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전 세계를 양분한 것은 확실히 인류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넓은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이 붉은색이냐 아니냐로 구분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TV와 라디오, 신문에서는 늘 양극단에 서있는 지도자들의 행보를 헤드라인으로 다루었고, 양 진영의 정부에서도 상대방과의 알력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최우선목표로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총검이 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가히 냉전(Cold war)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를 피부로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내 이웃이 빨갱이 간첩일까 전전긍긍하거나 사람을 만나면 서로 사상검증을 하는 일 따위는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KGB에서 가장 유능한 편에 속한다는 요원 일리야 쿠리야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현재 이 체제를 유지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확장시키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동시에 잘 모르기도 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내려진 지령만을 따르는 개 역할만 충실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냉전의 최전방에서 뛰어다니면서도 이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또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계속 그럴 줄로만 알았다.

 

흐윽.”

 

일리야는 자신의 입에서 작게 새어나온 소리에 깜짝 놀라서 재빨리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곧 눈을 꾹 감고 얼굴을 되는대로 찡그렸다. KGB의 요원이 되기 전에 고통을 다루는 법에 대해 훈련받았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봇물 터지듯이 새어나와 여기저기에 떠다녔지만 지금 그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고통에 대해서는 훈련받은 적도 없거니와 훈련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그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이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릴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자만의 결과가 이것인가. 일리야는 아래가 열리는 고통에 헛숨을 들이켰다.

 

진통은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도망자 신세에 제대로 된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산파를 사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기에 일리야는 홀로 모든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잠시 고통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옆으로 뻗어서 바닥을 더듬었다. 그의 옆에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했던 비닐이나 가위 같은 도구들이 널려있었다. 곧 그의 오른손에는 낡은 헝겊이 걸려들었다. 일리야는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세게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형편없이 구겨진 헝겊은 곧 그의 입 속에 빈틈없이 들어찼다. 이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조금 지른다고 해도 천이 어느 정도 막아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아까보다 주기가 좀 더 짧아진 진통이 다시 예고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일리야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 위를 쥐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찌익. 그의 손바닥과 마찰하는 바닥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결국 그는 공기만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짧게 깎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는 바람에 그의 주먹 안 공기도 모두 빠져나가고, 다만 붉은 피만 몇 방울 새어나왔다. 일리야는 꽉 막힌 신음소리를 간헐적으로 내면서도 접어세운 양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얼른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일리야는 속으로 러시아정교회의 기도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희한하게도 주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태아가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헐떡이면서 계속 힘을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의 기도를 계속 이어갔다. 기도하는 행위는 마치 지금 그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정신을 유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점점 고통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뇌에서 엔돌핀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 것일까. 일리야는 이제 아래쪽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너무 커서 뇌가 더 이상 신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리야가 다시 한 번 헝겊에 먹혀드는 소리를 내면서 힘을 주었을 때 아래가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탁 풀림과 동시에 그는 여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지친 몸짓으로 입에 쑤셔 박혀있던 헝겊을 빼내었다.

 

아멘.”

 

드디어 기도가 끝났다.

 

 

*

 

 

어디 외출하시오? 오늘 날씨가 꽤 추운데.”

 

일리야는 허름한 여관의 주인이 꽤나 친절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했다. 여관주인이 일부러 그에게만 친절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묵는 몇 안 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나 일리야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도망을 다니는 입장에서는 무심코 스쳐가는 시선 하나도 크게 다가왔으니 오죽하랴. 게다가 얼마 전부터 왠지 꼬리가 따라붙은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저런 친절에 화답할 최소한의 예의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넉살이 좋은 여관주인은 일리야가 힐끔 곁눈질만 하고 지나가도 내내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일리야를 조금 더 불편하게 하는 것을 그는 결코 모를 일이었다.

 

딸랑이는 종이 달린 나무로 된 문은 일리야가 한 손으로 손잡이를 당기자 경첩에서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열린 문으로는 바깥의 찬 기운이 들이닥쳐서 일리야는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미었다. 러시아의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추위였다. 그럼에도 그는 러시아로 돌아온 것처럼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몸이 약해졌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오늘로 해산한 지도 2주가 채 되지 않았으니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일리야는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여관주인이 다시 말을 걸어올까 봐 얼른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터틀넥 티셔츠가 목까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밖으로 완전히 나서니 조금 더 추워진 것 같았다. 그러자 좁은 여관 방 안에 있으나 마나한 조그만 벽난로가 떠올랐지만, 일리야는 고개를 젓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눈이라도 올 것처럼 흐린 하늘 때문에 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더 춥고 음산해보였다. 납작한 모자를 있는 대로 눌러쓴 일리야는 다리를 휘적거리면서 빠르게 그 속을 걸었다. 두 블록을 더 가서 왼쪽으로. 그리고 한 블록을 간 다음에 오른쪽으로. 다시 쭉 가다보면 오른편에 나타나는 큰 건물 사이에 난 샛길로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 꺾기. 일리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 지도 위에 빨간 선으로 그렸다. 빨간 선.

 

빨갱이.”

 

일리야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린 말에 전기충격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빨갱이라니. 일리야에게 빨갱이라고 불렀던 건방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기 좋게 웃던 사람, 나폴레옹 솔로. 일리야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진저리치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전과 달리 분노해서 몸을 떨던 일리야 쿠리야킨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는 이렇게 종종 떠오르는, 꽤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기억들에 몸을 떨었다. 개인의 삶이 이데올로기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전과 또 다른 점은 이제 일리야가 자기 몸의 떨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길에 멈춰 선 채로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 다행히도 떨림은 금방 가라앉았다. 두려움이 분노보다 다스리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닐진대 최근 1년 사이에 일리야에게 있었던 많은 변화들은 그를 다양한 방면에서 바꿔놓았다. 태어난 지 보름도 안 된 그의 아이그의 어깨에 얹어진 무거운 책임감도 분명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가 도망자를 자처하게 된 것도 모두 그 핏덩이를 위해서였다. 일리야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의 손바닥에는 아직도 손톱에 패인 자국이 남아있었다.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일리야는 약간의 희망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그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각종 신분증을 위조하는데 도가 튼 옛 친구의 은신처였다. 옛 친구라고 해보았자 그가 KGB 요원으로 활동하던 중에 두어 번 정도 긴급하게 가짜 신분이 필요하여 만났던 적이 있는 사이였다. 이쪽도 꽤 전적이 화려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여권을 위조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오늘 완성된 위조 여권을 주면 일리야는 아이를 데리고 중립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까이 있는 스위스가 적격이었다. 스위스에 가기만 하면 그는 최대한 조용하게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도 다시 도망을 쳐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의 대처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떠올린 일리야는 아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다.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진 그는 이제 목적지까지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이제 이 길을 가다 보면 샛길이 나올 테고, 그 샛길에서 바로 왼쪽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는 완성된 여권을 품에 넣고 아이를 맡겨둔 부부의 집 뒷문으로 들어가 아이를 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고 여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일 새벽이면 여관을 나서서 아이를 데리고 스위스로 넘어가는 마지막 여정을 떠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었던가. 일리야가 추위에 부르튼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샛길까지 세 발자국만 남은 상황에서 일리야는 불현 듯 뒷목에 소름이 끼쳐 뒤를 돌아보았다.

 

일리야 쿠리야킨.”

 

일리야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조그만 불씨가 제대로 타오르기도 전에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일리야는 눈앞에 우뚝 서있는 남자 외에도 여러 명이 그의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싼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KGB의 정예요원들을 상대로 근 1년간 약해진 일리야 쿠리야킨이? 최고의 요원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는 더 이상 최고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꼴이 말이 아니네.”

 

올렉은 여유롭게 담배를 피워서 입에 물었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 그의 입과 코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일리야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일리야는 그 눈빛을 알고 있었다. 적국을 상대로 가차 없이 굴 때 올렉은 저런 눈빛을 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저 눈빛을 보았던 사람이 어떻게 되었더라? 일리야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지 못했다. 그런 일리야를 보던 올렉은 입가를 끌어올려서 씩 웃었다. 여전히 눈은 웃지 않은 채였다.

 

돌아가야지? 집으로.”

 

일리야는 이라는 말에 패배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위태롭게 깜빡이던 불씨가 거대한 파도에 힘없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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