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기준점 하나로 그 양쪽의 색깔이 확연하게 대비되었다. 갖가지 색깔로 무지개처럼 빛나던 기억은 칼로 자른 마냥 순식간에 싹둑 잘려나가고 어둡고 칙칙한 색으로 점철된 기억들이 그 뒤를 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만든 기준점에 대한 기억은 파편이 흩어진 것처럼 잘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일리야가 기억하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아끄로시까와 뻴메니. 웃고 있던 입술들. 칙칙한 카키색의 제복. 떨어져서 깨진 접시. 흰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 색깔이 사라지기 시작한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기준점을 자잘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 뒤의 무채색 기억들은 그다지 행복한 기억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리야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겼고 다만 추위와 배고픔 따위만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에게 물질적인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일리야를 위해서 어머니는 뭐든지 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분명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는데 아버지가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잡혀간 이후로는 말라가는 꽃처럼 시들어만 갔다. 그래도 그녀는 남은 빛이나마 일리야에게 주기 위해서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만났다. 매일매일 그녀의 상대가 바뀌었고, 그럴수록 그녀는 빛을 잃어갔으며 일리야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색깔을 잃어갔다. 그는 끔찍이도 괴로워했고 지독하게도 분개했다. 그가 길이가 맞지 않아 손목과 발목이 다 드러난 옷을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아버지의 횡령 건을 맡았던 올렉을 스스로 찾아갔던 것은 그 모든 것을 겪은 후였다. 여전히 그는 어렸지만 어리지 않았다.

 

허억!”

 

일리야는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헛숨을 들이키더니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극심한 냉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한겨울의 시베리아 벌판에 맨몸으로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몸을 둥글게 말고 전신의 근육을 잘게 떨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지만 일리야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이런 꼴이란.”

 

올렉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바닥에서 웅크리고 떠는 일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에 버티고 버티다가 쓰러져버린 일리야는 얼음물을 끼얹어도 퍼뜩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전기충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몸만 파들파들 떨어댔다. 이래서야 진짜 시베리아로 가면 그 추위를 견디기나 할 수 있을는지. 퍽 가련한 꼴에 올렉은 얼음물을 다시 끼얹으려고 하는 이들을 제지하고는 구둣발로 일리야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일리야는 몸을 좀 더 웅크릴 뿐이었다.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일리야는 그 긴 몸을 한껏 접어서 구겨진 것 같았다.

 

결국 올렉은 얼음물을 한 번 더 뿌리도록 할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왼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는 폐포에 담배연기를 모두 채우려는 것처럼 잠시 숨을 들이쉰 채로 멈추었다가 하얀 연기를 내뿜고는 일리야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흰 연기가 그의 위에 매달린 전등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고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일리야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철썩하는 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어 번 더 물에 젖은 일리야의 창백한 피부를 때리고 공간을 울렸다.

 

몸을 벌벌 떨던 일리야는 순식간에 죽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곧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흐릿했던 시야는 그가 눈꺼풀을 경련하면서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명확해졌다. 어쩐지 양 뺨이 홧홧한 느낌에 그는 한 손을 들어서 얼굴을 쓸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올렉의 그림자가 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대단한 꿈을 꾼 것처럼 정신이 다소 몽롱했지만, 그는 올렉의 눈빛에 여전히 자신을 향한 그 어떠한 감정도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 쿠리야킨.”

 

올렉은 왼손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들었다. 일리야는 그가 자신을 때리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저 담배를 입에 물었을 뿐이었다. 올렉은 방금 전과 같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일리야는 담배 연기가 위로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 아버지 뒤를 따를 때가 됐다.”

 

일리야는 이번에야말로 올렉이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

 

 

나폴레옹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프라하 외곽에 있는 작은 여관의 주인은 일리야와 정확히 일치하는 묘사를 해주었고, 근 사흘 간 지켜본 올렉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 KGB의 지부 건물을 들락거렸다. 결정적으로 올렉이 자신의 뒤를 따르던 KGB요원에게 일리야의 호송을 지시하던 모습은 일리야가 분명히 이곳에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일리야는 나폴레옹이 있는 곳에서 1마일도 떨어져있지 않은 건물에 있었다. 1년 동안 이렇게 그와 가까이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나폴레옹은 약간 힘이 들어간 손끝으로 홀스터에서 꺼내지 않은 총의 손잡이를 쓸었다.

 

긴장돼요?”

 

가비는 나폴레옹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녀는 이런 싸움터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나폴레옹 혼자서는 보낼 수 없다며 아득바득 우겨서 여기까지 따라왔다. 그녀의 몸만큼이나 긴 저격용 소총을 들여다보고 있는 뒷모습이 꼭 군에 입대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리숙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나폴레옹은 조금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나 저격에 꽤 소질 있어요.”

지난번에는 나를 쏠 뻔 했잖아.”

그거 벌써 1년 전 얘기인 거 알아요?”

그랬나?”

 

입술을 삐죽이면서 돌아보는 가비에게 나폴레옹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일리야가 떠나기 전의 과거에 머물러있다는 것을 새삼 인정해야 했다. 가비는 저격에 꽤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불과 몇 달 만에 일리야나 나폴레옹만큼이나 소총을 잘 다룰 줄 알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일리야가 없는 사이에 주위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해왔다.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는 것은 나폴레옹뿐이었다.

 

걱정 말아요.”

 

가비는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나폴레옹은 왼팔을 들고 손목을 보았다. 일리야가 유일하게 남겨두고 간 시계였다. 그가 끔찍이도 아끼던 아버지의 시계는 나폴레옹의 손목 위에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실수란 없을 테니까.”

 

비장함마저 서린 목소리에 나폴레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비의 말대로 이번에는 실수란 없을 것이다. 다시는 일리야가 사라져버리게 놔두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다짐하듯이 표정을 굳히고 시계를 쓰다듬었다.

 

 

*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옷을 입었다. 길이는 맞지만 조금 헐렁한 옷을 입은 일리야는 몸에 무언가가 휘감겨있는 것처럼 이상한 느낌에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인간이란 이런 끔찍한 상황에도 반드시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앞장서서 걷던 올렉이 코웃음 치는 것을 들은 모양인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일리야는 이미 웃음기를 지운 뒤였다.

 

그들은 건물을 나서기까지 몇 겹의 철문을 거쳐야했다. 그동안 일리야는 삐걱대는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얼마 남지 않은 정신력을 긁어모았다. 호송차량까지만 무사히 가면 잠시나마 차 안에서 앉아 쉴 수 있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어지러움을 참아내고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서 걷는 것에 집중했다. 길어진 앞머리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도 그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작은 행동에 쓸 에너지마저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이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남은 에너지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꽤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대여섯 명의 요원들에게 둘러싸여서 올렉의 뒤만 따라 걷던 일리야는 그가 오크로 된 문 앞에 선 채로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이 문을 나서면 밖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나가면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고, 그 차를 타면 일리야는 어쩌면 영영 러시아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넓고 넓은 러시아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다시는 그의 아이도 보지 못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리야는 후회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나폴레옹에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이쯤에서는 해야만 하는가. 올렉의 앞에서 드디어 열리는 두꺼운 오크 문을 보면서 일리야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지나간 선택은 돌이킬 수 없었다.

 

건물 입구 바로 앞에는 까만색의 차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올렉은 전 KGB 최고의 요원에게 해주는 대우가 겨우 차 두 대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과 함께 앞 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타라는 듯이 일리야에게 눈짓했다. 일리야는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좁은 차 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쪽에 요원 둘이 각각 올라타는 바람에 일리야는 가운데에 찌그러진 깡통처럼 끼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다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일리야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참았다. KGB에 잡혀온 후로 그는 지금 가장 나은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불평할 수 없었다.

 

차는 곧 출발했다. 일리야는 그제야 한숨 쉬듯이 붙잡고 쥐어짜던 에너지를 조금 풀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는 아이와 나폴레옹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뒤이어 가비와 웨이벌리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직도 생생한 얼굴들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은 한 발 늦게 찾아왔다. 어린 시절에 가정이 풍비박산 날 때 겪었던 만큼 큰 슬픔이었다. 일리야에게 눈물이란 것이 남아있었다면 아마 꼴불견으로 오열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그러기엔 힘이 없었고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세상이 색을 잃은 것처럼 그도 이미 색을 잃고 없었다.

 

이봐.”

 

일리야는 오른쪽에 앉은 요원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하지만 콧수염을 기른 그 요원은 일리야가 아닌 운전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음악이 너무 크다고.”

 

그 말에 일리야는 그제야 차 안에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의 4악장. 웅장하면서도 슬픈 선율이 차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일리야는 자신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볼륨을 좀 줄였으면 하는데.”

 

룸미러로 보이는 운전수의 매서운 눈은 콧수염을 기른 요원에게 가 있었다. 그는 몇 초 간 그 요원을 보는가 싶더니 동그랗게 튀어나온 버튼을 돌려서 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일리야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뇌가 인지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했다. 여전히 라디오에서는 비창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는 차 뒷좌석에 구겨져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 일리야는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은 채로 앞만 바라보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차가 갑자기 지그재그로 달리기 시작했는데도 양 옆에 있는 몸뚱어리들 때문에 일리야의 몸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귓가에는 이제 웅웅 올리는 고함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쿵쾅대는 심장소리만이 그의 고막을 가득 채우고 하얀 빛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으며 붕 뜬 것 같은 감각만이 온 몸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순간 모든 것이 까맣게 암전되면서 사라졌다.

 

1초가 억겁과도 같았다. 일리야는 자신이 의식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까만색 일색인 공간으로 점점 떨어지는 기분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불쾌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줬으면 했다. 그는 다시 의식의 세계로 가고 싶었다.

 

! ㄹ…리야!”

 

그때 일리야는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행여나 놓칠까 허겁지겁 그것을 붙잡았다. 그러자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발끝부터 고통이 밀려왔다.

 

일리야?”

 

일리야는 조금 헐떡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낮고 힘이 있는 이 목소리는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곧바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를 스쳤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과연 이 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던가. 확률을 가늠해보던 일리야는 사고가 원활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독하게도 아팠다. KGB 지부 건물을 나서면서 느꼈던 현기증과는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아마 좀 전에 벌어졌던 일이 그의 머리통에 무슨 짓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직접 눈을 뜨고 보는 것이 정확한 법이었다. 일리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일리야.”

 

일리야의 눈앞에는 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나폴레옹 솔로의 바다를 담은 파란 눈동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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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끄로시까: 러시아의 수프요리 중 하나

뻴메니: 만두와 비슷한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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