’

 

까마득한 환청과 함께 다시 몸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려는 것 같은 느낌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일리야는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얼굴 정면에 있는 환한 전구의 빛이 벌침으로 쏘는 것처럼 그의 동공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홍채가 넓어지면서 동공이 쪼그라들었지만, 일리야의 시야는 계속해서 하얗게 점멸했다. 강렬한 빛에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친 그의 발목에서는 족쇄가 묵직한 쇳소리를 냈다. 정말로 괜찮을까? 일리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다만 그 말을 자신의 아이에게 그대로 돌려줄 뿐이었다.

 

 

 

*

 

 

 

천하태평이네요.”

 

가비는 상당히 불만이 가득한 투로 퉁명스럽게 공을 던지듯이 말을 던졌다. 고급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테라스에서 따뜻한 햇볕 아래 놓인 긴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나폴레옹 솔로는 눈알만 굴려서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가비의 툭 던진 말에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 행동에 이번엔 가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이렇게 태평해졌대요?”

 

나폴레옹은 잔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빈 잔을 손에 들고 더 날카롭게 말한 가비를 향해 휘휘 저었다. 그냥 자신을 내버려두라는 그 몸짓에 가비는 당장에 그에게 몸을 날려 바닥을 뒹굴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나폴레옹의 옆으로 다가가는 편을 택했다. 옆으로 돌아보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가비는 나폴레옹 솔로의 방으로 오기 전까지 했던 만큼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일리야 쿠리야킨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의 기억은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무시했던 그와의 첫 만남에서 곧바로 그가 사라졌던 날로 뛰어넘었다. 그녀는 아침 식사시간에 맞춰서 모이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그를 찾으러 갔던 나폴레옹의 얼빠진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일리야는 정말이지 단 한 순간도 그들 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하루아침에 아주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그 후로도 그는 작은 실마리 하나 제대로 남겨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가비는 가끔 일리야 쿠리야킨이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 맞는지 헷갈려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웨이벌리마저도 그랬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달랐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꽤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었다. 다시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좀 지나치게 밖으로 돌아다녔다. 일리야와 그 사이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했던 가비는 나폴레옹이 원래 그런 인물이란 것을 경험으로 배웠음에도 영 마땅찮았다. KGB에서도 일리야의 행방을 모를 정도라면 아무리 엉클이라도 알아내기 힘들 터였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이었다. 결국 가비가 폭발하여 다그치기 직전이 되었을 때, 그녀는 나폴레옹이 사실은 일리야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고 혹시나 그러다가 엉클까지 휘말릴까봐 그녀와 웨이벌리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호텔 방에만 처박혀서 지낸 지 벌써 2주가 되었다. 가비는 이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티격태격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녀는 남을 도울 준비가 기꺼이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나폴레옹이 요청만 한다면 그녀는 손을 잡아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도 남을 힘도 있었다.

 

만약에 내가 아주 난처한 상황에 빠져있는데 당신에게 그 상황을 타개할 열쇠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거죠?”

 

가비의 구두소리는 나폴레옹이 아무렇게나 몸을 늘어뜨린 의자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가비는 아직 그의 손에 있던 유리잔을 뺏어들었다. 나폴레옹은 아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선글라스를 힐끔 보고는 다시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보았다. 큰 눈동자에 순간 겹쳐 보인 파란 눈동자에 그는 미간의 주름을 좀 더 깊게 만들었다.

 

귀가 먹은 게 아니라면 대답해요.”

아마 줬을지도.”

 

나폴레옹은 재촉하는 말에 냉큼 대답했다. 진심보다는 귀찮음이 더 많이 담긴 목소리였다. 가비는 왠지 자신이 시장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자 나폴레옹은 어깨만 으쓱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더니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은 태도에 그녀는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한 마디 하는 게 어렵죠?”

하고 싶은 말이 뭐죠, 텔러 양?”

 

가비는 거리를 두는 나폴레옹의 화법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약간은 화가 나기도 했다. 구걸해야 겨우 빌어먹고 살 텐데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그녀는 아까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떠올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전해오는 정보는 엄청난 것이었다. 생색을 조금 내보려고 했더니 어째 그녀의 화만 돋우는 상황이 되어서 가비는 아주 잠깐 못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폴레옹의 뺀질거리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니 꽤나 볼만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폴레옹 솔로, 잘 들어요. 나는 한 번만 말 할 테니까.”

 

방금 전보다 단단해진 가비의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한 나폴레옹은 미적지근하게 고개만 대충 흔들어보였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손을 얹고 손가락으로 피아노라도 치듯이 표면을 톡톡 쳤다.

 

올렉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나타났어요.”

그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닌데.”

말은 끝까지 들어요. 프라하에 있는 한 여관 주인이 투숙객 중 한 명이 외출한 뒤로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군요. 여관 주인이 묘사한 실종된 투숙객의 외양이.”

 

가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나폴레옹의 손가락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탁자 위를 치고 있지 않았다.

 

당신의 일리야 쿠리야킨과 놀랍도록 닮았어요.”

 

 

 

*

 

 

 

일리야는 팔뚝에 약물을 주사하여 환각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이 허공을 반쯤 부유하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감각들이 그의 몸에서 멀어져서 그는 마치 죽어가는 몸 안에 정신만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거의 깜빡이지 않는 눈앞에는 더 이상 지나치게 밝은 빛을 쏟아내는 조명이 없었지만 제대로 제련되지 않은 렌즈를 낀 것처럼 모든 사물이 이지러져 보였다. 각종 고문으로 온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던 고통도 둔해지다 못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몸이 먼저 죽어버리면 이미 반쯤 정상이 아닌 정신은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당연하게도 나는 널 시베리아로 보낼 거야.’

 

일리야는 매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렁이는 누군가의 흑백사진 같은 얼굴이 일리야의 앞을 좌우로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은 계속 입을 뻐끔거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연합정보원 짓거리도 못 하겠지.’

 

일리야는 팔을 조금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그저 그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박탈감마저 느리게 몰려왔다. 일리야는 자신의 뇌에 대한 통제까지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죄를 지은 아버지가 완전히 빈껍데기만 남아서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은 채로 정신을 육체에 가둔 것이 아닐까. 일리야는 실없이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슬프지 않나, 일리야? 울지 않는군. 네 어머니도, 연인도 다시는 못 볼 텐데.’

 

얼굴이 일리야의 앞으로 다가섰는지 아주 커지고 더 기괴해졌다. 그럼에도 일리야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할 수만 있다면 아기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자그마한 아이의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가 있는 이목구비가 벌써부터 나폴레옹 솔로의 얼굴을 닮아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떠나던 그 순간부터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이제 다시는 영영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얼굴과 또 얼굴들.

 

, 연방을 등진 죄는 네 아비가 지은 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 오히려 그가 고마워해야겠어. 아들 덕분에 아비의 죄가 가려질 것 같으니.’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일리야는 자신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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